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촌수필-일락서산(1972)

-이문구-  

◆ 소설 읽기  

● 줄거리

나는 성묘를 위해 근년들어 오랜만에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모처럼만에 찾아든 고향은 옛모습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나는 비애감에 젖는다. 그 중에서도 맨 먼저 가슴을 후려친 것은 왕소나무가 사라져 버린 사실이었다. 왕소나무가 서 있던 거리엔 외양간만 한 슬레이트 지붕의 구멍가게 굴뚝만이 꼴불견으로 뻗질러 서 있던 것이다. 또한 내가 살았던 옛집의 추레한 주제꼴은 한결 더 가슴이 미어지는 비감을 더해 주면서, 내가 어느덧 실향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게 한다.

나는 먼저 할아버지 산소부터 성묘를 한다. 할아버지의 산소를 찾은 나는 순간적으로 지팡이에 굽은 허리를 의지한 할아버지가 당신의 헛묘(가분묘)를 굽어보고 서 있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내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는 이미 팔순의 고령이셨다. 인생에서 은퇴하다시피 왕조의 유민으로 은둔자적하던 노인의 모습이었다. 그는 복고주의적 향수를 버리지 못했는데, 내게 한자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그런 향수를 못 이긴 자위책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천자문을 떼자마자 내 하루의 일과를 짜 놓고 그 일과표에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도록 했다. 내가 할 일은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사랑에 나가 할아버지께 문안을 드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또 놋요강과 놋타구를 가시는 일도 해야 했다. 할아버지가 배운 것은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오랫동안 이웃해 살았던 낯익은 사람들이 여럿 남아 있음을 떠올리고 그네들을 방문할까 하지만, 그네들을 방문하기가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깨닫고 망설인다. 마을을 아주 떠나던 날까지도 일가 손윗사람 아닌 이에게는 무슨 경어나 존칭을 써 본 적이 없던 나였다. 할아버지의 지시였고, 곁에서 배운 버릇이었다. 안팎 동네 사람의 거지반이 행랑이나 아전붙이었으므로 하대해야 마땅하다는 것이 할아버지의 지론이요 고집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나는 안팎 삼 동네를 다 뒤져도 친구랄 만한 친구랄 게 있을 수 없었던 고적한 소년 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가급적이면 알 만한 사람과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마을을 돌지 않기로 작정한다.

봉건적 세계 속에 살고 있던 할아버지와 달리,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고색창연한 할아버지의 가훈을 깨뜨리고, 전혀 반대 방향의 풍물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할아버지의 전근대적인 가풍에 반발하기 위해서 싹튼 것은 물론 아니었다. 아버지의 길은 당신 스스로 선택한 것일 뿐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수삼 년 전만 해도 몇 척의 어선을 가진 선주였던 아버지는 광복을 전후해서 종래 회고조의 가풍이나 실속 없는 사상을 스스로 뒤집어 엎는 데에 서슴지 않았다. 사농공상의 서열을 망국적 퇴폐풍조로 지적했고 '무산계급의 옹호와 서민 대중의 사회적인 위치를 쟁취한다.'는 구호와 함께 그것의 실천을 앞장서서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변형되어 남로당과 합세했던 것은 그로부터 다시 많은 시일이 흐른 뒤의 일이었지만, 그 결과로 집안은 완전히 쑥밭이 되어 버렸다.

예전에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할아버지에게서와는 달리 한없는 거리감과 두려움만을 가졌었다. 툭하면 경찰서에 불려가고 연행돼 가던 신분이었음에도 언제나 의기왕성하며 투지만만한 아버지를 보며 나는 외경스러움과 동시에 무정한 거리감, 아니 차라리 공포감을 느꼈었던 것이다.

변변한 친구도 없이 유년 시절을 보내는 나에게 옹점이는 잊지 못할 친구 역할을 해 주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친정에 갔다가 허드레 심부름이나 시킬 요량으로 데려온 아이었다. 옹점이는 마음이 착하고 어른 앞에서는 소견이 넓었으며, 아이들에게는 남달리 인정이 많았다. 또한 그릇을 잘 깨는 덜렁쇠였고, 참새 못잖은 수다쟁이기도 했다.

나는 읍내로 나가는 과수원 탱자나무 울타리 곱은탱이를 돌 어름, 잠시 발걸음을 멈춰 다시 한 번 옛집을 돌아다보았다. 이어 칠성 바위 앞으로 눈을 보냈는데, 정작 기대했던 그 할아버지의 환상은 얼핏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할아버지의 넋만은 벌써 남의 땅이 되어 버린 칠성 바위 언저리에 아직도 묵고 있을 것만 같았음은 웬 까닭이었는지 몰랐다. 다시 한 번 옛집을 되돌아보았을 때, 그 너머 서산마루에는 해가 지고 있었다.

● 인물의 성격

→ 소년 시절의 '나'와 어른이 되어 고향을 찾은 '나'로 구분됨.

할아버지 → 엄격하지만 자상스런 면모도 지니고 있는 봉건적 인물

아버지 →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한 공산주의자로, 진보적 인물

옹점이 → 나의 집의 부엌 살림꾼. 수다스럽고 조심성이 없지만 인정이 많고 장난끼가 많은 인물

● 이해와 감상

<관촌수필(冠村隨筆)>은 연작소설로, 8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것으로 어린 시절의 체험을 회상하면서 근대화의 과정에서 변화하는 농촌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하였다. 1972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일락서산(日落西山)』,『화무십일(花無十日)』,『행운유수(行雲流水)』,『녹수청산(綠水靑山)』,『공산토월(空山吐月)』,『관산추정(關山芻丁)』,『여요주서(與謠註序)』,『월곡후야(月谷後夜)』등 여덟 편의 중 ·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오랜 타관 생활 끝에 고향에 들러 옛 터전을 둘러보며 떠오르는 감상을 위주로 쓰고 있다. 중심이 되는 내용은, 6.25로 인해 집안이 풍비박산되고 타관 생활을 떠도는 주인공이 그 때를 회상하면서 불행을 초래한 시대적 의미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 작품이 이문구의 대표적인 소설적 성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은 1970년대 초부터 제기되기 시작한 민족의 분단 상황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함께, 산업화 과정에서 점차 소외되기 시작한 농촌의 현실 문제를 연작이라는 새로운 소설적 기법을 통해 사회적 관심사로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목에 '수필'이라는 말이 나오듯이 이 작품은 하나의 회고담의 형식을 취하면서 지난날을 회고하는 에피소드들을 나열하는 가운데 소설적 구조를 꾀하고 있다.

작가 정신 → 주인공 '나'의 과거의 한복판에 자리한 어른은 '할아버지'이다. 할아버지는 명문 가문으로서의 명예심이 남달랐고, 품격을 지키는 삶을 살았으며, 의기와 선비로서의 긍지가 대단했던 분이다. 주인공은 그런 할아버지로부터 보수적인 정신, 선민의식을 교훈으로 받았다. 이 소설은 복고주의적인 작가 정신으로 인해 논란의 소지도 많지만, 급격한 시대적 변화로 과거 모든 것이 거의 사라졌어도 아직 우리의 내면에 있는 전통적 생활 양식의 품격 높은 일면은 하나의 가치로 자리매김한다.

이 소설의 미학의 중요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문체이다. 고풍스런 말투, 한학적 소양이 없이는 알기 어려운 어구, 명문의 후예로서만 알 수 있는 세간과 풍습에 관련된 말들이 많아 독특한 매력을 풍긴다. 제재가 그렇더라 해도 이렇게 여실하게 표현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렇게 능란하게 구사하는 것은, 작가 스스로가 그런 생활에 젖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나'가 고향 방문을 통해 받는 정서는 아픔이다. 실향민이란 말로 표현되는 정체성의 상실에서 오는 아픔이다. 그것은 물론 시대적 아픔(전쟁)의 소산이다.  전쟁은 이 긍지 높은 가족사를 단절시켰고, 그 상흔은 실향민 의식으로 남아 그를 여전히 괴롭힌다. 그가 아픔을 지속하는 한 전쟁의 참혹함은 계속된다. 작가는 이 자전적 소설에서 명문 후예로서의 긍지와 권위를 박탈당한 것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아픔에 젖어 있다. 따라서 그의 소설이 복고적 정신으로 그려진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이 소설은 논란의 소지도 많지만, 급격한 시대 변화로 과거의 모든 것이 거의 사라졌지만 우리의 내면에 아직도 드리우고 있는 전통적 생활의 품격 높은 일면은 하나의 가치로 자리하고 있다. 명문의 가풍은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우리가 회복해야 할 드높은 정신적 기풍의 높이를 지녔던 것도 사실이다.

● 핵심사항 정리

갈래 : 연작소설, 단편소설, 자전적 소설, 농촌소설, 사실주의 소설

배경 : 1940년대와 1970년대 어느 겨울, 관촌이라는 농촌 마을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표현상 특징 : 1인칭 독백체로 서술로 회고적 정조를 불러일으키며,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어와 향토색 짙은 고유어를 사용함으로써 토속적인 정서를 강하게 풍긴다. 특히 이 소설에서 미학적으로 중요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문체이다.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어와 향토색 짙은 고유어의 사용, 고풍스런 말투, 한학적 소양이 없이는 알기 어려운 어구, 명문의 후예로서만 알 수 있는 세간과 풍습에 관련된 말들이 작품 속에서 독특한 매력을 풍긴다. 작자가 이러한 문체를 능란하게 구사하는 것은, 작자 스스로가 그런 생활에 젖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출전 : 현대문학(1972)

주제 산업화로 인한 농촌의 파괴와 인간애 촉구

             한국 전쟁으로 인한 명문의 몰락과 그 후예의 명문의식

● 생각해 볼 문제

1. 할아버지의 위상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

⇒ 명문(名門)으로서의 명예심이 남달랐고, 생활의 기품과 선비정신이 드높았던 존재로 그려진다.

2. '나'가 자신을 '실향민'이라고 하는 내면풍경을 말해 보자.

⇒ 그가 타관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는 고향에 와서도 상실감에 젖어 있다. 과거의 온전했던 삶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남아있는 한 실향민이란 생각을 떨칠 수 없을 것이다.

3. '나'가 고향 방문에서 정체성을 찾았다고 한다면, 그 정체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 명문의 후예임과 명문의 가풍을 지녔던 시절을 회상하며 내적 자부심을 굳건히 가지게 된다.

 

◆ 교과서 학습 활동

1. 소설의 주인공이 고향을 찾아오면서 처음 가진 느낌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부분을 말해 보자.

 → "마음이 들뜬 것과는 별도로 정말 썰렁하고 울적한 기분이었다. 내 살과 뼈가 여문 마을이었건만, 옛 모습을 제대로 지키고 있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던 것이다. 옛 모습으로 남아난 것이 저토록 귀할 수가 있을까."

이 부분에서 주인공은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입장에서 옛 추억을 떠올리며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 보이는 고향의 현실은 어릴 적 모습과는 전혀 딴판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에 허탈한 심정에 사로잡힌다. 여기에서 그는 고향의 가치를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2. 다음 소재는 작자의 회상을 이끄는 매개가 된다. 이 소재들이 떠올려 주는 '고향'의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 할아버지 → 고색 창연한 이조인(李朝人)으로 가부장적인 질서와 그것을 지탱하던 유교 윤리의 가치, 조상의 얼이라는 자신의 삶의 뿌리, 즉 전통을 상징한다.

♠ 왕소나무 → 수호신처럼 동네를 지키며 꿋꿋이 이어져 온 우리 민족의 전통을 상징한다. 따라서 왕소나무의 고사는 전통적인 삶의 몰락이다.

 

3.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살던 농촌 마을의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 주는 대상이나 표현을 구체적으로 찾아보고, 그것이 어떤 분위기를 자아내는지 말해 보자.

* 마을 동구 앞의 조갑지 같은 초가 세 채, 술장수 퇴물인 채 씨 부부네 송방과 사철 풀무질이 바쁘던 원애꾸네 대장간, 장중철이네가 차린 옴팡집 주막과 무허가 노천 이발소, 주막과 대장간 어중간에 있던 검정 염색터

* '지팡이에 굽은 허리를 의지한 할아버지가 당신의 헛묘를 굽어보고 서 있었던 것이다. 항용 아끼시던 마가목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는 역시 탕건으로 망건을 받쳐 쓰고, 공단 마고자 아래 허리춤에서는 안경집이 대롱거렸으며, 허연 수염을 바람결에 날리면서 구부정하게 서 있음이 천연하였다.'는 환상과 할아버지의 헛묘 보살핌.

* '태고로부터 북두칠성과 똑같은 위치로 배치되어 앉았던 일곱 덩이의 바위는, 한결같이 옛날 그대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에 이어지는 칠성바위의 모습 묘사

  → 이처럼 주인공이 예전의 모습을 더듬으며 회상하는 구체적인 표현들을 통해, 이제는 실향민이 되어 버렸다는 주인공의 상실감과 옛 것을 지키지 못하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4. '옹점이'의 인물됨과 관련하여 다음 활동을 해 보자.

(1) 작자가 극화(劇化)해서 자세히 밝히고 있는 '옹점이'의 삶의 내력을 통해 알 수 있는 바는 무엇인지 말해 보자.

→ '옹점이'는 마음씨가 너그럽고 착하며 인정과 동정심이 많다. 어른들 앞에서는 소견이 넓었고, 그릇을 잘 깨는 덜렁쇠였으며 참새 못지 않은 수다쟁이이기도 하다. 옹점이의 삶의 내력을 통해 드러나는 바는 그녀가 우리 주변에서 보기 드문 인간미 넘치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2) '옹점이'에 대한 기억이 각별한 이유를 현대인의 모습과 비교하여 생각해 보자.

→ 옹점이의 인물됨은 개인주의와 물질 만능주의로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동네 안의 모든 비렁뱅이와 동냥 중, 나병 환자, 머슴들에게까지 인정을 베풀던 그의 인물됨은 배금주의와 개인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에게 찾아보기 힘든 미덕이다. 사람 사이의 정과 자연이 주는 혜택, 땅에 뿌리박은 삶이 있는 전통적인 농촌(공동체) 사회를 잃어 버린 오늘날에는 옹점이와 같은 인물 유형을 찾아볼 수 없기에 그 기억이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다.

 

5. 이 소설에서 할아버지는 어떤 인물형으로 그려져 있으며, 주인공에게는 어떤 존재로 인식되어 있는지 말해 보자.

→ 가부장적 질서와 유교 윤리의 가치를 기반으로 의지와 정신력이 강하셨던 할아버지의 인생 역정은 단단한 바위와 같았다. 할아버지는 자연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조상에 대한 긍지 속에 살다간 전형적인 이조인으로, 소년 시절 주인공의 인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 교훈은 현재의 주인공에게 있어 일상생활을 규제하는 중요한 바탕이 된다.

 

6. 이 소설에서 서술자는 어릴 적 고향 사람들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작자가 고향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식은 오늘날의 현실에 비추어 어떤 의의가 있을지 토론해 보자.

→'관촌수필'은 잃어 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기록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리움을 드러내는 작품이 아니라, 고향의 과거와 현재를 냉철하게 바라보고 무엇이 고향을 잃게 만들었는가를 드러내 주는 작품이다. 작자가 잃어 버린 관촌은 한마디로 '전통적인 농촌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어린아이에게는 자연과 더불어 하루 해를 보내는 곳이며, 사람살이의 북적거림으로 가슴 설레는 곳이다. 사람 사이의 정이 있고 자연이 주는 혜택이 있고, 땅에 뿌리박은 삶이 있다. 그러나 지금의 관촌은 그 모든 것을 잃어 버린 땅이다. 전쟁과 근대화가 그것들을 잃게 만든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이러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찬사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한 반성의 거울이 된다. 고향을 상징하는 인물인 할아버지가 보여 주는 가부장적 질서 속의 유교 윤리가 최선의 것이며, 그래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물질 만능과 배금주의에 물들고, 정신없이 '바깥'을 숭상하기에 바쁜 이른바 '세계화'의 시대가 가지고 있는 맹점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로서, 이 전통적인 모습은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고향은 그것이 자랑스러운 것이든 부끄러운 것이든, 화려한 것이든 초라한 것이든 상관없이 '뿌리'인 것이다. 뿌리 없는 나무는 없다. 그리고 뿌리가 없이는 결코 가지를 뻗을 수도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에게는 정신적 고향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자양분을 거기서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7. 이 소설은 '잃은 육친과 쫓겨난 고향에 대해 바치는 최대의 문학적 헌사(獻辭)요, 낳아 길러 준 땅에 되돌리는 가장 귀한 갚음'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 평(評)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자.

→ 이 소설은 작자가 고향에 얽힌 추억을 회상하면서, 산업화의 과정에서 겪는 소외와 갈등, 농촌의 피폐와 해체 과정을 유년 시절에 경험한 농촌 공동체의 따뜻한 인정의 세계와 수시로 교체, 상응시키면서 그것을 오늘의 관점에서 반성하고 분석해 낸다. 이는 농촌 공동체의 전통적인 삶의 양식에 대한 작자의 끈끈한 애정을 보여 준다는 의미로 파악할 수 있다.

 

8. 소설 '관촌수필'에서 작자는 인간의 가치로운 삶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 <관촌수필>에서 보여지는 인간의 가치로운 삶은 농촌 공동체의 전통적 삶의 양식인 '인정의 세계'로 규정할 수 있다. 농촌 공동체의 삶, 가부장적 질서 속의 유교 윤리로 되돌리자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습에 대해 반성해 보자는 것이다. 물질만능과 배금주의에 물들은 개인주의, 정신 없이 '바깥'을 숭상하고 따라가기에 바쁜 '세계화'의 시대가 지닌 맹점에 대해 우리 고향의 본질과 전통적인 공동체의 삶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보다 가치로운 인간의 삶을 내세우고 있다.

● 더 읽을거리

◆ <공산토월(空山吐月)>

<관촌수필> 연작 가운데 가장 감동 깊은 작품으로 평가되며, 성실하게 살다 간 어느 청년(석공 신씨)의 이야기이다. 옹점이나 대복이 등 종래의 <관촌수필>에 등장했던 토속적인 인간상보다 약간 세련된 인물로서 그의 이름은 신씨(申氏)이다. 직업은 석공(石工)인데, 그는 선산(先山)의 유택을 치장해 주는 등 나의 집안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서 나로서는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신氏는 6 25 때 부역을 한 일로 인해 5년간 형무소 살이를 했고, 출옥 후에는 마을의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억척스럽고 성실하게 살았으나 37세의 한창 나이로 요절(夭折)함으로써 나의 뇌리에 극적인 인상을 남긴다. 이러한 비극 속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있으며, 불우한 세대에 불우하게 끝나버린 삶의 통분이 있다.

* 배경 : 1960년대, 산업 근대화의 미명 아래서 점차 무너져 가는 전통적 농촌

* 등장 인물

나 - 고향을 그리워하는 인물 (서술자)

옹점이, 대복이 - 토속적인 인물

석공 신氏 - 6 25 때의 부역 사실로 5년간 복역 후, 마을 일에 앞장서 성실하고 억척스럽게 살다 요절함.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주제 : '근대화'로 인해 붕괴되어 가는 농촌 현실을 통한 따뜻한 인간애의 추구

 

◆ 연작소설 '관촌수필'의 비평

오랜만에 성묘차 고향을 찾은 화자는 마을 어귀에서 울적한 심정을 토로한다.

"내 살과 뼈가 여문 마을이었건만, 옛 모습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옛 모습으로 남아난 것이 저토록 귀할 수 있을까."

모두 8편의 연작으로 되어 있는 '관촌수필'의 첫 작품 '일락서산'이 발표된 것이 1972년이니 거기서 다시 25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 그랬던 관촌 부락의 모습이 지금은 또 얼마나 바뀌었을지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그처럼 대단한 세월도 소설 '관촌수필'이 뿜어 온 빛을 감하지는 못했다. 땅에 깊숙이 뿌리박은 삶의 말들과 오래도록 조선의 정신을 함축해 온 유가(儒家)의 언어를 통해 고색 창연한 이조인이었던 할아버지를 비롯, 옹점이, 대복이, 석공, 복산아버지 등 그 땅의 그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돌려 준 작자의 빼어난 문장은 그 실감을 전혀 잃지 않고 있다. 그 이유의 한 자락을 나는 '관촌수필'을 다시 읽으면서 만났다.

"세월은 지난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 이룬 것을 보여줄 뿐이다. 나는 날로 새로워진 것을 볼 때마다 내가 그만큼 낡아졌음을 터득하고 때로는 서글퍼하기도 했으나 무엇이 얼마만큼 변했는가는 크게 여기지 않는다. 무엇이 왜 안 변했는가를 알아 내는 것이 더 중요하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작자는 4백여 년에 걸쳐 마을의 온갖 풍상을 지켜봐 온 왕소나무의 사라짐에 탄식하고, 종가(宗家) 같은 풍채를 지녔던 옛 고향집이 추레하게 변해 버린 주제꼴에 가슴이 미어질망정, 정작 그가 기억하고 기록해야 할 바를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작자가 찾아낸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언제 어디에나 있는 '사람살이의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마을 사람들로부터는 정작 내침을 받거나 업수이 여겨졌던 대복이나 복산아버지 유서방을 화자는 그들의 타고난 천성의 자리로 가서 기억해 내는데, 그것은 모진 세월 속에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마음의 안타까움을 작자가 보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전쟁의 참화를 다른 어느 집보다도 혹독하게 겪은 화자의 자리에서 보면 사람들로부터 입은 모진 사연이 어디 한둘에 그칠까. 그럼에도 화자의 기억은 고난 속에서도 사람살이의 정과 예의를 가르쳐 준 옹점이에게로, 돌을 좋아해 석공으로 불렸던 고향 마을의 한 농부에게로 자꾸만 흘러갈 뿐이다. 작자는 그러니까 사람살이의 본디 마음들이 펼쳐 보였던 그 아픈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을 전쟁이나 덧없는 세월 따위에게 빼앗길 수 없었던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그러므로 사람살이의 그 안타까운 마음들이었다. '관촌수필'의 세계는 분명 우리가 돌아가 다시 살 수 있는 세계는 아니다. 그러나 작자가 기록해 준 인정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되풀이 살아야 할 아름다움이다. 곳곳의 낯선 말들에도 불구하고 어느 대목에서인가 나는 소설을 속으로 흥얼거리고 있었다. 잊고 있을 뿐, 내 삶 어딘가에도 순박한 일생을 살았던 석공의 마음은 흐르고 있을 것이다.

-정홍수, '친근한 언어로 엮은 시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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