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땅(1975)

-홍성원-  

◆ 소설 읽기  

● 줄거리

 

● 이해와 감상

1975년 <문학과 지성>에 발표된 중편소설로, 차내 행상인 두제, 재득, 형섭, 낙표를 중심인물로 삼아 사회 주변부의 하층민들의 고달픈 삶을 드러낸 작품이다. 서술자가 시선을 옮겨가면서 네 사람의 이야기를 전개해 가는데, 시외버스 차장들과 버스 회사 운영진 간의 노동쟁의 사건을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회사 운영진은 두제, 형섭, 낙표를 비롯한 정류장 주변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차장들의 항의를 저지할 것을 명하고, 이들은 정류장에서 내몰리지 않기 위해 차장들을 핍박한다. 이 작품은 민중을 이상화한 1970년대의 여타 소설과는 다르게, 가난에 찌든 하층민들이 본래의 선량함을 잃어 버리고 이기적이고 타락한 행동을 하게 되는 모습을 적시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어둡고 혼란스런 산업화 시대를 배경으로 시외버스터미널 주변에서 살아가는 소외된 삶들의 갈등과 고난을 그린 작품이다. 낙후된 시외버스터미널의 운영자들과 그들에게 고용된 사람들, 그리고 그곳에서 기생하며 살아가는 뜨내기와 부랑자들이 가파른 현실 상황 속에서 제각기 다른 삶의 방향을 보여준다. 시외버스를 타고 돌며 보따리 장사를 하던 형섭은 감방에서 나와 시외버스터미널 정비 공장 지붕에서 투신한 버스 차장 남숙의 불행한 사건을 추적한다. 그러나 형섭의 눈에 남숙의 행동이 품고 있는 진실은 좀처럼 온전히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작가는 남주인공의 입을 빌려 여러 가지 의미를 동시에 끌어안고 있는 삶의 행동을 이해하고 진실에 다가서는 일의 어려움과 착잡함을 토로하고 있다. 암울한 사회상을 담은 여타의 작품들과 달리 작가는 <흔들리는 땅>에서 진실이 특정한 관념에 의해 재단되는 것을 경계하며 개인의 삶의 진실을 집단적 삶의 진실로 단순히 치환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보여준다.

작가의 말 : '작자후기' <홍성원 문학선>, 나남, 1984

(……) 소설은 사물의 움직임을 글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사물의 움직임은 그것 자체로도 의미를 지니지만 그런 동작을 유발시킨 사물의 이면에 숨은 이웃과의 역학 관계까지도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정지 상태나 침묵까지도 그런 의미에서 명확한 움직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웃들 모두가 울부짖거나 고함칠 때 한 사람의 침묵은 돋보이는 움직임인 것이다. / 사물의 움직임을 간접화법으로 설명하는 것을 나는 꺼린다. 움직임에서 중요한 것은 움직임이 진행되는 바로 그 시간이다. 간접화법이 부당하다고 하는 것은 움직임의 시간을 놓친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보여줘야 될 움직임을 간접 화법은 설명으로 대신한다. 설명은 움직임이 지닌 고유의 민첩성과 현장성을 훼손한다. / 사람의 심리 변화도 움직임의 일종이다. 그러나 심리 상태를 묘사함으로써 인간의 예비된 행동을 미리 짐작하는 방법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동작이나 행동을 그려 보임으로써 숨겨진 인간 심리를 역으로 드러내는 방법도 있다. 이때에 조심할 것은 기록의 엄격성이다. 형용사나 부사의 남발을 상상력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을 빼앗아 버린다. 표현이 움직임을 가두지 않을 때만 그 움직임은 활력을 지닌다. / (……) 한때 나는 완전성에 대해 짙은 동경을 품었던 적이 있다. '어떠한 희생을 지불하더라도'라는 말 따위에서 우리는 완전성에 대한 광포한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완전성은 이상이다. 세상을 열심히 살아본 사람들은 완전성의 실재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자주 화내고 자주 절망하고 자주 부활하는 사람들을 측은히 생각한다. 다발성 분노와 인스턴트 절망들은, 그들의 가장 큰 경멸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들도 가끔 손 닿지 않은 목표를 향해 무리한 싸움을 걸 때가 있다. 이를 수 없는 목표를 향해 그들이 열심히 부닥쳐보는 것은, 목표에는 이를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이 값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패배까지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든다. 그들이야말로 싸울 줄 아는 사람들인 것이다. / 바다를 처음 보았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물 중에 바다는 가장 단순한 구도를 지니고 있다. 한 개의 선과 두 개의 색상이 바다가 만드는 구도의 전부다. 가장 큰 것이 가장 단순해서 바다는 우리를 감동시킨다. / 진실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 때 나는 문학을 손에서 내려놓을 것이다. 그리하여 할 일이 없을 때 나는 바다에 나가 감생이나 낚을 것이다.

● 핵심사항 정리

갈래 : 현대 중편소설

배경

* 시간적 → 1970년대 어느 해 겨울

* 공간적 → 서울의 한 시외버스 정류장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주제

* 삶의 터전을 잃지 않기 위해 하층민이 또 다른 하층민을 핍박해야 하는 상황 비판

* 가파른 현실을 살아가는 차내 행상들의 삶의 모습

출전 : <문학과 지성>(1975)

● 더 읽을거리

  '되새김질의 의의와 방법' - 이경호, <무사와 악사 外>, 동아출판사, 1995

그가 단편소설을 가장 왕성하게 발표하고, 현실 참여 문학이 가장 활발한 흐름을 보여주던 1970년대 중반에 발표한 <흔들리는 땅>이란 빼어난 중편소설은 그러한 그의 관점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소재나 상황설정에서는 1970년대의 현실 참여문학과 다른 모양을 보여주지 않는다. 낙후된 시외버스터미널을 운영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고용된 사람들, 그리고 그곳에 기생하는 삶을 살아가는 뜨내기와 부랑자들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집단화된 입장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이라는 계급적 입장으로 나뉘어 갈등과 대립을 엮어 낼 움직임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작가는 결국 그들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을 집단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지는 않는다. 그들은 가파른 현실의 상황 속에서 제각기 다른 삶의 방향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 방향은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 현실적으로는 무력하고 소극적인 삶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절실하고 지극한 삶의 방향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 방향은 정치적 실천의 효용성이 아니라 개인적인 삶의 진실을 암시해 준다. 개인적인 삶의 진실 속에는 비겁함과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용기와, 분노와 그리움과 슬픔 같은 마음가짐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개인적인 삶의 진실은 비겁함과 두려움을 물리치고 분노와 용기를 끌어안는 모습만을 결론으로 보여줄 수가 없는 것이다. 홍성원이 팽팽하게 긴장된 현실의 상황 속에서 움직임의 모든 방향과 모양을 철저하게 탐색하교 묘사하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움직임의 모든 방향과 모양은 결국 개인이 끌어안아야 하는 삶의 진실을 지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남숙이는 되지도 않을 일을 왜 다리까지 분질러가며 그렇게 독하게 해야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물론 그녀가 내건 사항들은 공적으로 생각하면 백번 당연한 요구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이 시정되지 않을 것도 백번 뻔한 일인 것이다.  <중략>  바보가 아닌 남숙이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 행동이 남들에게 만용으로 보일 것까지도 알았을 것이다. 만용으로 보일 것까지 계산에 넣었다면, 이건 또 헤아릴 수 없는 사람 마음 속의 복잡한 일면이다. 그러나 형섭에게는 그 헤아릴 수 없는 일면이 어떤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것은 어쩌면 허위의 영역과 진실의 영역의 한계점쯤에 있을지도 모른다. 저쪽의 진실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쪽은 문을 밀고 저쪽으로 넘어가야 한다."

시외버스터미널의 정비 공장 지붕 위에서 투신한 버스 여차장 남숙의 행동은 현실의 한계상황 속에서 선택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행동이 품어 안고 있는 진실은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남숙의 애인이면서 그녀에게 일어난 불행한 사건을 추적하는 형섭의 눈에 그녀가 선택한 행동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삶의 진실은 집단의 윤리적 규범이나 명분으로든, 또는 개인의 소신이나 절망의 몸짓으로든 온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그만큼 개인이 팽팽한 현실의 상황 속에서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서로 모순될 수 있는 여러가지 의미들을 동시에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남주인공의 입을 빌려서, 그렇게 여러 가지 의미를 동시에 끌어안고 있는 삶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서는 일의 어려움과 착잡함을 토로하고 있다. 한 개인의 행동이 품고 있는 삶의 진실을 포착하기가 그렇게 어렵기 때문에, 작가는 개인의 삶의 진실을 쉽사리 집단적 삶의 진실로 치환시켜 놓는 문학관에 동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한계상황에 대처하는 개인의 지극한 행동이 품고 있는 몸과 마음의 진실을 이해하기가 그토록 어렵기에, 홍성원은 한계상황에 처한 개인의 행동 그 자체를 철저하게 묘사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움직임의 철저한 묘사를 고집하는 되새김질은 단순히 한계상황 속의 움직임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나 집착이 아니라, 움직임의 배훙 도사리고 있는 진실의 소통이 그만큼 어렵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 속의 인물들이 펼쳐 보이는 행동들은 그런 점에서 삶의 진실한 소통관계에 대한 회의나 절망을 떠안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러한 회의나 절망을 떠안고 있기에 그 행동들은 더욱 절실하고 지극해 보인다. 그 행동들은 때로는 <무사와 악사>에서처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존중하거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처세의 기행과 파행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폭군>에서처럼 시대적으로 빛이 바랜 사냥의 행동방식을 고집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러한 행동들은 단지 어렵고 긴장된 상황 때문에 절실해 보이기보다, 그런 상황 속에서조차 진실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더욱 절실해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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