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톱 이야기 (1966)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2000)

-성석제-

● 줄거리

반푼이 황만근은 전쟁 때 아버지가 죽고 유복자로 태어나 편모 밑에서 자라났다. 지능이 모자라 아이들에게까지 놀림의 대상이 되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늘 넘어지며, 혀도 짧아 발음도 정확하지 않다. 어느 날 자살하려는 처녀를 구해 아들 하나를 얻지만, 여인은 곧 떠나버린다. 이후 그는 어머니를 봉양하고 아들을 부양하면서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염습과 산역, 마을의 똥구덩이를 파는 울력, 가축 도살 등 마을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렇다고 공치사를 늘어놓을 재간도 없다.

그러던 황만근이 갑자기 마을에서 사라졌다. 신체검사 받던 날 외에는 단 하루도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는 황만근이 사라진 것이다. 평소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여겨지던 마을 사람들에게 반푼이 황만근의 부재는 곧 자신들의 불편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농가부채 탕감 촉구를 위한 전국 농민 총궐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모두들 버스나 트럭 · 승용차를 타고 대회에 나가지만, 황만근만은 이장의 지시대로 백리 길을 경운기를 끌고 갔다가 궐기대회에는 참가하지도 못하고 돌아오던 길에 그만 경운기가 차에 부딪쳐서 논바닥에 처박혀 동사(凍死)하고 만 것이다. 결국 황만근은 없어진 지 일주일만에 뼈로 돌아온다는 내용인데, 해학적이면서도 구슬프다. 민씨는 황만근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묘비명을 쓰고 다시 도시로 돌아간다.

● 인물의 성격

◆ 황만근 → 마을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지만 늘 마을 사람들의 무시와 비웃음을 받으며 살아간다. 어수룩한 인물로 그려지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인물이다.

◆ 민 씨 → 도시에서 귀농한 인물로 마을 사람들과 달리 황만근의 훌륭한 성품을 알아본다. 황만근의 사후에 황만근을 위해 묘비명을 쓰고 다시 도시로 돌아간다.

◆ 어머니 → 어린 나이에 황만근을 낳고 과부가 된다. 매우 게으르고 생활력이 없는 인물로 황만근의 봉양 덕에 살아간다.

◆ 마을 사람들 → 이기적이고 타산적이며, 자본주의 사회의 평균적인 인물들이다.

● 이해와 감상

◆ 1990년대 IMF 경제 위기를 맞고 있는 농가 현실을 배경으로 이기적인 현대인에 대한 풍자와 함께 암울한 농촌 현실을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비교적 객관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민 씨를 통해 '황만근'이라는 인물의 생애를 추적하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민 씨를 통해 바보 취급을 받는 황만근이 실제로는 매우 긍정적인 인물이며 오늘날의 삶에 결핍된 관용과 도량의 정신을 가진 인물임을 보여주고 있다. 황만근은 마을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늘 마을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인데, 작가는 민 씨의 입을 빌려 황만근이 어수룩하여 그런 대우를 받기는 하지만, 자신밖에 모르고 이기적인 마을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바보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볼 때 향토적이고 구수한 방언의 사용과 우스꽝스러운 인물의 행동을 통한 풍부한 해학성, 이기적인 현대인을 대표하는 마을 사람들을 등장시킨 풍자적 성격 등의 특성을 지닌다. 작가는 자신에게 이익이 없는 일에도 열성을 다하는 황만근과 이해타산적인 마을 사람들을 대조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주제 의식을 선명하게 부각하고 있다.

◆ '전(傳)'의 양식과 작가의 수용 의도 → 이 작품은 전의 양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작품은 황만근의 생애를 서술한 부분과 등장인물인 민 씨가 묘비명을 써서 제시한 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이는 어떤 사람의 일생 동안의 행적을 기술하고 그에 대해 논평하는 전의 양식과 매우 유사하다. / 어떤 대상을 전의 소재로 삼는 것을 입전이라고 하는데, 입전의 대상은 대체로 남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작가가 황만근을 전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황만근의 삶이 주는 교훈을 전달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 드러난 90년대 후반 농촌의 현실 → 1990년대 후반은 IMF에서 구제 금융을 받는 등 한국 사회 전체가 큰 위기를 겪었던 시기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회적으로 취약한 계층인 농민들은 더욱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에는 심각해지는 농가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농민 궐기 대회에 나가는 장면이나 황만근이 빚을 지며 농사를 지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대목 등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당시 농촌 현실의 어려움을 드러낸다.

◆ 묘비명의 형식이 지닌 효과 → 묘비명을 통해 인물의 행적을 정리하는 구조는 현대 소설에서는 낯선 형식이다. 묘비명을 제시하는 형식을 통해 다음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① 본문에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인물의 행적과 삶을 명확히 드러낼 수 있다. ② 작품 전체의 해학적 어투와 대비되는 어투를 사용함으로써 인물의 죽음을 기리는 효과가 있다. ③ 독특한 형식으로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 ④ 작가가 부각하고자 하는 인물의 긍정적 성격을 직접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작가 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 황만근의 죽음이 지닌 의미 → 황만근은 선량하고 이타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전통 사회의 인정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물이 1990년대 경제 위기와 농가 부채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죽고 말았다는 것은 현재의 농촌 사회는 희망이 없으며 기울어 가고 있다는 탄식을 함축한다. 또한 황만근은 누구보다도 남을 많이 도왔지만 혼자 죽어 갈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황만근이 죽도록 원인을 제공한 이기적인 현대인(마을 사람들)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을 내포한다.

◆ 주인공의 실종으로 작품을 시작하는 효과

① 독자에게 주는 효과 : 흥미를 유발하여 독자의 관심을 유도함.

② 구성상의 효과 : 황만근의 생애를 추적하는 구성 방식의 발단으로 기능함. 결말 부분의 황만근의 죽음과 조응되어 일종의 구성적 완결성을 갖게 함.

● 핵심사항 정리

◆ 갈래 : 현대 소설, 단편 소설, 농촌 소설

◆ 배경

* 시간적 - 1997년

* 공간적 - '신대리'라는 농촌 마을

◆ 시점 : 3인칭 관찰자 시점과 1인칭 관찰자 시점의 혼용

◆ 표현상 특징

* 해학적, 풍자적, 향토적 성격

* 고전문학의 요소가 현대적으로 잘 계승된 작품임.(전의 양식, 환상성, 해학성, 풍자성)

◆ 주제 ⇒ 황만근의 생애와 그의 행적

● 더 읽을거리

◆ 새로운 문체미학 :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정호웅-

1. 새로운 문체

새로운 문체의 등장으로 비로소 소설사는 앞으로 나아간다라는 명제가 있다. 또 소설은 문체다라는 명제도 있다. 소설에서의 새로움, 개성의 실현이 이루어지는 영역이 문체이기 때문에 나온 말일 터이다.

성석제의 문체는 빠르다. 접속사 없이 단문들을 숨가쁘게 이어 만들어내는 그 문체는 인과의 논리도 설명도 배제한다. 다만 보여줄 뿐인데, 그래서 더욱 빠르게 내달린다. 그 질주를 따라 바람이 인다.

그러면서도 성석제의 문체는 날카롭다. 표창날과도 같은 날카로움이 그 속에는 번득이고 있어 표정을 몸짓을 미묘한 심리의 기미를, 그뿐인가 그것들을 에워싸고 있는 상황의 전체를 놓치지 않는다. 찍어 올리는 듯하다. 그가 몸만 빠른, 말하자면 경박한 재치와 감각의 작가가 아닌 이유는 여기에 있다. 대상의 본질을 찍어올리는 날카로운 투시를 실현하는, 언뜻 말놀이처럼 보이는 언어 운용은 지금까지의 우리 소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단연 새로운 것이다. 성석제의 그 언어유희는 다른 말로 하자면 뒤집기이다. 사전적 의미의 뒤집기, 통상적 어법의 뒤집기, 그리하여 마침내는 사전적 의미와 통상적 어법이 구축하는 통념의 뒤집기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뒤집기의 명료함과 투명함, 뚜렷함을 요구하는 리얼리즘의 규율과는 정반대의 방식이지만, 진실의 드러냄이란 목적을 수행하는 데는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유력한 방식이다.

그 새로운 문체가 어떤 경지를 열어 나아갈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위험성이 내재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속도에 들릴 가능성. 속도에 들리면 옆도 뒤도 앞도 시야에서 사라진다. 다만 질주의 한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위험하다. 한순간으로의 집중이기에 강렬하고 아름답지만 그것은 이미 시의 차원이다. 성석제의 문체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아름다운 소설 「새가 되었네」(1996)의 저 한 호흡에 응축된 완벽한 세계를 접하며 우리가 느끼는 불안한 설렘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속도에 들리면 그 속도에 휘말려 불필요한 것들을 잘라내는 통제력이 약화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

내게도 어떤 표정이 교차하고 있었을 것인데 거울이 없어서 모르겠고 있었다 하더라도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기에 모르겠고 들여다 봤다 하더라도 모를 것 같다. 딸을 약탈하러 온 도둑의 표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칼을 던지고 투항하러 온 자의 표정도 물론 아니었을 것이다. 정략 결혼을 강요하러 온 자의 표정도 아니었고 애끓는 사랑을 호소하러 온 자의 표정도 아니었으리라. 확실한 건 거쳐야 할 과정을 거쳐내야 하겠다는 의지였다.(199~200면)

최근 들어 성석제의 소설 속에는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말의 연쇄를 좇는 경우가 많아졌다.

2. 세계와 인간 삶의 진실

성석제는 빼어난 이야기꾼이다. 그의 이야기에는 읽는 이의 호흡을 완전히 장악하는 힘이 들어 있다. 그 힘은 소재의 신기함 부드럽고 매끄럽게 흘러 갑자기 목소리가 높아지는 바람에 덜컹대거나 멈칫거리는 일은 찾아볼 수 없는 호흡 조절의 절묘함, 경쾌하고 빠른 문체, 독자의 의식을 한순간 마비시키는 유쾌한 재치의 연속 등이 만들어 낸다.

성석제 소설의 그런 힘에 장악당한 독자는 재미있는 이야기 한판 즐겼다는 기분에 흐뭇해하며 책장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 독자는 성석제의 소설 안쪽으로는 한 발짝도 들이지 못하였다.

성석제의 소설은 단순히 재미있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다. 대상의 심부를 꿰뚫어보는 심안이 그 속에 빛나고 있어, 세계와 인간 삶의 진실을 열어 보인다.

「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현실세계의 지리멸렬함을, 그 지리멸렬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의 몰합리적이고 폭력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속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유도 없이 치고박기, 한여름 땡볕 속을 쫓고 쫓기기, 태평스러운 코골기와 비명소리 그리고 활극의 재미를 즐기는 환호성이 뒤섞여 아수라 소용돌이를 이루는 쾌활냇가의 풍경은 곧 현실세계의 축도이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은 꿈적도 않는데, 그 요지부동의 완강함은 그 권력의 몰합리성과 폭력성과 자기중심성에 대응한다. 우리는 끔찍한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 끔찍한 진실을 그 끔찍함과는 정반대인, '시원하게 앞이 트이어 넓음'이란 뜻의 '쾌활'과 '밝고 쾌활함'이란 의미의 '명랑'이란 단어로써 담아내고자 했는데, 이는 곧 끔찍한 세상에 대한 거대한 야유이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묘비명의 형식을 따른 작품이다. 이문구의 인물전기형 소설과 함께 옛 형식을 변용한 시도로 우선 주목할 만하다. 조금 모자란 팔삭둥이가 있었다는 것, 가난했다는 것, 사람들의 조롱거리였다는 것, 이용당하기만 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 한 사람을 빼고는 그의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것 등이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이다.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아니하고 감탄하지 않는 삶이었지만 선생은 깊고 그윽한 경지를 이루었다. 보라. 남의 비웃음을 받으며 살면서도 비루하지 아니하고 홀로 할 바를 이루어 초지를 일관하니 이 어찌 하늘이 낸 사람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이 어찌 하늘이 내고 땅이 일으켜세운 사람이 아니랴.(40면)

황만근은 모든 면에서 평균치에 못 미치는 인간이었다. 그의 삶은 하대와 조롱과 모욕의 차가운 눈길, 날선 말들의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힘겹게 이어지는 외로운 것이었다. 생애 마지막 날 겨울비에 젖는 시골길을 혼자 갔듯이 그는 언제나 혼자 걸었다.

그러나 그 외로운 행로는 이타의, 공평무사의, 수분(수분)의, 성실과 진정의 정신을 길러내고 실현하는 길이엇으니, 그는 "하늘이 내고 땅이 일으켜세운 사람"이었다. 작가는 황만근의 삶에 깃들이 아름다운 정신을 알아본 한 사람의 말을 통해 차가운 눈길, 날선 말들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세계 밖을 걸었던 한 인물의 생애를 온전하게 되살렸다. 그의 생애는, 그 되살림은, 그를 배제한 이 세계의 질서가 어떠한 성격의 것인지를 드러내는 역광의 의미를 지닌다. 한문문화의 오랜 글형식 가운데 하나인 묘비명은 한 인물의 일생을 총정리하고 평가하는 글형식이니 황만근의 아름다운 생애를 온전하게 되살리고 그 의미를 새기는 데 더없이 적절한 형식이라 할 것이다.

성석제 문학의 한 가능성은 그의 문학이 고전의 세계로 열려 있다는 점에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지난 100년의 한국사는 그 깊고 넓은 세계를 캄캄 어둠 속에 팽개쳐놓고 서구를 향해 맹목적으로 내달려왔다. 이른바 과거 부정, 전통 단절이 그것인데, 이제 그 어둠 속을 되돌아살필 때다. 다행히도 국학계의 연구성과가 축적돼 있으니 길 찾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성석제 문학은 드넓은 고전의 세계를 주목한 선구로서 21세기 한국문학의 길 하나를 앞서 열고 있다.

3. 괴(怪)

우리는 앞에서 성석제 소설의 특징 중 하나로 소재의 신기성을 들었는데, 이 책에 실린 작품 가운데 「천애윤락」,「책」,「천하제일 남가이」,「꽃의 피, 피의 꽃」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천애윤락」의 동환은 다른 사람을 통해 허락을 얻은 뒤에야 화자인 '나'에게 연락을 취하는 묘한 습성을 지녔으니 참으로 기이한 인물이다. 「책」의 '그'는 '서음(書淫)'이라 불릴 정도로 책에 갇힌 사람이다. 그를 두고 화자는 "책은 당숙을 희미하게 만들고 당숙은 책과 사물의 경계선을 흐렸다. 그러면서도 둘은 섞여서 존재했다."(118면) 또는 "몇몇 사람에게서 서음이라고 불리기는 해도 그는 나름대로 극한까지 가본 사람"(123면)이라고 말한다. 일상의 질서에 갇혀 사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괴(怪)한 인물인 것이다. 「천하제일 남가이」의 주인공 남가이는 그의 눈빛과 냄새로써 사람들을 우울하게도 행복하게도 만들 수 있는 마력을 지녓으니 그 또한 괴한 인물이다. 「꽃의 피, 피의 꽃」의 주인공은 처음 시작하는 도박에서는 언제나 이기는, 그래서 언제나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도박장을 들어서는 특별한 존재이니 또한 괴한 사람이다.

작가는 무엇을 위해 이 같은 예외적인 괴인들을 소설 속에 끌어들였을까? 신기성의 추구? 누구나 신기한 것에는 관심을 가지는 법이니까 그럴지도 모른다. 이들 예외적인 존재들은 일반성과는 무관한 특수한 존재이기에 일반성을 담지한 개별자 곧 전형을 강조하는 리얼리즘의 규율에서는 금기시하는 인물들이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리얼리즘의 규율이 지배하는 우리 소설계를 야유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꽃의 피, 피의 꽃」의 한 구절 "그들도 나름대로의 인생을 산다" 속에 그 답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나름대로의 인생'에 대한 즉자적 의미 부여가 그것이다. 이 생각이 옳다면, 성석제는 예외적이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들 예외적인 인물들의 예외적인 개성을 통해 유(類)적 존재로 일반화되지 않는 순수한 개성과 그같은 개성의 실현인 특수한 삶을 옹호하고 지향하는 세계관을 지닌 작가라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성석제 문학은 국가 · 계급 · 계층 · 가문 등 전체성적 의미항을 중시하는 우리의 오랜 소설 전통과, 나아가서는 한국사회와 근본적으로 맞서 있다. 그 맞섬이 어떤 세계를 일굴 것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으니, 성석제 문학은 여전히 모색의 도정에 놓여 있는 젊은 문학이다.

그 괴인들은, 성석제의 말을 빌리면 천애윤락(天涯淪落)의 외로운 사람들이다. 전체를 껴안는 질서 안이 아니라, 그 밖 또는 경계선상을 떠도는 이들인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 외로움과 외로운 존재들의 근원과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관심두지 않는다. 나로서는 이 점이 아쉬운데, 외로움과 외로운 존재들의 근원과 형성과정을 함께 살펴 엮는다면 성석제 문학은 좀더 두터워지지 않을까,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4. 성석제적 여로

성석제 소설 속의 인물들은 대체로 떠도는 삶을 사는 유목인적 존재들이다. 그들의 유목적 떠돎은 그들과 맞지 않는 이 세계의 질서에 대한 분노, 대결 또는 개혁의지와는 거의 무관하다. 그들의 떠돎은 그러므로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라는 소설의 기본 형식 너머 또는 이전에 놓여 있다. 그들은 어떤 가치의 발견이나 실현을 위해 길 위에 선 것도 아니다. 그들의 여행길을 이끄는 것은 '책에 대한 믿음'(「책」) 또는 '자신의 신비한 능력에 대한 믿음'(「천하제일 남가이」) 등과 같은,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는 자신만의 믿음 또는 그것에서 생겨난 의지이다. 윤리적이거나 정치적인 이념 실현을 위해 험로를 걷는 인물들의 여로를 즐겨 다루어온 우리 소설 일반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그 여로를 우리는 성석제적 여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치의 발견이나 실현과는 무관한 성석제 소설 속 인물들의 여로는, 인간의 행로는 가치의 발견이나 실현을 위한 것이며, 소설이란 그런 인간 행로를 그리는 것이라는 오랜 통념에 대한 반역이다. 여기서 인생이란, 소설이란, 엄숙해야 하고 진지해야 한다는 통념을 뒤집어 엎는 성석제적 미학이 날렵한 몸짓으로 솟아오른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앞에서 보았듯,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주인공 황만근의 평생을 좇아 그가 실현해온 '이타의, 공평무사의, 수분(守分)의, 성실과 진정'을 바람직한 가치로 내세우는 작가의식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석제 문학은 가치의 발견 또는 실현과는 무관한 인생 행로의 객관적 추적과, 가치의 발견 또는 실현을 위한 삶의 적극적 의미 부여의 두 극단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상반되는 이 두 가지 지향으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갈등을 지금까지의 성석제 문학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를 회피할 수는 없는 법, 성석제 문학은 이 점에 대한 깊은 추구가 필요한 시점에 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석제적 여로를 걷는 그 개성적인 인물들의 언행 가운데는 설명되지 않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읽은 이의 과제일 터인데, 설명없이 툭 던져놓은 그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성석제 문학의 끝을 열어두고 있다.

동환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잡으며 들릴락말락하게 말했다.

나, 나 말야,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어.

동환은 울기 시작했다. 자유? 자유롭게? 잘해주고 싶엇던 게 아니고? 그는 의혹과 경이에 찬 눈으로 동환을 보고 있었다.

동환은 제 무릎을 끌어안고 비죽비죽 울었다. 울음소리 역시 들릴락말락했다. (75면)

결혼식 부조금을 모아 장사 밑천이나 할 생각으로 청첩장을 돌렷으나 손님이 너무 적어 오히려 낭패지경에 봉착했다. 그런데 그 딱한 사내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어 그랬는데 이렇게 되고 말핬다며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준다는 게 무슨 뜻을 지닌 것인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소설 속의 '그'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뜻을 헤아리는 일은 이제 독자에게 넘어왔다.

어린 학생을 앞에 둔 선생처럼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의욕이 넘쳐 맑은 물 속처럼 명료한, 그러나 그 명료성에 스스로를 가두는 한국소설 일반을 생각할 때, 이처럼 독자의 해독을 기다리는 것들을 담고 열려 있는 성석제 소설은 개성적이다. 바라건대 더 넓게, 더 깊게 열린 차원으로 나아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