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바가지(1985)

-박완서-  

◆ 소설 읽기  

● 줄거리

며느리가 둘째도 딸을 낳았다는 친구와 함께 그 며느리가 입원한 대학 병원 병실을 찾은 나는 미안해 하는 그쪽 사돈과 친구 사이에서 어색한 중재자 역할을 한다. 마침 2인실을 쓰고 있던 그들은 같은 입원실에 입원한 산모가 그 대학의 공대 교수 부인인데다 첫 아들을 낳은 터라 방문객이 많아 신경이 많이 쓰였다. 예상보다 더욱 심하게, 친구는 신식 며느리를 본 시어머니 모습 그대로 여간 불만이 많은 것이 아니다. 딸만 넷을 내리 낳고 마지막에 아들을 본 나로서는 친구 며느리의 둘째딸 출산을 위로하기도 그렇다고 축하하기도 난감할 뿐이다.

나의 시어머니는 내가 딸을 넷이나 출산할 때마다 싫은 내색 하나 않으시고 사랑으로 딸아이들을 돌보셨다. 외아들을 둔 홀시어머니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보기 좋게 무너뜨린 그분은 사람들이 인간을 성(性)으로 구분해 놓은 벽을 완전히 허물고, 사람을 하나의 인격체로서 사랑한 인물이다. 그런 시어머니를 모시게 된 나로서는 행복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늙게 마련이고, 시어머니 역시 노망이 들고 말았다. 인자하기만 했던 시어머니의 노망은 나의 신경세포를 줄이게 만드는 귀찮음과 짜증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젊었을 적 그분에게 배운 성품은 어느새 잊혀지고, 그분이 억압된 성을 나와 남편의 잠자리를 훔쳐보려 뚫은 창호지의 구멍으로 분출시키는 혐오스러움은 나로 하여금 그분의 인격을 모독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시어머니의 노망에도 식구들이나 친척들에게는 착한 며느리 소리를 듣기 위해 온갖 궂은일을 감내하자니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니 신경 안정제까지 복용하며 나 자신이 먼저 죽을 것 같은 두려움까지 생겼다. 결국 '요즘 세상에 이런 효부가 어디 있느냐'고 말하던 파출부가 보는 앞에서 시어머니를 강제로 목욕시키면서 그런 분노를 표출해 버렸고, 그 일로 몸살에 신경안정제 후유증까지 겹쳐 정신과 치료를 받기에 이른다.

급기야 나는 남편, 친척들과 상의하여 시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기로 한다. 지난날의 고마움은 어느새 엄마 뱃속에서의 기억처럼 무의식의 세계로 떠난 지 오래였기에 이 결정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남편은 마땅한 요양원을 찾아 여러 차례 나서 보지만 그때마다 실망만 안고 돌아왔다. 종교를 앞세운 요양원이라는 곳이 노망든 노인들을 얼마나 학대하는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남편과 나는 불교 쪽에서 운영한다는 암자로 된 요양원을 찾아가 보기로 한다. 암자를 찾아가던 중, 나는 더위를 식히려 앉은 시골길 구멍가게 뒤뜰에서 탐스런 박을 보고 문득 '해산바가지'로 쓰기에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순간 무의식으로 떠났던 시어머니의 온화한 성품과 인간애, 가족애가 머릿속에 환기되며, 그분이 딸 넷과 아들 하나를 전혀 구분하지 않고 정성스레 '해산바가지'를 준비하며 산바라지 했던 사실을 또렷하게 기억해 내고, 그분에게 잠시나마 혐오감과 귀찮음을 느꼈던 나 자신을 탓하기 시작한다.

시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기로 했던 일은 없었던 일로 하고, 그날 이후 나는 효부인 척 위선을 떨지 않고 마음껏 못된 며느리 노릇을 하면서부터 신경안정제가 필요 없게 되었다. 그렇게 시어머니는 3년을 더 사셨고, 돌아가실 때는 평화롭고 순결한 얼굴이셨다. 그런 모습을 내가 만들어드린 양 나는 성취감에 도취했었다.

● 인물의 성격

  → 시어머니의 노망에 효부인 척했던 여인

◆ 시어머니 → 손녀 넷과 손주 하나를 똑같이 한 생명으로 간주하고 정성스레 뒷바라지 했으나 말년에 노망으로 고생한 여인

남편 → 묵묵히 아내의 뜻을 따르면서도 어머니를 이해하는 인물

친구 → 며느리가 둘째도 딸을 낳아 상심하는, 나의 고교 동창

● 구성 단계

발단 : 친구의 며느리가 두 번째도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친구와 함께 감.

전개 : 내리 네 딸을 낳아도 늘 인자한 미소로 대해 주셨던 시어머니에 대한 기억

위기 : 시어머니의 노망과 효부인 척 했던 나의 이중 성격

절정 : 시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기로 하고 찾아 나섬.

결말 : 해산바가지를 생각하고 시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는 것을 포기함.

●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아이의 성별에 따라 차별하지 않고 정성스럽게 해산 준비와 산구완을 해 주신 시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남아 선호사상과 그에 따라 성차별적인 세태를 비판하고 인간의 생명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소설이다.

또한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의 부양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나'가 해산바가지를 통해 시어머니의 생명 존중 의식을 환기하는 모습은 우리 사회의 노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소설에서는 새 생명을 맞아들이던 시어머니의 경건한 자세를 통하여, 늙고 망가진 생명을 보내드리는 자식으로서의 바람직한 도리를 깨우쳐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해산 바가지'의 순환적 구조 → 해산바가지는 시어머니에서 '나'로, 다시 '나'에서 시어머니로 순환하는 이해와 포용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남아를 선호하는 가치관이 만연한 사회에서 시어머니는 성별을 초월하여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나'의 산바라지를 한다. 시간이 흘러 '나'는 늙고 병든 시어머니에게 지치지만, 해산바가지를 떠올리며 사랑과 정성으로 산바라지를 한 시어머니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나'도 시어머니의 치매를 보듬어 안고 시어머니를 진심으로 모신다.

● 핵심사항 정리

갈래 : 현대 단편소설, 여성소설

성격 : 사실적, 회상적, 여성적

배경 : 1980년대 어느 날, 서울 그리고 서울 근교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표현상 특징 : 과거 회상에 초점을 두고 서술됨.

주제생명의 고귀함과 그 생명을 대하는 경건한 자세

출전 :  <세계의 문학>(1985. 6)

● 더 읽을거리

<해산바가지>는 1985년 6월 '세계의 문학'에 발표된, 단편으로서는 분량이 많은, 박완서의 작품으로 이후 1999년 11월 '문학 동네'에서 출간된 '박완서 단편소설전집 5'의 표제작으로 수록되었다.

박완서는 이 작품에서,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에 적절한 서사적 리듬과 입체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다채로우면서도 품격 높은 문학적 결정체를 탄생시킨다. 친구의 존재 의미를 아주 사소하게 거론하며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친구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다. 다름아닌 며느리가 둘째도 딸을 낳았다는 것이고, 출산 전에 둘째가 딸이라도 이것으로 끝이다는 며느리의 다짐에 무슨 검사라도 했을 것으로 알았지만 그것도 아닌 것이어서 친구는 보통 실망이 아니다.

사실 이러한 일은 이 소설이 발표되던 1980년대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일이다. 1980년대에 며느리를 볼 나이면 완전 구세대이다. 아들을 낳을 때까지 계속 낳으려 했으며 딸 낳은 것이 무슨 큰 죄인이나 되는 심정이었을 세대이다. 그러나 며느리 세대는 다르다. 아들딸 구별 않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것이 그 시대 며느리들의 생각이다. 그러니 둘째를 낳기 전에 산부인과에서 그 흔한 초음파 검사로 성별 확인도 안 했다. 어쩌면 하고서도 그냥 낳았을 수도 있다. 바로 자식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세대 간의 갈등이다.

이러한 세대 간의 갈등에 중간자로 끼인 것이 중간 세대가 아니라 구세대이면서도 딸 다섯에 아들 하나를 둔 '나'이다. 손자를 바라는 자신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해 주리라 친구는 생각했고, 둘이 함께 병원에 가본다. 오죽 실망을 했으면 며느리가 출산한 후 퇴원하기 전날에야 들여다볼까. 이것이 바로 구세대이다. 박완서는 이러한 사소한 일을 아주 담담하게 그러나 입체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이끌어간다.

바로 딸 다섯에 아들 하나를 낳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초점은 딸 다섯과 아들 하나에 있지 않고 시어머니의 품성에 맞춰져 있다. 외아들이지만 며느리가 딸 넷을 낳을 동안 아무런 불평 없이 아주 인자한 모습으로 며느리를 대하며 산바라지를 한 시어머니이다. 그러한 그의 인자함은 다섯 번째로 아들을 낳았다고 크게 기뻐하거나 더 정성스레 산바라지를 하는 것이 아니다. 첫째부터 다섯째까지 딸 아들 구별 않고 오로지 한 생명의 탄생에 경건한 자세로 며느리를 대한다.

그러나 시어머니도 나이를 먹어 늙어갈수록 노망이 나고, 그렇게 정신을 놓는 일이 점점 심해지면서 아예 아들 내외가 자는 문을 뚫고 엿보는 일까지 벌어진다. 존경해마지 않던 시어머니이지만 나는 괴롭다. 집 안에서는 못된 며느리이지만 가족과 친척들 그리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착한 며느리 소리를 듣기 위해 이중적인 행동을 취한다.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고 결국에는 신경안정제까지 복용하게 된다.

사실 치매 노인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박완서는 그만의 특유한 문체로 아주 사소한 것처럼 이끌어 가면서도 '나'의 행동 변화를 아주 상세하게 보여주며 그 속에 의미를 부여한다. 바로 파출부가 보는 앞에서 시어머니를 목욕시키는 장면이 그렇다. 시어머니에 대한 분노, 이중적인 행동을 하며 받았던 스트레스가 한 번에 분출한다. 효부 소리 듣던 며느리를 보는 파출부는 놀랄 수밖에 없다. 결국 그것으로 몸살이 나고 신경안정제 후유증에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되는 지경에 이른다.

당연히 가족과 친지들은 다른 방법을 모색하게 되고 그러한 결과 요양원에 보내기로 합의를 하지만 남편이 찾아나선 요양원이란 곳이 종교를 앞세워 치매 노인들을 마귀가 들린 사탄으로 취급하여 학대하는 못된 곳들이다. 아들은 고민일 수밖에 없다.

마침 절에서 운영한다는 요양원인 암자를 찾아나선 날, 더위에 땀을 흘리며 들어선 구멍가게에서 남편이 막걸리를 마시는 동안 둘러본 구멍가게 뒤뜰에서 탐스런 박을 보게 되고 문득 '해산바가지'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해산바가지' 생각이, 나의 무의식 속에 또렷하게 기억되어 있는, 손주 다섯을 산바라지하며 사용한 시어머니의 '해산바가지'에 대한 경건한 자세를 떠올리며 시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는 일을 포기한다. 이후 이중적인 행동을 버리고 효부 소리 듣기를 포기하자 나는 신경안정제가 필요없을 정도로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다.

사실 구멍가게에서 '나'가 보게 되는 박은 갑작스런 것일 수도 있다. 서사적인 흐름을 감안하면 다소 과장된 것이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임자 없는 구멍 가게, 그리고 박, 수세미, 호박, 오이 등은 암자를 찾아 나선 시골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아주 사소한 것이 나에게 커다란 깨달음을 주는 것이다. 사실 깨달음이랄 것도 없다. 박 - 해산바가지 - 시어머니가 쓰던 해산바가지로 이어지며 요양원으로 보내려고 하는 바로 그 시어머니가 한 생명의 탄생에 얼마나 경건한 자세로 임하였는지를 또렷하게 기억해 내는 것이다. 이는 이미 앞부분에서 단단하게 바탕을 깔고 있다. 그러니 그런 고귀한 생명을 치매 노인 학대하기로 알려진 요양원(찾아가는 암자가 그런 곳이 아닐지는 몰라도)에 보낸다는 것은 나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지금 치매에 걸렸다손 치더라도 그렇다.

나의 가식만 없애면 서로가 편한 것이다. 결국 지금까지 나 스스로가 가식적인 행동으로 인해 정신적 고통을 받아야 했던 것이 아닌가. 바로 그것을 깨닫는 것이다.

흔히 페니미즘(여성주의적인) 평가를 할 때에 박완서는 자주 거론된다. 그러나 박완서가 여성임에도 그의 소설은 여성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가부장적인 요소가 강하다. 병원 입원실에서 있었던, 같은 입원실 쓰는 산모를 문안 온 사람들의 대화에서 '나'도 알아볼 수 있는 여성주의자 '김 선생'의 발언은 다분히 가부장적이다. 남아선호 사상을 옹호하는 듯한 김 선생의 발언은 사실 가부장적이라기보다는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현실을 무시한 여성주의는 설 자리를 잃는다.

물론 박완서도 가부장적인 쪽으로 소설 내용을 몰아가지는 않는다. 소설 앞부분에 친구의 남아선호사상을 꺼내고는 있지만 소설의 중심은 '해산바가지'라는 생명 탄생에 임하는 시어머니의 경건한 자세에 있다.

이러한 박완서의 소설을 두고 평론가들은 '작가가 매 작품마다 선보이는 이러한 연금술적 변환의 기적은 우리 문학사에서 그 유례가 없을 만큼 풍요로운 언어의 보고를 쌓아올리는 원동력이 되어 왔다. 그녀는 능란한 이야기꾼이자 뛰어난 풍속화가로서 시대의 거울 역할을 충실히 해왔을 뿐 아니라 삶의 비의를 향해 진지하게 접근하는 구도자의 길을 꾸준히 걸어왔다.'고 옹호하고 있다. 이러한 옹호는 <해산바가지>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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