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금이 있던 자리(1993)

-신경숙-  

◆ 소설 읽기  

● 줄거리

유부남과 미혼녀 '나'의 불륜적 사랑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식상할 듯한 이러한 이야기의 큰 틀이 화자인 '나'가 유부남인 상대방을 향해 보내는 편짓글이란 형식을 취함으로써 독자에게 흥미를 끌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마치 남의 비밀스런 편지를 엿보는 느낌으로 독자는 숨을 죽이고 그들의 사랑의 자취와 '나'의 어린 시절의 남다른 기억들을 좇게 된다. 유부남인 상대방은 외부적 환경의 굴레를 벗어 자신들만의 사랑을 위한 도피를 '나'에게 제안해 오고 이에 끝내 승낙을 보류한 채 고향에 이른 '나'는 자신이 어린 시절 만났던 한 여인을 회고한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데려온 한 여자였고 그로 인해 자신의 어머니는 지켜오던 가정을 그녀에게 내주고 잠시 떠난 상태에서 아버지가 데려온 그 여자의 새로움에 이끌리었던 어린 시절을 '나'는 돌이켜 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좋아 보였던 어린 '나'는 그 여자와 같은 여자가 되리라는 철없는 꿈을 꾸었고, 어느덧 자신이 그런 그녀의 모습을 닮은 사랑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나'는 자신이 쓴 편지를 띄우지 못한 채 약속 시간을 넘긴 뒤 애타는 마음에 금지된 애인의 집으로 전화를 넣어 본다. 그의 아내가 전화를 받자 그를 바꿔달라는 말을 건네자 그의 어린 딸을 향해 그의 아내가 아빠 전화받으라고 전하라는 말이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다. 그도 역시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나'는 고향에서 초라해진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은거한다는 것으로 이야기의 끝을 맺고 있다.

● 이해와 감상

새로운 소설 형식 → 시적 산문의 아름다움

이 소설은 매우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체를 보인다. 여성 특유의 서정적 감각이 돋보이는데, 편짓글 형식을 차용함으로써 그런 특성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여기서는 1인칭 서술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2인칭과 뒤섞섞여 있다. 2인칭 '너'는 따로 존재하는 화자가 아니라, 1인칭 '나'와의 관계에서만 설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초점 주체가 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간간이 2인칭 서술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이는 새로운 소설 형식을 찾으려는 작가의 실험 정신의 결과라고 하겠다.

'시내 다방에 마주앉았을 때, 당신은 나를 질책하셨어요. 당신은 저를 그렇게도 간절히 바라건만,제가 당신과의 관계를 그저 남녀 간의 어지러운 정쯤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지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렇지 않으면 왜 약속을 어기려 드느냐고 되물으셨지요.'

이런 형식상의 새로움은 표현에서도 드러난다. 유독 많은 문장 부호를 쓰고 있는데, 이 부호는 단순히 문장의 흐름만을 통제하는 기능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통해 내면의 심리를 드러내는 기능까지 수행하고 있다.

1) '여기저기 참 아름다웠습니다. 산은 푸르고 …… 푸름 사이로 분홍 진달래가 …… 그 사이 …… 또 …… 때때로 노랑 물감을 뭉개 놓은 듯, 개나리가 막 섞여서는 …… 환하디 환했습니다.'

2) '당신, 딸 이름이 은선이었군요. 은선이. 그애의 이름을 서너 번 불러봤어요. 나물 같은 이름. 어디에 고여 있었는지 눈물이 오래 쏟아졌어요. 은선이.'

이 소설에서는 말없음표와 쉼표, 마침표가 유독 많이 찍혀 있다. 1)에서는 말없음표를 통해 화자의 내면 심리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서 그려진 광경은 매우 아름답고 밝은 것이다.그러나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화자의 내면 풍경은 우울하기 그지없다. 그런 내면의 흐름을 부호를 통해 나타내고 있는데, 내면의 흐름을 느릿하게 만들면서 울적한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2)에서는 그 반대로 속도감을 높이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부호를 통해 문장 단위를 짧게 만들면서, 서술 내용을 압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위에서 마침표와 마침표 사이에는 사실 많은 설명적 문장이 끼여들 틈이 있다. 그런 것을 과감히 생략하고 비약적으로 진술함으로써 산뜻한 느낌과 함께 내면 심리의 떨림을 여운 있게 포착하도록 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콤플렉스

이 작품에서 초점화되고 있는 것의 하나는, 아름다움에 대한 콤플렉스라고 말할 수 있다. 화자는 기차에서 내려 역구내의 수돗가에서 손을 씻는데, 이것은 이 마을을 떠나거나 찾아올 때마다 되풀이되는 행위이다. 그런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화자는 짐짓 모르는 체한다. 그러나 그것은 깨끗함,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의 콤플렉스에서 기인한다. 이 작품에서 화자가 도시에서 시골로 올 때 손을 씻는 내면 심리는, 시골은 촌스럽고 불결하며 세련되지 못한 공간이라는 자기 열등감이 발동되기 때문이며, 거꾸로 시골에서 서울로 갈 때의 심리 그것도 마찬가지로 열등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손 씻기와 '그 여자'의 이야기는 교묘하게 교차하고 있다. 이 작품이 더블 플롯으로 되어 있음을 상기할 때, '그 여자'의 이야기는 이 작품의 핵심이 되며, 손 씻는 일과 '그 여자'의 일이 교차되는 것은 '그 여자'의 일 또한 손 씻는 일처럼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콤플렉스와 연관될 것임을 복선으로 예비하고 있다.

마을 여자를 묘사한 대목을 보면, 촌부들을 들먹이는 심리의 근저에는 그런 촌스런 여자에 대한 혐오감이 짙게 깔려 있다. 이런 여자와는 달리 살갗이 뽀얗고 은은한 향기가 나며 화사한 모습을 한 그 여자는 화자에게 하나의 경이였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그 선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혈육인 어머니와 아름다운 그 여자 사이에서 화자는 차라리 아름다운 그 여자에게 이끌려 있는 내면 심리가 심층에 깔려 있는 것이다.

◆ 살 빼는 여자들

점촌댁 아주머니는 눈물겹게 줄넘기를 하면서 살을 빼며 울고, 에어로빅을 하는 중년 여인도 눈물 속에서 살을 뺀다. 살을 뺀다는 것은 여성의 외모를 아름답게 하려는 애달픈 몸짓이다. 이 작품에서 버림받은 여자들은 하나같이 여성다움의 상실 때문이다.

남성은 아름다운 여성을 찾게 마련이고, 여성 또한 마찬가지이다. 신경숙은 줄넘기와 에어로빅을 하는 여자를 나무라지 않는다. 그리고 줄넘기와 에어로빅을 하게 했던 여자들도 나무라지 않는다. 그것을 그녀는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화자의 심연에 내재하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콤플렉스는 인간 본연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의식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경숙은 그 점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하도록 문을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 여자 - 떠나는 아픔

화자는 결국 '당신' 곁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려고 한다. 사랑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는 아픔이 전편을 압도한다. 화자가 떠나려는 이유는, 다른 여자와 그 여자의 딸에게 아픔을 주지 않으려는 것 때문이다. '당신'의 딸 은선이는 화자이며, '당신'의 아내는 화자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 여자에 대한 환상과 어머니의 현실, 환상은 환상대로 아름답지만 현실은 현실대로 소중한 것이다. 환상과 현실은 공유할 수는 없지만, 현실에 충실하면서 환상을 잃지 않는 태도가 바람직한 것이다. 그녀는 어렵지만 현실의 길을 택한다. 그러면서 그 여자의 환상을 지우지는 않는다. 지금은 견디기 어렵지만 머지않아 그런 극복의 성숙한 날이 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작가 신경숙은 90년대 초반에 등단하면서 우리 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작가이다. 그 새로움은 80년대의 이념적이고 사회적 성향의 소설이 주를 이루던 문단에 극히 감성적이고 개인적 성향의 소설을 내놓음으로써 우리 문단에 새로운 반향을 일으킨 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작가의 섬세한 시적 문체는 80년대의 사회적 작품들이 보이던 딱딱한 문체에 지쳐가던 독자들에게 촉촉한 단비와도 같은 따스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작가 신경숙의 일련의 작품들은 90년대가 80년대의 이념적 갈등을 넘어 감성적이고 개인적 성향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조심스레 예고하였고 많은 독자들이 이에 호응해 주었다. 이러한 작가 신경숙의 작품 성향을 대표하듯 90년대 초입에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작품이 바로 <풍금이 있던 자리>이다.

 작가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는 이처럼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륜이라는 식상한 소재를 새로운 형식을 통해 새 옷을 갈아입힘으로써 불륜이라고 치부해버리고 말 우리 사회의 금지된 사랑의 의미를 다시금 되돌아 보게 한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별다른 사랑의 감정 없이 결혼이라는 의식을 치룬 남녀 중 한 사람이 결혼 이후에 타인과 진정으로 사랑을 느끼게 되어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면 이것은 어떠한 항변도 불가능한 불륜이라고 치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가? 우리는 사랑보다는 환경과 조건이라는 객관적 잣대에 의해 결혼이라는 중요한 의식을 진지하지 않게 치루는 남녀를 흔히 볼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쉽게 결별을 선언하는 그들의 모습 또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러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는 현실도 또한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사랑 없는 결혼 이후에 진정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 자들에게 그저 우리는 돌만 던질 준비만 하면 된다는 것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은 것 같다. 물론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도 중요하지만 결혼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 의식의 본질은 환경과 조건이 될 수 없다. 그 본질은 이론의 여지 없이 사랑이어야 하지 않은가. 사랑 없이 환경과 조건에 의해 결혼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며, 계약에 의해 영리를 추구하는 사업가와 무엇이 다를 바 있는가.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불륜이라 치부되고 말았던 무수한 관계들 속에는 새롭게 평가받아야 할 것들이 상당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사회가 개인들에게 요구하는 무자비한 획일화의 횡포를 수정해 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신경숙의 소설 <풍금이 있던 자리>를 읽으며 불륜이란 의미의 이면을 한번 살펴 본다면 우리의 의식 속에 내재한 부당한 획일화의 잣대를 균형잡힌 잣대로 손 볼 좋은 기회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 핵심사항 정리

◆ 갈래 : 단편소설

◆ 배경 : 과거와 현재, 어느 시골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표현상 특징 :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각이 돋보임.

                          편지 형식의 글

◆ 주제 ⇒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는 아픔과 극기의 모습

● 생각해 볼 문제

1. 화자는 시공에 오거나 떠날 때에 손 씻는 버릇이 있다. 이 버릇의 근저에 웅크리고 있는 심리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 화자의 버릇은 '그 여자'와 관계되는 것이다. 화사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것에 대한 부러움이 마음의 심층에 무의식으로 쌓여 그것이 이 마을과 관련될 때마다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열등감으로 설명될 수 있다.

2. 화자의 어머니와 '그 여자'는 어떻게 그려지고 있으며, 그렇게 보고 있는 화자의 의식을 추리해 보자.

⇒ 어머니는 촌스럽고 여성다움을 완전히 잃은 모습으로 그려지고, 그 여자는 어머니와 대조적으로 밝고 화사한 아름다움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화자가 여전히 그 여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각인이 지워지지 않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환상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일깨워 준다. 화자에게 어머니는 혈육이며 동시에 현실이지만, 그보다 강력한 힘으로 그 여자는 화자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다.

3. 화자가 사랑하는 '당신'에게 가지 않으려 한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 화자는 '당신'을 무척 사랑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자신을 위한 것이다. 화자는 '당신'에게 빠져 있는 동안 자아에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고향으로 와 비로소 의식이 자아 바깥에까지 미치게 되는데, 그것은 '그 여자'의 환상 때문이다. 그 여자로 인해 고통받았던 어머니의 모습과 비슷한 경우의 점촌 아주머니, 그리고 에어로빅을 하는 여인에게까지 생각이 미치면서 자신도 '그 여자'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이르러 마음에 회오리가 인다. 그러나 단순히 '당신'의 아내나 딸이 받을 고통만을 위해서 배려하는 차원의 행동은 아니다. 그 여자의 눈물도 화자는 보았으며, 그 여자는 어린 화자에게 '나처럼은 되지 마.'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 여자도 사랑 때문에 아픔을 겪는 여자이고 어머니 같은 여자들도 그러한 것이다. 결국 화자나 '당신'의 아내나 아픔을 겪게 될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숙명 같은 일이지만, 화자는 그 아픔을 견뎌 보기로 한다. 그러나 화자에게 그 사랑의 아픔은 지워지지 않을 아픔으로 남게 될 것임도 짐작할 수 있다. 사랑은 운명적인 것이다.

4. 줄넘기와 에어로빅을 하며 우는 여자들을 보는 화자의 태도를 말하고, 그런 태도에 대해 비판해 보자.

⇒ 두 여자는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다. 줄넘기와 에어로빅은 살빼기의 수단이다. 물론 그 목적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는 데 있다. 미모의 상실이 애정의 상실을 불러온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비판의 소지가 있다. 문제는 그것이 남성적 가치의 기준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아내를 대하는 남편의 태도가 오직 외모에만 그친다면 그 잘못은 남편에게 있지 아내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소중한 가치의 하나라고 본다면 그런 편협한 관념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화자는 여자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긍정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 성인이 된 지금까지 그 여자를 닮고 싶어하는 데서 그 점을 읽을 수 있다.

5. 이 작품의 표현상의 특성에 대해 정리해 보자.

⇒ 편짓글 형식을 쓰고 있으면서 부분적으로 2인칭 서술을 하고 있는 점, 문장 부호를 많이 써서 내면의 흐름을 섬세하게 그릴 뿐만 아니라, 진술을 간결하게 하여 시적 효과를 자아내는 점, 그리고 관념을 노출하지 않고 감각화된 표현을 하고 있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6. 서두에서 까치 이야기를 하고 나중에 까치 이야기를 하면서 소설은 끝난다. '까치'의 상징적 의미를 말해 보자.

⇒ '까치' 이야기는 복선이다. 처음 집으로 올 때는 까치 부부가 열심히 둥지를 틀고 있었는데, 소설의 끝부분에서는 새끼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 기간은 곧 화자의 내면적 성숙의 기간과 동일하다. 까치 새끼가 아직 어려 어미에게 먹이를 받아먹지만 곧 날갯짓을 하게 될 것과 같이 화자 또한 지금은 사랑의 아픔에서 힘들게 지탱하고 있지만 극복의 날이 올 것이라는 걸 암시하고 있다.

7. 제목이 된 <풍금이 있던 자리>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추리해 보자.

⇒ '풍금'은 '그 여자'와 이미지가 상통한다. 시골에서 산 아이들에게 풍금은  새로운 세계의 한 경이로 다가왔음은 문화사적 배경에서 읽어낼 수 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때는 '풍금'이 신선하고 서정적이며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리고 풍금의 소리 또한 애잔한 아름다움의 정조를 풍긴다. '그 여자'는 열흘 남짓 화자의 집에 머물렀지만, 화자에게는 새로운 아름다움의 경이로 다가왔고, 애련한 아픔으로 여전히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풍금이 있던 자리'는 결국 그 여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이 있던 곳이라고 하겠다.

● 더 읽을거리

◆ 숨막히는 슬픔과 고통이 우러나오는 소설들 : -「풍금이 있던 자리」

신경숙의 소설은 슬펐다. 소설이란 것이 대부분 슬프고 암울한 것인 것 같긴 하다. 쉽게 희망을 노래했다가는 유치하다는 소리를 들을 터이므로. 그런데 신경숙 소설에서의 슬픔은 좀 특별한 데가 있는 것 같다. 마치 슬픔을 노래하는 시인 듯 소설에서 슬픔이 풍겨 나오는 것 같다. 소설 속 깊은 곳에서 슬픔이 우러나오는 것 같다. 소설을 읽는 동안 절로 차분해진 마음에는 슬픔이 차곡차곡 쌓여 무기력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읽는 이를 무기력하게 하고 숨막히게까지 하는 이 슬픔들은 어디서 나왔을까?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호흡, 세심한 묘사와 차분한 어조로 이루어진 신경숙의 문장은 하나 하나가 시 같고 슬픔을 얘기하고 있지 않은데도 슬프다. 문장 속에서 저절로 슬픔이 우러나오는 것 같다.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도 슬프게 작가는 쓰고 있다. 담담한 듯 이제는 가라앉은 감정인 듯 가만가만 얘기하는 차분한 어조 속에 슬픔이 있다. 중간 중간 끊어지는 호흡에 읽는 이는 자신의 슬픔을 덧붙인다. 시 같은 서정적인 묘사에서 슬픔이 우러난다. 너무나 차분해서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 묘사가 너무나 세심해서 읽는 이는 숨막힘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설 속 인물들도 슬퍼하고 있다.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같이 슬프다고 울부짖지 않는다. 고통스럽다고 소리치지 않는다. 그런 주인공들로 인해, 맘속을 거쳐 어디론가 흘러가 버릴  슬픔들이 흘러가지 못하고 읽는 이의 마음에 고이는 것은 아닐까? 주인공들은 자신 안의 슬픔들을 곱씹고 있었다. 그것이 버릇이고 습관인 양, 지나간 시절의 추억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청춘이, 외로움이, 사랑이, 운명이, 현실의 벽이 슬픔으로 고통으로 그들의 가슴에 머물러, 지독히 머물러 결국 그들을 죽음으로까지 내몬다. 소설의 처음부터 주인공들의 슬픔과 고통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치유될 수 없는 견고한 것도 부여된다. 외부의 사건들이 개입될 수 없는, 그리하여 결국 주인공들을 파국으로 치닫게 할 수밖에 없는 …… 슬픔에 치어 그들은 죽거나 아프거나 무기력해진다. 이 소설집의 모든 소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하던 작가는 너무나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주인공들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작가도 울부짖지 않는다. 고통과 슬픔을 너무나 담담하게 그저 그려내고 있다.

신경숙의 소설에서 내가 읽은 것은 정제되어서 더 견고해 보이는 슬픔과 고통들이었다. 소설이 꼭 희망을 보여줘야 하는 것은 아닐 거다. 신경숙의 소설이 다 숨막히는 슬픔을 노래하는 것도 아닐 거다. 어쩌면 그 숨막히는 슬픔들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도 잇을 거다. 하지만 어쩐지 그 슬픔과 고통 속에서 다른 것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억지 같기도 하다. 작가는 그 숨막히는 슬픔과 고통들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저 슬픔, 그것만을 얘기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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