삼대(1931) -염상섭- |
● 줄거리 |
조의관은 평생을 치부를 위해 살아왔다. 남부럽지 않게 모은 돈을 바탕으로 그는 가정과 집안에서 행세를 하고 급기야는 의관이라는 벼슬도 사서 양반도 되고 그 바람에 족보도 새롭게 꾸민다. 모든 면에 있어서 주도면밀한 조의관이건만 그의 아들 조상훈은 그의 뜻과는 다르게 자꾸 비뚤어져 나간다. 조상훈은 조의관이 싫어하는 예수교 신봉자였던 것이다. 거기에다 상훈과 그의 처는 서모 수원댁하고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씨 일가에는 항상 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조상훈은 재산가 조의관의 아들이요, 미션 스쿨의 교사요, 교외의 재직이다. 그는 뭇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지만 실상 그의 이면 생활은 놀라울 정도로 이중적이다. 그는 술담배를 즐겨할 뿐만 아니라 젊은 여자들을 농락하는 난봉꾼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뒤를 봐 주었던 독립운동가의 딸이자 아들의 동창생인 홍경애를 농락하고 딸까지 낳았지만 사회와 교회에서의 체면을 생각해 어린 모녀를 내팽개치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홍경애와 딸의 문제를 해결짓지도 못하고 있으면서도 김의경이라는 아직 소녀티도 벗지 못한 딸같은 여자를 첩으로 들어 앉힌다. 조덕기는 조의관의 손자요, 조상훈의 아들이다. 조의관은 모든 기대를 손자 덕기에게 걸고 있었다. 즉 앞으로 자신이 죽거나 했을 때 모든 살림과 대부분의 재산을 손자에게 물려주려 하고 있었다. 그만큼 조의관은 아들 상훈을 신임하지 못했다. 그래서 조의관은 손자가 김병화와 같은 얌전치 못한 친구와 같이 다니는 것이 불만이다. 덕기는 일본으로 공부를 하기 위해서 건너가지만 조부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 귀국한다. 그때부터 덕기의 운명은 잠자코 공부나 하며 세월을 즐기는 갑부집 도련님의 위치에서 앞으로 조씨 가문을 이끌고 나갈 상속자의 신분으로 급전환한다. 그러나 조씨의 집안에는 늙고 병든 천석군 조의관의 재산을 탐하는 자들이 묘한 심리의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즉 수원집, 창훈, 최참봉 등의 한 패와 모든 재산이 아들에게로 모두 돌아가고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볼까 걱정하는 상훈이의 속셈이 공공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더욱이 자신에게 세 차례나 부쳤다고 하는 할아버지의 위독 전보와 돈이 감쪽같이 증발된 것도 덕기의 귀국을 막으려는 누군가의 소행이 있었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었다. 낙상을 하여 몸져 누웠던 조의관은 덕기가 돌아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조의관은 덕기를 불러 앞으로 집안의 모든 재산을 관리해 줄 것을 유언하고 생명처럼 아끼던 금고 열쇠를 덕기에게 맡긴다. 결국 조의관은 사망하게 되고 유언대로 덕기는 조씨 문중의 재산과 살림을 떠맡게 된다. 덕기는 할아버지가 자신을 금고 속에다 가두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 또한 할아버지의 재산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김병화는 덕기의 죽마고우이다. 그는 목사인 아버지와의 불화 때문에 집에서 나와 유랑을 하면서 좌익단체의 운동을 하고 있다. 그는 필순이라는 여직공의 집에서 살고 있는데 필순의 아버지가 젊어서 좌익운동을 했던 사람으로 병화에게는 선배격이다. 덕기가 필순에게 공부까지 시켜준다는 관심을 가지자 병화는 이를 반대하고 나선다. 유부남에게 갑부집 아들과 공장 여직공은 신분도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서로간에 사랑의 감정이 싹틀 경우 필순이가 불행해지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 병화는 홍경애와 사상적으로도 동지애를 느끼지만 그 이상의 연애감정도 줄곧 느끼곤 한다. 홍경애는 독립운동가의 딸이요 교원까지 지낸 수려한 미모의 현대적인 여성이다. 한때 조상훈과 가깝게 지냈지만 파렴치한 상훈에게 버림받고 상훈의 소생인 딸을 혼자 몸으로 키우며 친구가 하는 카페에 나가 주객들에게 술을 따르는 여자로 전락한다. 그러던 중 외가에서 피혁이라는 가명을 한 이우삼이 찾아와 믿을 만한 사회주의 운동가를 추천하라고 해서 병황에게 접근 이우삼과 연결시켜준다. 경애와 병화는 이우삼이 주고 간 자금으로 식료품 가게를 내고 운동의 수입원으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병화가 변절하고 운동자금으로 가게를 냈다고 몰아 붙이는 일명 장개석이라고 하는 장훈의 패들이 병화와 충돌을 일으키고 그 과정에서 필순의 아버지가 크게 다치게 된다. 그러던 중 경찰에서는 조덕기와 김병화가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혐의를 가지고 전면수사에 착수, 덕기의 집안 사람들과 병화,경애,장훈,필순들을 모두 연행해 조사를 벌인다. 그 과정에서 조상훈은 가짜형사들까지 동원해 아들의 금고를 터는 촌극까지 벌이기도 한다. 그 바람에 조상훈마저 구속된다. 장훈은 사정이 여의치가 않자 조사를 받던 중 독약을 먹고 자결한다. 검거된 덕기는 자신에게 씌여진 혐의를 하나씩 풀고 경찰에서 풀려나온 뒤 함께 검거되었던 사람들의 구명운동도 아울러 벌인다. 하나 둘씩 잡혀갔던 사람들이 나오고 필순의 아버지는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덕기에게 모녀의 앞날을 부탁한다. 덕기의 모친은 평소 덕기가 필순에게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는 것을 제2의 홍경애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 적이 있다. 덕기는 필순의 아버지가 왜 자기에게 식구들을 떠맡기는가를 생각한다. 그가 자신을 신뢰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을 거두고 돌보는 것이 또한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
● 인물의 성격 |
◆ 조의관(祖父) → 구한말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봉건적 질서의 수호자임. 양반에 대한 자격지심과 자식욕심이 강한, 한국의 전통적 가족관념의 소유자임. 대지주이며 재산가로 집안에서는 철저한 가부장적 권위로서 군림할 뿐 아니라, 사회 혼란기에 금전으로 신분의 상승을 꾀한 저열한 인물임. ◆ 조상훈(父) → 개화기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전통의 유교적 가치에 대해서는 반발하면서도 새로운 사상에 대해서도 적응하지 못하는 과도기적 인물. 젊은 날의 지사적 품격은 잠시, 반도덕적 속물적 인물로 전락하게 되고 인격 파탄자에 이르게 되는 인물임. ◆ 조덕기(子) → 식민지 세대에 속하는 인물로 조부와 부친의 극렬한 대립과 갈등을 적절히 조화하면서 변증법적 지양을 보이는 인물임. 할아버지 세대와 아버지 세대의 모순을 발전적으로 이은 세대로서 작가의 역사적 전망을 보여줄 인물임. 비교적 합리적인 현실주의자이며 부르주아 가정의 양심적인 당대 지식인의 전형에 해당하는 인물임. ◆ 김병화 → 급진적 사회주의 이념의 소유자임. 행동적이고 논리가 명쾌하며 과단성이 있는 인물 ◆ 홍경애 → 우국지사의 딸로 파란많은 인생을 사는 인물이지만, 성격이 다소 불분명하게 그려지는 인물이지만 작품의 흐름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임. |
● 이해와 감상 |
1931년 1월 1일부터 9월 17일 까지 조선일보에 연재 발표된 <삼대>는 한국 현대 소설사에서 명작으로 꼽히는 가족사 소설이다. 조의관으로 대표되는 구세대(제1세대), 그의 아들 조상훈으로 대표되는 개화기 세대, 그리고 손자 덕기로 대표되는 식민지 지식인 세대. 이렇게 3대에 걸친 가족의 파란만장한 삶의 기록이라 하겠는데,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가족 간의 갈등상을 통해 당대 현실을 적나라하게 구체화한다. <삼대>의 가족 무대는 한국 현대사를 완전 수렴할 정도로 방대하게 확장되어 있는데, 3대에 이르는 시대적 흐름을 통해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여기에서 실제로 배경이 되고 있는 시간은 1년 남짓한 시간에 불과하지만, 이 물리적 시간 때문에 가족사 소설로 보지 않으려는 태도는 수긍하기 어렵다. 1년간의 사건은 그 시간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사건의 맥락이 시대적 흐름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등장인물 자체가 그 인생을 통해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것이다. 가족 문제의 중심은 주로 돈에 관련된 것이며, 여기에 여자 문제가 부각되며, 사상문제 등이 사건의 축을 이룬다. 그런데 전면에 첨예한 갈등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갈등의 배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가치관의 갈등이라 할 수 있다. 작자는 아마도 이 <삼대> 한 편을 통해 당대 사회사를 종합적으로 서술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
● 핵심사항 정리 |
◆ 갈래 : 현대 장편 소설, 가족사 소설, 사실주의 소설, 장회(章回)소설, 신문연재소설 ※ 가족사소설 → 역사의 변화 속에서 한 가족의 융성과 몰락의 과정을 서술한 소설 (ex> 채만식의 <태평천하>) ◆ 배경 * 시간적 : 식민지 시대(1930년 전후) * 공간적 : 식민지 조선, 서울, 조의관의 집(중산층 집안)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각 장면에서 주요 인물을 시점의 주체로 삼음) ◆ 성격 제시 방법 : 행동과 대화를 통한 간접적 제시 방법과 서술자의 논평에 의한 직접적 제시 방법이 거의 동등하게 사용됨. ◆ 갈등구조 ① 가족 내부의 갈등 : 세대의 가치관 및 재산권을 중심으로 한 삼대의 갈등 ② 개인과 사회의 갈등(계층간의 갈등) : 타락한 부르주아와 급진적 사회주의 이념 사이의 갈등 ◆ 주제 ⇒ 한 가족의 삶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세대·계층간의 갈등 및 현실 대응 방식 |
● 생각해 볼 문제 |
1. 조의관, 조상훈, 조덕기로 이어지는 세대는 구한말, 개화기, 일제 강점기로 이어지는 시대의 흐름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고 볼 때, 작가가 각 시대를 해석하는 눈은 어떠한지 정리해 보자. → 조의관으로 대표되는 구한말 세대는 봉건적 성격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데, 작가는 조선적인 요소를 거의 그대로 이어가는 구한말의 가치관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개화기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다.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그것이 자생적인 것이 아니요, 외래적이라는 데서 그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조덕기로 대변되는 식민지 시대는 앞선 두 시대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하는 시대로 설정하고 있다. 여기에는 작가의 전망이 투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당대에 대한 묘파라기보다는 식민지 시대에 대한 하나의 전망 차원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2. 이 작품에는 사상적인 측면에 대한 것도 그려지고 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그것인데, 이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태도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 → 작가의 시각은 덕기에 의해 구현되는데, 덕기의 사상적 측면은 개량주의자로 볼 수 있다. 그가 사회주의자인 친구를 가까이 하면서도 결코 그 세계에 몰입하지도 비판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것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또한 민족주의자에 대한 태도는 그들을 매우 따뜻한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식민지 세대가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의 이념들에 대하여 가치 중립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이념들이 모두 민족의 삶에 긍정적인 일면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을 내리고 있는 것 같다. 3. 이 작품이 가족사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리얼리즘 소설의 최고봉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 한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1920년대와 1930년대를 아우르는 사회적 현실이 안고 있는 온갖 문제들을 망라하고 있으며, 그 사회의 질서를 매우 논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평을 받고 있다. |
● 더 읽을거리 |
● 조덕기의 변증법적 삶에 대해서 ⇒ 조의관의 삶과 그의 아들 조상훈의 삶은 서로 대립되지만, 그의 손자 덕기의 삶은 할아버지의 삶의 가치와 아버지의 삶의 의미를 초월하면서 생성되고 있음을 본다. 기성 세계인 유교 가치 실현의 세계와 새로운 기독교적 가치로 상징되는 개화 세계가 모두 지양되어야 할 기존 세계로 남으면서 미래 지향적인 새 세계가 요청되게 되었다. 그것이 덕기의 세계이다. 덕기는 할아버지의 세계에 존재했던 가치와 아버지의 삶에 있던 가치의 세계를 상승적으로 계승하면서 당대의 새 가치인 프롤레타리아의 가치를 수용하고 전통적인 민족 의식을 주축으로 하여 새 삶을 지향하게 되었다. 덕기의 이 같은 상승적인 삶은 염상섭이 지향하고자 한, 식민지 사회에서의 창조적 삶이었다.
● 삼대 -근대 전환기의 사회와 가정의 갈등상을 개성적인 중간층의 시선으로 형상화한 염상섭의 역작- ▶가정적 욕망과 사회적 욕망의 경쟁 <삼대>(1931)는 1920년대 식민지 현실을 배경으로, 조 씨 가문의 삼대에 걸친 특징적인 가족사 이야기와 집 안팎에서 벌어지는 욕망의 갈등을 드라마틱하게 다룬 장편이다. 이 소설에서는 두 축에서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문제된다. 즉, 가정소설 또는 가족사 소설의 관점에서 보면 가정 혹은 가족사 내에서의 욕망의 경쟁이 문제되고, 또 한 측면에서 보면 조덕기를 중심축으로 하여 벌어지는 가정적 욕망과 사회적 욕망 간의 경쟁이 문제된다는 것이다. 먼저 조덕기의 가정 내부를 살펴보자. '조의관-조상훈-조덕기'로 이어지는 삼대로 구성된 이 가정에는 크게 보아 '가문의 명예욕', '금전욕', '애욕' 등 세 가지 욕망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집안의 복잡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1대인 조의관에게는 '사당'과 '열쇠'로 상징되는 가문의 명예욕과 금전욕이 주로 욕망이 되고 애욕은 부수적이 된다. 가문이나 돈이나 할 것 없이 열악했던 조의관이었기에 그는 일종의 보상심리로서 이 둘을 우선으로 욕망한다. 조의관에게 있어 주요 욕망 둘은 상호 보완적이다. 그 보완 관계는 금전욕의 실현 결과인 돈을 통한 가문의 명예욕의 추구로 나타난다. 그가 아들이 조상훈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기독교도인 아들이 자신의 욕망의 방향과 다른 쪽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2대인 조상훈에게 가문의 명예욕은 단지 부수적이거나 아니면 욕망의 권외로 밀려난다. 대신 가정 외적인 사회적 욕망을 추구하지만 방종과 타락으로 인해 무분별한 애욕에 매몰되고 만다. 그에게 있어 애욕은 아버지가 갖는 가문의 명예욕, 그것의 대체 욕망의 성격을 지닌다. 결국 애욕과 금전욕을 주요 욕망으로 삼고 있는 조상훈은 가정 대신 개인을 추구하지만, 근대적인 개인성의 확보에로 이르지는 못하고 분열적인 면모를 보여줄 따름이다. 이렇게 1대와 2대는 그 주요 욕망의 차이로 인해 경쟁하고 서로 질시하는 관계가 된다. ▶삼대에 걸친 이야기? 세 번째 대의 이야기? 이런 양상은 3대인 조덕기에 이르면 가일층 복잡해진다. 이제 그는 가정 내에서는 금전욕만을 주요 욕망으로 택한다. 조부는 자신이 견지했던 가문의 명예욕과 금전욕 둘을 모두 물려주고자 했으나, 전자는 현저히 약화되어 다만 부수 욕망으로 전락할 따름이다. 그는 일제가 유교적 가치관과 신분 질서를 무너뜨리면서 강요한 자본주의 상황에서 이제 돈을 좇는 경제적 욕망이 최고로 부상한 주요 욕망임을 간파한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그의 욕망의 대상 중 금전욕은 여타의 욕망들을 제치고 최상위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조덕기는 그에 앞선 1, 2대와의 경쟁에서 최종 승리자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볼 때 표제인 <삼대>는 중의적이다. 단지 가족사적 측면에서 1, 2, 3대에 걸친 '삼대'의 이야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중 세 번째 세대인 조덕기를 초점화한 이야기임을 구조적으로 암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대>는 조덕기로부터 시작하여 조덕기의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다. ▶동감하는 중간층의 야누스적 왕복 운동 '삼대'인 조덕기를 초점화하여 관찰하면, 그의 욕망의 대상 중 절반은 가정 밖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는 1대인 조의관의 욕망이 주로 가정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작품에서 조의관의 동선이 주로 가정 안에 맴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조덕기는 가정과 사회 사이에서 왕복 운동을 하고 있다. 친구인 병화를 만나 홍경애의 카페에 가거나 필순네 집에 가거나 멀게는 동경까지 가서 유학을 하고 있다. 이 왕복 운동에서 덕기는 대치되는 욕망과 의식을 체험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욕망들 간의 경쟁을 목도한다. 우선 외출하는 길에서 그는 수평적으로 사회를 향한 탈가정적 욕망의 부추김을 받는다. 그것은 병화와 같은 이른바 '주의자'와의 만남과 대화에서 모방되고 촉발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병화, 장훈, 홍경애 모녀, 필순과 그 부모 등이 연루되어 있는 피혁 사건에 관계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사회 개혁 또는 혁명을 통한 민족 해방을 지향하는 그들을 '냉담히 방관'하지도 그렇다고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동참하지도 않고, 다만 '동감'하는 선에 머무를 따름이다. 그는 후일을 기약하는 준비론자이며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중간층 이기주의자이기도 하다. 이런 사정은 귀갓길에 그의 의식이 지니는 길항력(서로 비슷한 힘으로 버티고 대항하는 힘) 때문이다. 귀갓길에서 그는 탈가정적 욕망을 접어놓고 수직적으로 전개되어 내려온 가정적 욕망으로 그의 의식을 채운다.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자기 집에 있는 돈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중도적 고뇌와 그에 대한 비판 이렇듯 덕기의 왕복 운동은 가정적 욕망/탈가정적 욕망, 개인적 욕망/사회적 욕망, 수직적 욕망/수평적 욕망이 교차되는 진자 운동이다. 이 혼란된 과정 속에서 덕기는 새로운 출발을 예비하는 전망을 발견하지 못한 현실 추수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봉건적인 조부, 반봉건반근대적인 부친, 사회주의자인 김병화 등 여러 이질적인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근대적 개인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인다. 그것은 예의 야누스적 왕복운동의 결과이기도 하다. <만세전>에서 이인화가 '신생의 발견'을 예비하는 과정에서 근대적 개인의 조짐을 보인 인물이었다면, <삼대>의 조덕기는 이인화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근대적 상황을 체험하면서, 이 혼란스런 근대적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를 고민하는 인물이다. 물론 작가 염상섭의 입장에서는, '개인' 중심의 이인화의 문제의식을 넘어서, '개인'과 '가정' 및 '사회'를 가로지르며 새로운 중도적인 이념을 모색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1931년의 식민지 현실에서는 결코 단순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중간자의 고뇌 및 동감을 그리는 선에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채만식은 생각이 달랐다. <태평천하>(1938)에서 그는 일제에 협력하여 부자가 되고 가문을 번성시키려 하는 윤직원네 집안의 몰락을 그린다. 조의관이나 윤직원처럼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돈을 번 집안에 대한 민족주의 윤리에 입각한 단죄이다. 그것은 <삼대>의 머뭇거림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삼대>의 고뇌로부터 배운 타산지석의 결과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 염상섭의 '삼대' - 가족 속의 삶- 염상섭의 '삼대'는 그 표제만으로는 언뜻 가족사 소설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조의관에 의해서 사당과 금고의 승계권자로 지명된 덕기를 중심으로 해서 조의관의 죽음을 전후한 약 1년 간의 시간을 안고 있을 뿐이다. 가족사 소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은 1년이라는 짤막한 시간에서뿐만 아니라, 조씨 일가의 가부장(家父長)이요, 덕기로 하여금 동경과 서울, 바카스 술집에서 병화 하숙집까지의 사회적 공간의 향유를 가능케 하는 경제력의 원천인 조의관의 내력이 분명치 않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가 만석꾼이며 정총대(정총대)를 지냈다는 이력이 희미하게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이 작품에서 부정적 인물로 다루어져 있으며 기독교 신앙 때문에 결국은 상속권을 아들에게 빼앗기고 마는 이대(二代)째인 조상훈의 전락 과정도 희미하다. 교회 안의 인물이요, 미국 유학생이요, 학교 교사로서의 모습은 배경에 흐릿하게 깔려 있을 뿐이며, 그의 횡적 인간관계도 독자로서는 알 길이 없다. 통속소설의 악역감으로도 구색을 갖추고 있는 그의 사람됨이 비교적 실감 있게 다루어져 있는 것은 경애의 유혹자로서도 아니요, 김의경과 도피 행각을 벌이는 탕아로서도 아니요, 가족끼리 싸움을 벌일 때 가족 속의 인간으로서이다. '만세 전'이 1910년대의 한국 사회를 극명하게 묘사하고 있듯이, 1931년에 발표된 '삼대'는 1920년대의 한국 사회를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이 밖에도 두 작품은 몇 가지 공통성을 드러내고 있다. '만세 전'의 나와 '삼대'의 덕기는 다 같이 일본 유학생이고 부잣집 아들이며 치밀한 관찰자이다. 그들은 적극적인 행동파가 되지 못하는 이념형(理念型)이고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고 또 우울증을 공유하고 있다. 가족 제도라는 큰 테두리에 의해서 보호받고 있으면서 동시에 얽매여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된다. 차이가 있다면 '만세 전'의 주인공이 유탕적(遊蕩的) 기색이 농후한테 비하여 덕기가 만석꾼의 상속자답게 한결 착실하다는 정도일 것이다. 나이에 비해서 어른스러운 이들은 학생의 신분이면서도 학생치고는 너무나 원숙하다. 이 점에서 그들으 ㄴ19세기 러시아 소설에 자주 나오는 만년 대학생들을 연상시킨다. 현실에 대해서 불만은 많으나 정작 자기들이 담당해야 할 사회 속의 구실을 찾지 못하고 스스로를 무용지물이라고 느끼는 저 우울한 만년 대학생 말이다. 이들 만년 대학생과 그들의 애인들은 대개 러시아의 시골에 처박힌 채, 보다 나은 내일과 두고 온 모스크바를 그리워한다. '만세 전'이나 '삼대'의 주인공도 주어진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갈망을 가지고 있다. 사회 속에서 자리를 잡기 이전의 이런 만년 대학생을 주인공으로 선정함으로써 작가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어느 모로 그들은 때묻지 않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삼대'에는 두 갈래 삶의 흐름이 나타난다. 그것은 덕기네 집안의 조의관 부자(父子)가 구현하고 있는 현실 추수적(追隨的) · 소비적 삶의 양상과, 한편으로는 김병화가 하숙 들어 있는 필순네 가족을 통해서, 또 덕기와 병화 사이의 교량적 구실을 하는 홍경애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현실에 있어서 반체제 지향적인 이념적 삶의 양상이다. 이것은 1920년대의 억압적인 식민지 현실에 대처할 전형적인 삶의 양식이기도 하였다. 단순화해서 말해 본다면, 조의관 쪽은 가정 속의 일상 인간이요, 병화네 쪽은 이념 인간이다. 사실상의 주인공격인 덕기는 가정 속의 일상인과 이념인이 적절히 조정되어 있는 중간형이라 하겠다. 이러한 덕기를 위시해서 조의관, 수원집, 덕기 모친, 경애 모친, 창훈, 기타의 군소 인물들이 단단히 조형되어 있어 살아 있는 인물로 여실하다. 이에 비하여 김병화, 이필순, 피혁, 장훈 등의 이념인 내지는 행동인들이 조형에 있어 단단치 못하고 억지로 구색을 갖춘 인물들이라는 무리를 느끼게 한다. 3 · 1운동을 전후해서 활약하다 병사한 독립투사의 딸인 홍경애는 갈팡질팡하는 의식을 반영해서 약간 모호한 구석이 있는데, 이것은 작가의 솜씨보다는 그녀의 복잡성과 접대부라는 직업적 요청의 상승 작용에서 나온 것이고, 이점이 조상훈과 성격 조형상의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가정 속의 일상인이 살아 있는 인물로 생동감을 주는 것은 대체로 뛰어난 대화 장면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염상섭의 대화 장면은 모든 문화 속의 대화가 그렇듯이 다분히 양식화된 대화이다. 다분히 양식화된 대화 언어가 가장 밋밋한 구체성과 생동성에 도달한 것은 언쟁을 할 때이다. 가족 제도와 가정 속의 일상인을 끈질기게 추구한 염상섭이 언쟁의 대화에서 솜씨 자랑을 하게 되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의 대화는 말이 사람들을 맺어주기보다는 이간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대동보소(大同譜所)의 문제 때문에 조의관 부자가 싸우는 제1 충돌, 수원집과 덕기 모친이 싸우는 제2 충돌은 집안 싸움의 고전적 장면이라 할 만하다. 이 점에 주목할 때, '삼대'에서 전체적으로 가장 빼어난 부분은 조의관의 사망 직후를 다루고 있는 '소문'이라는 장(章)인 것이다. 특히 필순의 덕기 방문 때문에 빚어지는 덕기와 덕기 모친과의 충돌, 덕기 모친의 히스테리컬한 일방적인 호통은 가히 일품이라 할 만하다. 그러면 반영웅적인 등장 인물들이 정열을 기울여 집안 싸움을 벌이고 또, 음모를 꾸미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삼대'란 제목은 이른바 제너레이션(generation)이란 말로 표현되는 세대 간의 대립을 연상시키는 첩경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묘사 능력이 가장 본때 있게 발휘된 영역의 소재는 상속과 재산과 치정(癡情)이다. 세대 사이의 이념적 대립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로 나오는 김병화는 기독교 장로인 부친과 절연해서 집을 뛰쳐나왔고, 신자인 상훈은 제사와 족보 문제로 부친과 충돌하고 승계권을 박탈당한다. 그러나 암시만 되어 있는 병화 부자(父子)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조의관 부자의 경우에도 전통적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개화된 예수교도의 충돌이라는 형태의 대립보다는 족보와 대동보소와 치산을 중심한 재산 관리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충돌의 직접적 계기가 되어 있다. 재산 관리상의 대립도 상훈 자체가 재산의 합리적 운영을 도모할 위인이 못 되는 낭비자이므로 경제적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의 대립도 아니다. 상속에 의해서 제 몫이 될지도 모르는 재산의 손실이 상훈의 주요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조 씨 일가의 세대 대립이 근본적으로 이념적인 것이라기보다 구체적인 돈 문제라는 것은, 가령 세대 대립을 다루고 있는 걸작으로 알려져 있고, 또 염상섭이 여러모로 참고했으리라고 짐작되는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과 비교해 보아도 분명해진다. 비자로프와 아르까디의 배부 사이의 우습게 끝난 결투에는 물질적 이해 관계가 끼어 있지 않은 것이다. 돈과 상속은 덕기 부자의 대립의 경우에 더욱 분명하고 추악하게 노출되어 있지만, 여자들끼리의 갈등에서 계속 중요 계기로 남아 있다. 수원집과 덕기 모친의 대립은 연령과 조응하지 않는 위계 질서, 충족되지 못한 사랑의 기갈을 안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울분의 폭발 등의 측면이 있지만, 상속권에 있어서 이해 관계의 대립이 가장 큰 동기가 된다. 비슷한 상황은 필순을 둘러싼 덕기 모자의 충돌에서도 엿보인다. 필순의 방문에서 덕기 모친은 홍경애를 연상하고 자기 연민적인 울분을 토로하는데, 이때도 돈이 개입한다. 언제 안 사람이라구 웬 놈의 정성이 뻗쳐서 의사를 지시해 준다, 담요를 갖다 준다 하더니 그 딸년을 끌어들이는 꼴이 약값 입원료도 좋이 물잇구럭을 해 줄 거라! 제 이 홍경애 아니구 뭐냐? 수원집, 경애, 의경이 그리구 삼대째는 뭐라는 년이냐? 일본에서 돌아온 덕기가 집안의 퀴퀴한 냄새에서 돈동록을 연상하고, 조의관이 수원집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재산으로 노리고 덤비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데서 분명한 것처럼, 돈은 가족 속의 일상 인간을 갈등의 소용돌이로 휩쓸어 가는 계기요, 그들의 행동 거지를 일률적으로 규제하고 있는 공통 인수이기도 하다. 작품의 결말에서 덕기가 '돈이란 뭐냐? 돈은 어디서 나온 거냐?'고 하면서 '돈을 좀 가지고 올 걸!'하고 생각하는 것은 이 작품의 핵심을 드러내고 있다. 돈 때문에 생기는 갈등과 싸움에 비하면 여자는 오히려 부수적이다. 이기주의의 한 단위로서의 인간, 그것이 가족 속의 일상인의 싸움을 통해 제시되어 있는 염상섭의 인간관이다. '삼대'의 놀라운 점의 하나는 거기에 사랑의 묘사가 제대로 없다는 것이다. 4백 페이지나 되는 이 장편소설에서, 가령 덕기 내외가 내외로서 애정을 교환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한 번도 없다. 내외가 대화 비슷한 것을 나누는 것은 남편이 아내에게 호통을 칠 때뿐이다. 이러한 내외 관계는 조상훈 내외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내외 간의 애정뿐 아니라 이 작품에는 연애다운 연애 장면도 없다. 적어도 사람들에게 불가사의한 가슴 설렘으로 체험되고 기억되는 환희와 고뇌의 원천으로서의 사랑이 정면으로 다루어진 적이 없다. 집안의 말싸움에 있어서 그렇듯이 솜씨 자랑을 하는 염상섭이 그럴 듯한 사랑의 장면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상훈의 타락의 계기가 되기도 했던 홍경애와의 사랑의 장면은 '추억'이라는 장 속에 불과 몇 줄로 어리벙벙하게 취급하고 있을 뿐이다. 가슴을 두근거리며 몰래 펴던 경애는 도리어 김이 빠지었다. 좀더 무슨 뼈진 말이 있을 것같이 생각되었고, 또 그런 말이 없는 것이 이상히도 섭섭하였던 것이다. 한편, 덕기와 필순 사이의 감정의 교류와 필순의 덕기 방문이 다루어져 있는 장에서는 '애련'이란 프랑스 영화의 제멋대로 번역해 놓은 것 같은 표제가 붙여져 있는 것도 오늘의 독자들은 수긍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필순 편에서 덕기에 대한 막연한 기대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전후 사정으로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러나 기혼한 부잣집 아들과 반찬 가겟집 딸의 심상한 대화가 어째서 '애련'이 될 것인가. 위와 같은 말은, 그러나 염상섭이 남녀 관계를 그리는데 무능하다고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남녀 관계를 다룰 때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대개 치정이 되어 버린다. 염상섭에게 본격적인 사랑의 정경이 없다는 것은 그의 어른스러움과 작가로서의 성숙을 의미할 수도 있다. 적어도 염상섭은 이광수처럼 비록 천박한 유혹자의 경우라도 아래와 같은 구절을 적어 놓고 태연할 정도로 뻔뻔스러운 작가는 아니다. '아아, 내 순례요. 이 세상에 오직 하나인 내 순례여. 그대는 어떻게 이렇게도 내 피를 끓게 하는가. 내게서 사라졌다고 생각하였던 정열이 어떻게도 그대의 고운 눈자위, 보드라운 살의 감촉으로 이렇게도 불이 타게 하는가. 아 그대의 살의 감촉, 그 체온!' ('흙'에서) 가정 속의 일상인을 그리는 데 명수인 염상섭은 끝내 뿌듯한 사랑과 정열을 다룬 작품을 쓰지 못하고 말았다. 그것은 한 시대의 살림살이와 그 습속을 그리는 작가로서는 치명적인 불구 현상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그것은 밋밋한 사랑의 표현을 금기로 삼았던 구도덕과 그 구도덕의 기반이 되었던 구질서가 빚어 내게 마련인 인간성의 망측스러운 왜곡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가 사랑을 그리지는 못하되 치정을 그리기는 했다는 것은 그의 어른스러움이 사실은 구도덕인, 폐쇄적인 사랑관(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 것이다. 한편, 구도덕이 지배적이었던 상황에서 사랑과 구애의 공인된 형식이 없었고 그 때문에 사랑과 구애는 어쩔 수 없이 연극적인 우스꽝스러움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염상섭의 점잖음과 어른스러움은 이 우스꽝스러움을 견디어 낼 수 없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사랑의 정열을 정면으로 다루지 못한 그가 반비극적이고 반영웅적인 삶의 작가로 일관하였음은 우연이 아니다. 이리하여 그는 고양된 인생 의식을 보여주지는 못했으나, 가정 속의 일상인의 반영웅적인 삶을 통해 이러한 반영웅적인 삶의 터전이 되어 있는 가족제를 비롯한 구질서의 탁월한 비평가가 될 수가 있었다. 이것이 염상섭 문학이 품고 있는 소극적 가치의 중요 국면일 것이다. ●유종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