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등(殘燈)(1946)

-허준-  

◆ 소설 읽기  

● 줄거리

해방 후 광복의 열기와 착잡함, 그리고 무질서가 뒤얽힌 시대 상황에서 친구인 '방(方)'과 장춘(長春)에서 청진까지 오던 '나'는 열차를 놓친다. '방'과 헤어진 뒤 화물차를 얻어 타고 청진 못미친 수성까지 오게 된다.

'나'는 제방을 따라 내려가다가 삼지창을 들고 뱀장어를 잡는 한 소년을 발견한다. 이 소년은 뱀장어를 잡아서 일본인에게 파는데, 사실은 숨어 있는 돈 많은 일본인을 알아내어 한국인들에게 알리는 일이 본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일본인들에 대한 복수에 열성적으로 앞장서고 있는 모습을 '나'는 망연히 바라만 본다.

'방'을 만나려고 청진역으로 왔을 때, 국밥 장사를 하는 어떤 할머니를 만난다. 할머니는 갓 서른에 남편을 여의었고, 독립 운동을 하던 아들마저 일경(日驚)에 잃은 사람이다. 그런 불행한 과거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난민들에게 너그러울뿐더러, 일본인에게까지 원한과 저주를 넘어 관대하고 동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나'는 할머니에게서 '인간 희망의 넓고 아름다운 시야'를 발견한다.

'나'와 '방'은 다시 군용 열차로 청진을 떠난다. '나'의 머릿속에는 국밥집 할머니의 잔등(殘燈), 뱀장어를 잡던 소년의 잔등(殘燈)이 흐린 불빛으로 새겨진다. '나'는 해방된 조국에서 이국 병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남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 인물의 성격

◆ 나('천(千)') : 화가. 징용에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내면적 성격의 인물. 해방이 되자 만주 장춘에서 회령, 청진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인에 대한 한국인의 두 가지 태도를 체험한다.

◆ 방(方) : '나'와 함께 귀국길에 오른 친구. 사교적이고 행동적인 인물임.

◆ 소년 : 뱀장어를 잡아 일본인들에게 팔지만 돈 많은 일본인들을 알아내어 한국인들에게 알리는 것이 본업이다.

◆ 할머니 : 국밥 장수. 일찍 남편을 잃고 외아들이 독립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서 죽음. 아들의 일본인 친구도 죽은 데에서 일본인에게 연민의 정을 가지는 인정 많은 인물임.

● 구성 단계

◆ 발단 : 친구인 '방"과 함께 장춘에서 청진으로 향함.

◆ 전개 : 열차를 놓쳐 '방'과 헤어짐.

◆ 위기 : 수성강 둑에서 뱀장어를 잡는 소년을 만남.

◆ 절정 : 청진역에서 국밥 장사를 하는 할머니를 만남.

◆ 결말 : '방'과 함께 다시 군용 열차로 청진을 떠나 서울로 향함.

● 이해와 감상

<잔등>은 1946년 『대조(大潮)』에 발표된 중편 소설로 허준의 대표작이다. 해방 후, 만주의 장춘에서 함경도 회령, 청진을 거쳐 서울로 오기까지 '나'와 친구 '방'이 겪은 체험담이다. 광복을 맞이한 한국인의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해방기의 문학은 일반적으로 역사적 해방에 대한 감격을 직설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문학 작품으로서의 정교함이나 미학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허준의 <잔등>은 해방과 귀향의 감격적인 의식에 함몰되지 않고 냉철한 시각으로 인간애의 의미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귀국의 여정을 다루면서도 당대의 시대적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파하여 인간적 삶의 따뜻한 애정을 '잔등'의 불빛이라는 상징을 통하여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장춘서 회령까지 스무하루를 두고 온 여정이었다."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주인공인 '나'의 귀로에는 광복의 감격도, 고통스러웠던 식민지 체험에 대한 푸념도, 새로운 각오나 희망도 끼어들지 않는다. '나'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뜻밖의 광복을 맞이하여 거의 무감각하게 무개화차(無蓋貨車)에 올라탔고 피난민 대열에 휩싸인다.(귀환 동포 대열을 '나'가 '피난민'이라고 지칭하고 있음은 주목되는 사항이다.)

'나'는 광복을 맞이한 우리 동포들이 패망한 일본을 어떠한 태도로 바라보고 있는지 관심을 갖게 되는데, 청진에서 만난 두 사람이 그 반응의 실상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가 된다. 하나는, 광복 이후의 시대를 걸머지고 나아갈 소년으로, 일본인들의 거동을 샅샅이 위원회에 고발하여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서 벌떡 일어설지도 모른다.'며 일본인에 대한 철저한 증오심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다른 하나는, 청진역 근처에서 국밥을 팔고 있는 노파인데, 이 노파는 일제에 의해 아들을 잃어 버렸으나, 아들과 함께 일본 통치의 비리를 폭로하다가 죽은 일본인을 생각하면서, 패망한 일본인들의 거지 행색에 오히려 동정과 연민의 눈물을 흘린다. 이 두 사람을 통하여 '나'는 광복의 격앙된 흥분 상태와 균형을 잃어 버린 증오심을 확인하기도 하고, 패자에게 보내는 동정과 그 밑바닥의 더 큰 비애를 맛보기도 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나'가 회령에서 헤어진 친구를 다시 만나 서울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청진을 떠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청진을 떠나면서 그 할머니의 영상을 황량한 폐허 위에 퍼덕이는 '한 점 먼 불 그늘', 곧 '잔등(殘燈)'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단순한 추억의 불빛이 아니라 지향적인 가치의 불꽃임을 암시한다. '나'는 흥분과 비애를 동시에 바라보는 제3자의 정신, 좀더 냉정한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는 패망한 일본을 심정적으로만 인식했던 당시의 흥분과 비애를 객관적으로 응시하고자 했던 작가의 정신이 숨어 있다. 이런 측면에서 '왜 너의 문학엔 8.15의 희열이 없느냐?'고 덤비던 사이비 진보주의, 특히 안회남 등의 문학 동맹 계열과 작가 허준은 대립되는 셈이다.

이 소설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되는 바가 있다. 그 한 가지는 광복 공간을 소설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하여 비교적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 패망한 일본을 심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당시의 흥분과 비애를 동시에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이 작품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는 작가의식의 문제인데, 그것은 냉정한 자기인식에서 출발하지 않을 경우, 대체로 사이비 애국자로 변신하였던 많은 지식인들의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 핵심사항 정리

◆ 갈래 → 현대소설, 중편소설

◆ 배경

* 시간적 → 해방기에서

* 공간적 → 만주, 청진 등지

◆ 시점 → 1인칭 관찰자 시점

◆ 의의 → 해방을 맞이하는 태도에 대한 새로운 조명

◆ 제재 → 해방 직후, 다양한 삶의 방식과 일본인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

◆ 주제 → 식민지 시대의 분노와 복수심, 해방의 감격과 무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인간 정신의 모색

● 생각해 볼 문제

1. 이 소설의 제목인 '잔등(희미한 불빛)'의 구체적인 의미를 마지막 장면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자.

→ '나'는 청진을 떠나면서 그 할머니의 영상을 황량한 폐허 위에 퍼덕이는 '한 점 먼 불 그늘', 곧 '잔등'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비참한 모습으로 쫓겨가는 일본인에 대하여 원한과 저주를 넘어 관대한 태도를 보이던 할머니의 모습이다.

● 더 읽을거리

◆ 허 준(1910 ~ ?)

평안북도 용천 출생, 일본 호세이 대학을 졸업하였다. 1935년 10월 '조선일보'에 시 「모체(母體)」를 발표하기도 했으나, 1936년 2월 '조광'에 「탁류」를 발표하면서 소설 창작에 전념하였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소설 문단에 드러나기 시작한 심리주의적 경향을 잘 대변하고 있는 허준은 「탁류」「야한기(夜寒記)」「습작실에서」등과 같은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남겼다.

'나'라는 고독한 자아의 내면 심리를 그려낸「습작실에서」는 주인공이 벽지의 어느 산골 병원에 있는 T형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고백문학이다. 특별한 사건 전개가 없는 이 작품의 주제는 결국 '나'의 고독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은 생활에 대한 거리두기를 고독과 동일선상에 놓고 즐기고 있다. 허준에게 있어 고독이란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들이 뱃속에 웅크리고 있는' 사치스런 물건인데 자기자신의 내부가 우월하다는 사고방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잔등」「한식일기」「속 습작실에서」「평때저울」「역사」등을 발표하다가 월북하였다.

허준이 즐겨 다룬 지식인의 내면 심리 추구는 해방이라는 역사적 현실 앞에서 변모하기 시작한다. 「잔등」은 그 냉정한 관찰 정신과 역사에 대한 중립성, 균형 감각이 특히 주목된다. 즉, 광복 전에 발표된「탁류」「야한기」「습작실에서」등에서 보여주었던 주인공의 허무주의적 성격, 냉정한 고백체의 성격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이데올로기적 편견과 맹목성이 없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속 습작실에서」에 이르면 독립투사의 진실한 삶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화자의 중립적 태도가 흔들리지만, 역사 현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나타난다. 소설집으로「잔등」이 있다.

 

◆ 다른 줄거리

'나'와 벗인 '방(方)'은 해방을 맞아 만주 장춘에서 출발하여 중간 기착지인 회령까지 오는데 스무 하루가 걸렸다. 무개화차에 실려, 가로 서기도 하고 모로 섰다가는 팔짱을 끼고 주저앉으며 죽을 고생을 다했다. 그나마 회령에서 화차를 갈아탈 수 있을는지도 막연한 채다.

둘은 여관을 찾아 기웃거렸으나 피난민의 홍수로 방을 얻지 못해 난감해 하던 중에 마음씨 좋은 아낙의 선심으로 방 두 칸 집에서 하룻밤을 새울 수가 있었다. 아낙네는 "오늘 우리 시동생도 지금 막 목단강서 나왔답니다." 해서 인심을 쓴 것이나, 남편된 자는 아주 못마땅해 하는 표정이었다.

'방'은 청진까지만 가면 누님댁과 친구가 있다 했다. 물론 둘이는 서울을 목적으로 삼았지만, 안봉선을 택하지 않고 이쪽 노선을 택한 것도 청진까지만 간다면 절반의 여정이 되겠거니 해서였다. 추위는 닥쳐오고, 여비도 마련한 게 넉넉지 못한 판이라 걱정과 비감이 겹으로 몰려든다.

장국밥집에서 숟가락을 놓는 참에 폭격으로 형해조차 남지 아니한 정거장에 군용 화자가 들어오는 게 눈에 띄었다. 둘은 부리나케 철길로 나왔다. 장갑차, 대포 같은 병기와 군량미를 실은 화차칸 뒤로 서너 개의 유개화차도 딸렸다. '방'이 러시아어로 된 증명서를 소련 군인에게 내보여 사람이 빽빽이 들어찬 찻간에 올랐으나 '나'는 제지를 당했다. 그 순간, 화물 열차는 출발했다. 나는 곧 비싼 돈을 주고 청진으로 가는 트럭을 잡아탈 수가 있었다. 군용 열차란 게 느림보여서 내가 탄 트럭이 앞지를 때 '방'이 보라고 모자를 흔들어댔다. 그런데 트럭은 청진 20리 밖에 사람을 내려놓았다.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청진역으로 가는 지름길을 걸었다. 얕은 강가에 이르러 '나'는 잠시 륙색의 옷들을 햇볕에 말렸다.

그때, 한 소년이 강에서 고기를 잡는 걸 보게 되어 말을 나누다가 함께 청진으로 넘어왔다. 도시가 가까워지자 소년은 일본인 집단 수용 주거지를 가리키며, 지내는 꼴들이 눈뜨고 못 볼 거란다. 자기가 뱀장어를 잡으면 사 먹곤 했던 일본인 어업조합장 내외가 도망치는 걸 김 선생한테 신고하여 잡게 했다고 자랑한다.

그 조합장은 보따리 속에 오십만 원인가 육십만 원을 감추고 있었단다. 금패물까지 몽땅 뺏기고는 매를 흠씬 맞고 고무산으로 끌려갔다는 거다. 지금 저 수용 거주지에서 굶주리다가 다 죽게 된 일본인들이 자원하여 아오지나 고무산 탄광으로 간다는 말까지 한다.

김 선생은 감옥에 있다 나온 사람으로서 지금은 위원회에서 뭔가를 맡고 있다는 사람이란다. 소년은 신고한 공으로 지금 입고 있는 이 커다란 카키빛 양복을 받게 되었다고 으쓱거린다. 아이는 그 밖에도 일본인이 겪는 수모와 참혹상을 천진스럽게 들려준다.

청진역에 닿고 보니 회령을 거쳐 온 열차가 뒤늦게 당도했으나 '방'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소련 군복들 패거리가 더러 보이는데 여군 복장을 한 동양인은 아마도 소련 내의 한인인 성싶었다. '나'는 여기까지 오면서 '다바이'라는 러시아어와 따발총의 위협을 한 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밤이 다가들자 '나'는 맨 땅바닥에 요 껍데기를 깔고 누웠다가 판잣집에 불이 켜진 걸 보고 찾아갔다. 역원이 말벗이 되어 주었으나 그도 전화가 불통이어서 무슨 열차가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는 거였다. 내가 벗과 헤어진 전말을 얘기했지만 자기도 대책이 없다 했다. 하는 수 없이 여관을 잡고 잠을 청했으나 눈이 붙여지질 않았다.

한 나그네가 주인 여자를 불러내 복도에서 말을 주고 받는데, 회령에서 아침 일곱 시에 출발하여 열세 시간 만에 이제 막 도착했다는 거였다. 내가 깜짝 놀라 일어나 나가서 물었더니 뒤에 출발한 열차가 먼젓번에 도착한 것이란다. 그렇다면 방이 이제 왔을 게 아닌가!

정거장으로 달려가 화차 칸을 샅샅이 둘러보고, 역 앞을 헤매 다녔으나 '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걸까? 며칠 더 묵으면서 만날 행운을 기다려 볼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뒤가 마려운 참에 또 무더기로 미끈거리는 공터에 나앉아 낯 뜨거운 대로 볼일을 보았다. 지금은 다 이런 식이다.

뱃속이 후줄근하여 음식 파는 판잣집 골목을 두리번댔으나 시간이 지나 다들 폐점한 모양이다. 마침 한 가게에 불이 켜 있어 들어섰더니 할머니가 국솥을 끼고 앉아 있다. 고깃국에 호주를 거푸 마셨다.

아련한 취기로 말을 붙였더니 할머니는 아린 세월을 거침없이 들려준다. 남편도 잃고 위로 여럿 아들도 이리저리 다 없어졌는데, 올해 스물여덟 살이 되는 막내가 해방 한 달을 앞두고 감옥에서 죽었단다. 나쁜 죄로 끌려간 게 아니라, 일본인 동료와 함께 일본의 잘못된 점을 일깨우려다가 그렇게 됐다 했다.

할머니는 온갖 풍상을 겪고 말년엔 가진 돈을 절에다 넣고 거기에 의탁하고 싶단다. 마침, 깡통을 들고 구걸하는 어린것들을 주렁주렁 매단 일본인 여인을 보자 지금껏의 원한은 잊고 동정을 표한다. 지금도 아오지나 고무산으로 일본인들을 실어 나르는 열차가 왕복을 한단다. '나'는 할머니의 질긴 인생살이와 지금의 체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튿날, 아침밥을 먹으러 나왔다가 '방'이 정거장 임시 사무소에 얼씬거리는 걸 발견하고 반가운 재회를 했다. 그의 누님 댁에서 이틀 밤을 지내고서 마침 열차가 들어왔대서 역으로 나왔다. 방이 소련 군인에게 빌붙어 화찻간에 오를 수가 있었다.

다른 피난민들은 유개차 천장으로 기어올라 갔으나 군인들이 따발총을 갈겨 모두 내쫓았다. 마침내 열차가 덜컹대며 출발한다. '나'는 국밥집 할머니의 모습을 잊지 못해 황량한 허공에다 대고 모자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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