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먹는 사람들(1996)

-신경숙-  

◆ 소설 읽기  

● 줄거리

일찍 고향을 떠나 도시의 삶에 적응하면서 가수가 되고자 하였지만 실패한 나는 어느 날 뇌질환으로 입원 중인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면서 윤희 언니에게 편지를 쓴다. 아버지의 뇌수 속에는 석회질이 돌아다니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의식을 잃고 잠을 주무신다. 아버지를 바라보며 '나'는 시골에 혼자 계실 어머니를 떠올린다. 아버지가 예전에 한번 쓰러졌을 때 어머니는 혼자 임종을 지켜야 하는 두려움 때문에 자식들이 있는 도시로 오고 싶어 했으나, 아버지는 계속 고향에 남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아버지의 과거를 떠올려본다. 아버지는 젊으셨으나, 자식들 때문에 누추한 삶에 주저앉은 것이다. 오토바이로 산길을 질주하시던 젊은 아버지, 조상의 묘를 손질하고 차례로 묘비를 세우시던 근년의 모습, 당신이 젊었을 때의 가죽 북을 앞에 두고 수궁가나 심청가를 한 곡 뽑으시던 모습, 오빠가 가출하고 돌아온 후 엄하게 회초리질을 하시던 장면 등을 떠올려 본다.

'나'는 아버지의 병상의 냄새에서 윤희언니를 떠올리며 '나'의 생각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윤희언니는 '나'의 꿈이 가수라는 것을 알고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애써 주었으나, '나'는 첫 앨범의 실패로 일 년 동안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 윤희언니는 신혼 육 개월만에 위암을 앓게 된 남편을 오 년간 간병하고 있었는데, 끝내 남편의 임종도 보지 못하고 사별하고 만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주변에서 죽음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여러 가지 사연들을 슬프면서도 담담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공사장 인부 일을 하다가 굴러 떨어진 목재에 뇌를 맞아 어린아이처럼 되어버린 막노동꾼 아내는 남편을 향해 '죽어라, 죽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며 울먹인다. 여덟 살 때 헤어진 유순이로부터 전화를 받는 도중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가난하고 피로한 하루 일을 마치고 촛불이 켜진 식탁에 가족이 둘러앉아 가공되지 않은 알 감자를 까서 먹는 그림이었다. 유순이를 만나 소아당뇨를 앓고 있는 세 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남편과 자그마한 한식집을 운영하는 생활 이야기도 듣는다. 그리고 폭우로 불어난 강물에 아이를 떠나보낸 중년 남자의 이야기를 전한다.

나는 위암으로 병상에 누운 남편이 오히려 자신을 지켜 주었다는 윤희 언니의 말을 되새겨보기도 하다가, 아버지가 병상에서 혼잣말로 던지는 독백을 듣게 된다. 전쟁이 터지기 전 마을을 휩쓴 전염병으로 부모를 이틀 사이로 잃고 너무도 무서운 세상에 혼자 살기가 싫어 기차 철로변에서 자살을 생각했다가도 기찻소리가 들리면 논둑 사이로 숨곤 했었다는 이야기, 우리 자식들이 나면서 비로소 세상이 약간은 만만하게 보이게 되고, 우리들을 학교에나 보내어 제 발로 설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마음에 모진 세월을 견뎌왔다는 이야기를 나는 잠자는 척하면서 듣게 된다. 즉, 아버지는 말하지 않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로 알고 사셨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산책을 하는 도중 당신의 요구에 따라 병원 공터에 있는 고구마밭까지 간다. 아버지는 당신이 직접 고구마를 캐시고 싶은지 마냥 그 주위를 빙빙 도신다. 병실에 돌아온 아버지는 어머니께 전화를 넣어 달라고 하시고는 어머니께 고구마는 다 캤느냐고 물으시고는 당신께서 캘 테니 놔두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나'는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이해하게 된다.

● 인물의 성격

◆ 아버지 → 11세에 한의사였던 부모를 이틀 사이에 전염병으로 모두 잃음(고아의식), 뇌에 석회질이 유동하는 병으로 입원함. 젊은 시절에는 미남이었고 노래(창)을 잘 했으며, 자식들을 키우느라 모든 걸 참고 사심.

◆ 나 → 28세, 음악 프로그램 리포터, 가수의 꿈을 가졌으나 첫 앨범에 실패함.

 윤희언니 → 모 방송국 PD, 35세에 음대 교수였던 남편을 위암으로 잃음. 6년 동안 남편 병치레를 했으며,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 남편이 죽고 난 뒤에 더 힘들어 함. 문이(딸, 초3)와 둘이서 삶.

◆ 유순이 → 젓갈 장수가 버리고 간 딸로 고향에 있을 때에도 고생하면서 살다가 8세 때 서울 어느 식당으로 팔려감. 팔려갈 때 내가 꼬까신을 선물했고, 그 후에 유순이는 나를 만나 구두 티켓을 선물한다. 소아당뇨에 걸린 3살 난 딸아이와 함께 안양에서 식당을 하며 살아감.

 

# 인물 분석

이 소설에는 작가가 말하는 절대적 상실을 경험하였거나 혹은 목전에 두고 있는 사람이 여럿 등장한다. 아니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이 혈육의 죽음의 의미를 알고 있다.

먼저 '나'를 살펴보자. '나'는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엄청난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나'는 7년전 '나'의 오빠가 혼수상태에 빠진 아버지 앞에서 오열하던 것의 의미를 이제 알 것 같다고 말한다. 그 역시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함을 그때 알았기 때문이다.

잠시 등장하지만 옆 병실 환자의 아내나 달님 아빠도 가족의 부재를 경험한 인물들이다. 옆 병실의 환자는 사고로 머리를 다친 후 어린 아이가 되어 버렸다. 그의 젊은 아내는 나아질 가망이 없는 남편의 속옷을 빨면서 '차라리 죽어라'라고 이를 악물고 설움을 견딘다. 그녀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마도 내심 살아만 주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오빠가 사경을 헤매는 아버지 앞에서 '살아만 주세요, 아버지.'하고 오열했듯이, 윤희언니가 남편의 죽음 앞에서 병상의 모습으로라도 그가 살아있어 주기만을 바랬듯이.

그리고 자식의 죽음을 경험한 달님 아빠. 강물에 빠져 죽은 딸 달님이를 두었던 아버지는 '못해 준 것만 생각나는 게 사랑이야.'하고 '나'에게 울부짖는다. 그리고 '나'는 못해 준 것만 생각나는 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여태껏 사랑도 한번 제대로 못해 본 셈이라고 이야기한다. 아직 그녀는 상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윤희언니 역시 절대적인 상실을 경험했고, 아직은 그 상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다. 가족의 상실이라는 굴레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절 · 대 · 적' 상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윤희언니도 조금은 덜 아파졌을지 모른다. 유순이가 그러하듯이.

유순이는 '나'의 어릴 적 동무이며 갑작스럽게 연락을 하고 '나'와 만나기에 이른다. 유순이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실, 죽음, 쇠락의 이미지 속에서 오로지 홀로 빛나는 긍정적인 인물이다. 그 쇠락의 빛 속에서 오로지 유순이만이 물이 올라 있었습니다. 유순인 내게 이 저물어가는 가을날의 쇠락 속에도 톡 쏘는 향기 같은 게 있다고 말해주려 나타난 사람 같았지요.

'나'는 유순이가 단순히 행복한 사람이라고, 톡 쏘는 향기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유순이에게는 소아당뇨에 걸린 아이가 있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깜짝 놀랐다. 유순이는 언젠가 겪게 될지도 모를 상실 앞에서 너무나 당당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세월의 힘으로 강해져 있었고, 상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유순이의 모습은 몇 년 후의 윤희언니일지도 모르고, '나'일지도 모른다. 상대적인 상실을 경험했을 때 인간은 좌절감이나 패배감을 느끼지만, 절대적인 상실 앞에서는 역설적으로 더 강한 삶의 동력을 얻게 된다. '아직 상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나, 상실로 인해 몇 년 간을 울었지만 이제는 눈물을 그쳤을 윤희 언니, 고통을 딛고 삶이 주는 상실을 극복한 유순이'라는 세 인물의 발전 양상을 볼 때 신경숙이 그리려는 것은 단지 상실, 부재가 아니라 상실의 극복을 통한 인간적인 성숙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 구성 단계

◆ 발단 : '나'는 아버지의 병실에서 윤희언니에게 편지를 씀.

◆ 전개 : '나'는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가족들과의 관계를 되돌아봄.

◆ 위기 : 아버지의 모습에서 과거의 흔적을 발견함.

◆ 절정 : 아버지에게서 병이 생기게 된 이유를 들음.

◆ 결말 :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게 됨.

● 이해와 감상

아버지를 간호하는 딸이 윤희언니에게 쓰는 편지 형식을 띤 이 작품은, 인간이 숙명적으로 지니고 살아가는 슬픔, 병과 죽음에 대한 고통, 가족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 등을 이야기한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인물들의 불행과 슬픔을 이야기하며 삶과 죽음에 대한 의미를 심화하고 있다. 그래서 소중한 사람들과의 이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삶의 진정성에 가까워지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제목인 <감자 먹는 사람들>은 고흐의 작품 제목이다. 이 그림에는 한 식탁에서 서로 비슷한 표정을 하고 서로 비슷한 방식으로 감자를 먹는 가족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비록 가난하지만 서로서로 도와 가면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을 제목으로 삼아, 작가는 고통과 행복을 함께 나누는 가족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작가는 가슴 아픈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등장시켜, 인간이라면 모두 겪을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상처와 아픔을 공유하는 인간 공동체의 유대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소설은 아버지의 병실에서 '윤희언니'라는 이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조실부모하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입을 다문 채 오로지 자식들 교육시키기에만 진력한 아버지는, 그 좋던 목청과 사내다운 매력을 잃은 채 이제는 기억력과 생명까지 위협하는 병에 묶여 있다. 그리고 작중 화자 주변 인물의 불행과 슬픔이 작가 특유의 감각으로 유려하게 묘사되고 있다. 작가는 결코 뜨겁지 않은 목청으로 소근거리듯 말하건만, 다 읽고 나면 마음은 이내 뜨거워진다. 이 작가에게 있어서 사랑은 그냥 사랑이 아니라 언제나 이별과 상실을 전제로 한 사랑이다.

신경숙 소설은 대부분 여성화자를 내세우고, 또 그 여성 화자의 대부분은 미혼에다 농촌에 뿌리를 둔 가족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감자먹는 사람들>의 화자와 그 가족에게도 이 '왜소해진'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감정은 여전하다. 그런 점에서 신경숙 소설에 나오는 아버지는 '그래도 행복한 사정'으로 보이며, 이 작가가 다른 이들과 달리 가부장제적인 가족공동체를 그리워하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하지만 아버지가 '영웅'에서 '피붙이 중의 한 사람' 혹은 '유년시절 기억의 한 부분'으로 내려앉았고, 아버지를 정점으로 한 옛날식 가족 공동체의 회복이 이제 불가능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편지글의 형식을 취한 이 작품은 두 가지 측면에서 소설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비록 '윤희언니'를 청자로 하였지만 이야기를 서술하는 당사자가 자신이 겪는 삶의 주변과 체험을 스스로 드러내고자 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글의 내용상 아버지의 병환, 어머니의 고통 등 가족 구성원의 삶과 경과라는 서사적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작자는 '윤희언니'라는 상대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자신에게 뼈아프고 고통스러운 체험적 사실과 슬픔의 감정을 담담하고도 사실적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편지의 형식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연들은 모두 가슴 아픈 사연들이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간직하고 살아가게 마련인 이 숙명적인 상처와 아픔을 고요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엮어 나가는 작가의 솜씨가 이채롭다.

이 작품은 작자 자신의 내면을 옮겨놓은 듯한 1인칭 서술자의 독백을 통해, '윤희언니'라는 대상에게 삶에서 겪은 사건과 그에 대한 정서와 인식을 털어놓는 서간체 형식의 소설이다. 편지글의 형식을 취한 이 작품은 두 가지 측면에서 소설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비록 '윤희언니'를 청자로 하였지만 이야기를 서술하는 당사자가 자신이 겪는 삶의 주변과 체험을 스스로 드러내고자 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글의 내용상 아버지의 병환, 어머니의 고통 등 가족 구성원의 삶의 경과라는 서사적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작자는 '윤희언니'라는 상대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자신에게 뼈아프고 고통스러운 체험적 사실들과 슬픔의 감정을 담담하고도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편지 형식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연들은 모두 가슴아픈 사연들이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간직하고 살아가게 마련인 이 숙명적인 상처와 아픔을 고요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엮어 나가는 작가의 솜씨가 이채롭다.

절제를 통해 드러나는 깊은 슬픔 →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하나같이 근친의 죽음과 같은 상실로 인한 극한의 비극성을 띠고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이를 서술하고 있는 화자의 목소리는 격앙된 것이 아닌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나타난다. 이러한 화자의 목소리는 화해할 수 없는 비극적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와 엄청난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절제로 이해할 수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감정 절제는 현실의 주체할 수 없는 비극성과 대비되어 더 깊은 슬픔을 느끼게 하는 효과를 지닌다.

기차의 강철 바퀴소리

삶에 있어서의 절대적인 상실들을 예감할 때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기차의 강철바퀴 소리를 듣는다. 기차는 그렇게 찢어질 듯한 음향만을 남긴 채 떠나므로 그들은 멍멍해진 귀로 한동안은 망연자실하고 만다. 그리고는 곧 갈 길을 간다. 작가가 상실을 '소리'의 이미지로 환기시킨 것은 소리가 가진 기본적인 속성, 즉 순간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소리는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는 있지만 이내 사라지고 만다. 삶에서의 상실 역시 강렬한 아픔이지만 따라 죽지 않는 바에야 산 사람은 또 계속 살아가게 되어 있는 법.

불가사리

불가사리는 한 각을 잘라내면 그 자리에서 다시 자란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불가사리의 그러한 특성을 소망한다. 저 손바닥 같은 것의 한 손가락을 잘라내도 다시 돋아나는 건 우리 인간의 특성이 아니라 불가사리의 특성이겠지만 다시 돋아나는 불가사리의 저 특성이 부러워요. 인간이 불가사리 같을 수는 없다는 것, 그러나 그것을 열망할 수는 있다는 것, 두 가지 중 어디에 초점을 두는가에 따라 이 작품의 의미는 180도 달라질 수 있다. 만일 불가사리 같을 수는 없음에 비중을 둔다면, 이 작품이 가지는 의미는 오로지 상실, 그것이 전부이겠지만 열망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상실의 완전한 극복까지는 아니더라도 회복은 가능함을 보여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후자의 경우를 택했다. 인간은 불가사리처럼 한 각을 재생할 수는 없지만, 그 한 각이 없이 절뚝이면서라도 걷는 법을 알고 있다. 생의 갑옷은 철갑옷이라는 화자의 말처럼.

노래하기

'나'는 노래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의 몸 속에 메아리로 들어가 있다가 다시 나와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노래를 부르기를 소망한다. 어쩌면 나의 노래는 나의 울음일지도 모른다. 울음과 노래는 근본적으로 비슷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지니는 감정의 순수성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말이다. 오빠는 7년 전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 밤새 눈물로 지새웠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때의 오빠처럼 근친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음에도 눈물을 흘리는 걸 보여주지 않는다. 적어도 편지 속에서는 내가 울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나오질 않는다. 대신에 '나'는 노래를 한다. 노래를 하기 전에는 편지, 즉 글을 썼고 노래를 하면서부터는 노래로 울었다.

● 핵심사항 정리

갈래 : 현대소설, 중편소설, 서간체소설, 서정소설

배경 : 1990년대 어느 해 늦가을, 병원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특징

* 시간의 역전적 구성

* 독백에 의존한 서간체의 서술 구조

* 아버지의 간병 중에 떠오른 여러 가지 일들을 제재로 함.

* 유사한 의미를 갖는 사건들을 병렬적으로 나열하여 그 의미를 심화시키고 있음.

주제

* 소중한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슬픔과 삶의 위안

* 인간이 숙명적으로 지니고 살아가는 슬픔과 고통

* 죽음의 체험을 통해 고통스러운 삶의 본질에 대한 자기인식을 표출함.

◆ 출전 : <창작과 비평>(1996)

● 생각해 볼 문제

1.  '편지 쓰기'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보자.

⇒  화자인 '나'는 지금 부친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 엄청난 상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정리하는 의미로 '윤희언니'에게 편지를 쓴다. 그러나 윤희언니는 이미 연락을 끊은 지 1년이나 된 사람이고, '나' 역시 자신이 이 편지를 부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아는 채로 편지를 써 내려간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편지는 왜 쓰여지는가?

"땅에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선다는데 언니는 그 절대의 상실 앞에서 무엇을 딛고 일어섰는지요? 이젠 언니도 그때처럼 그렇게 자주 울진 않겠지요?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윤희언니는 이미 몇 년 전에 남편을 위암으로 먼저 보내고 그 고통을 감내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나' 역시 지금 절대적 상실의 고비에 놓여 있으며 '나'는 아직 그 고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런 '내'가 윤희언니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아마도 미래의 자신에 대한 안부가 아닐까 싶다. 절대적 상실에서 조금은 멀어져 있는 '나' 말이다. 지금의 나로서는 조금도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상실감, 그것들이 언젠가는 조금이나마 극복이 될 것인지에 대한 의문, 소망, 그런 것들을 윤희언니라는, 이미 절대적 상실을 경험한 자에 대한 편지에 실어 담는 것이다.

 

2. '감자 먹는 사람들'의 작자가 편지 쓰는 대상을 분명히 제시하고도 편지를 부치게 될 것 같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

⇒  본래 편지글은 그 글을 읽을 특정한 대상을 염두에 두고 쓰게 된다. 하지만 이 글은 서술자가 표면상 언니를 대상으로 제시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자기 주변의 참담한 삶의 모습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는 소설이다. 즉 이 소설은 그러한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적 사색과 아픈 내면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과정을 편지 쓰기라는 장치를 빌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3. '감자 먹는 사람들'이 일상적인 편지글과 구별되는 서술상의 특징은 무엇인지 말해 보자.

⇒  일상적인 편지글이라면 아무리 쓰는 사람의 개인적인 감정 표출에 중심을 둔다고 해도 편지를 전하는 대상을 의식하여 그와의 의사 소통, 즉 자신의 생각과 감정의 충실한 전달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편지 쓰는 사람으로서의 서술자가 가족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모습을 소설 속의 인물이 행동하는 것처럼 그려 내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 더 읽을거리

■ 예술적 허구와 삶의 통찰력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는 순간, 나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배인 고통, 존재 자체의 비극적인 면모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정확히 그들은 감자를 먹는 것이 아니라 감자를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었다. 생존을 위해, 무연한 눈길로, 손짓으로 신경숙의 <감자 먹는 사람들> 역시 정확히 이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편의 아름다운 소설을 새롭게 일구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고흐의 그림에서 존재의 비극적인 절망감을 읽었듯이 그녀 역시 이 제목 아래 가장 비극적인 존재의 양상인 죽음을 다각적으로 조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경숙의 죽음은 그저 비극적인 소멸이나 인생의 애틋한 비애와 다소 거리를 두고 있었다.

(   중 략   )

물론 한 개인을 둘러싼 다양한 삶의 관계가, 고작해야 편지를 쓰기 시작하고 끝을 맺는 며칠 사이에 하나의 주제 아래 견고하게 묶여 있는 것은 현실과 다르다. 허구인 것이다. 하지만 예술적 허구이다. 이 예술적인 허구는 삶의 일상성에서 어쩔 수 없이 묻어나게 마련인 온갖 잡스러운 티끌을 걷어 내고 죽음이라는 예술적 대상 자체에 깊이 집중적으로 착근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들 죽음을 자신의 곁에 거느린 많은 사람들의 삶을 마치 주제를 변주하듯 거듭 반복해 보임으로써, 기미만 감지했던 불투명한 느낌을 점차 명료한 인식으로 부각시켜 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적 허구는 더욱 선명하고 강렬하게 주제에 접근하는 미적 장치이지, 단순히 참과 거짓의 어느 한 편으로 분류될 수 있는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결코 아니다.

뿐만 아니라 신경숙은 죽음 그 자체의 미학을 병적으로 탐닉하지 않는다. 문제는 죽음을 둘러싼, 죽어가는 이들과 살아남은 이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이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양한 빛깔의 양상들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에게 운명적으로 다가온 죽음을 모면하고자 앙탈을 부리지 않는다. 인물들은 고통스러우나 기꺼이 그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삶의 허무를 어루만지고 있다. 삶의 일상성 안에서 죽음의 끝자락들을 거느리고, 조금씩 기억을 허물어 가면서, 삶의 진정성으로 한결 가깝게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근친의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인간과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의 의미를, 결코 잊혀지지 않는 타자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삶은 그저 비극이라기보다 더욱 엄숙한 것이며 정결한 그 무엇인 것이다.

* 출처 : 김상욱, '총체성으로서의 문학'에서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

 

■ 신경숙(1963~  )

신경숙은 1963년에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나왔다. 1985년 <문예중앙>에서 '겨울 우화'로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창작활동을 시작해, 소설집 <겨울우화>(1991), <풍금이 있던 자리>(1993), <오래전 집을 떠날 때>(1996), 장편소설 <깊은 슬픔>(1994), <외딴 방>(1995),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1995) 등을 펴냈다.

작가는 <풍금이 있던 자리>로 본격적인 평단의 주목을 받으면서 소위 '90년대 작가'라는 평을 들었다. 그는 민족이나 계급 등에 대한 거대 서사들의 무의미해진 시기에, 소멸해 가는 작은 것들에 대한 연민으로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의 이미지를 잡아냈다. 신경숙 이전의 소설들이 주로 객관의 대상화를 지향하였던 반면, 신경숙은 극적인 이야기 전개나 사건 구조 대신 삶 혹은 사람 관계의 한 고비에서 작중 인물이 겪는 미묘한 심리상태가 드러날 따름이다. 따라서 그의 소설 밑바닥에는 정이나 슬픔, 상실, 고독 등이 침전해 있다. 그는 80년대에는 말해질 수 없었던 비사회적이고 반역사적인 소재를 채택하여 내면 성찰을 위해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구성방식, 쉽게 말하기 어려운 것들을 말하기 위한 실험들을 펼쳐 보였다.

또, 그는 음각의 언어로 특유의 문체를 개척해 왔다. 이성적인 논리로 구성된 언어가 가하는 억압을 해체하는 여성적 글쓰기라는 그녀에 대한 평은 적절한 것이다. 신경숙은 언제나 감정의 소용돌이 앞에서 머뭇거리면서 작은 것들에 대해 치밀하게 묘사한다. 그녀는 언어가 가질 수 있는 마력을 200% 이해하고 일구어내는 보기 드문 작가이다.

신경숙 소설의 전체 화두는 '기습'이다. 삶에는 언제나 기습이 존재한다는 그녀의 인생관 내지는 문학관을 바탕으로 그녀는 그 기습 앞에서 겪는 인간적인 고통과 상실감들을 묘사한다. 그런 그의 운명론적인 사고관은 필연적인 인과관계와 극복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을 듣기도 하지만 거대 담론이 붕괴되고 전체의 의미가 상실된 시대에 햄릿이나 돈키호테를 기대하는 것은 좀 무리가 아닐까.

단편 <감자 먹는 사람들>은 96년 창비 여름호에 실렸던 작품으로 <오래전 집을 떠날 때>에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은 상실, 죽음, 과거지향이라는 작가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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