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1996)

-이청준-  

◆ 소설 읽기  

● 줄거리

 

● 인물의 성격

◆ 이준섭 : 장례식을 엄숙하고 경건하게 이끌어 가려는 인물로 소설가이다. 그는 장례식의 규정된 절차가 어떤 것이고, 그런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어머니에 대해서는 철저하게도 자신의 정성을 다 쏟아 부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결국 염습과 동화책으로 그 마음을 표현하게 된다.

◆ 어머니 : 어머니는 어린 시절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고이 자란 인물이지만, 지나가던 스님의 예언으로 인해 박복한 인생을 살아왔던 인물로 묘사된다. 어머님 자신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식들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시질 원하기에, 손사래질을 통해 때로는 모질게, 옷보퉁이를 통해 때로는 모정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자신의 자존심은 비녀를 통해 표현되고 있으며, 결국 그 비녀로 표현되는 자존심이 무너지면서 치매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시게 된다.

◆ 이용순, 외동댁, 장혜림 :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갈등의 주체들이다. 이용순의 경우는 어릴 적 가출을 해 소식도 모른 채 살아오다가 갑자기 할머니 장례식에 등장하여 이준섭의 엄숙한 장례식을 방해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준섭은 어머니가 가지고 있으셨던 옷보퉁이를 통해 용순을 자신의 생각 속으로 이끌게 되고, 용순도 장혜림이 건네준 동화를 읽고 다시금 준섭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외동댁은 준섭이 모셔야 할 어머니를 대신 모신 인물이다. 노인이 치매로 접어들면서 노인의 머리를 잘라 버린다든지, 비녀를 빼앗아 버린다든지 하는 행동을 통해 갈등의 요인이 되었었다. 장혜림은 문학 관련 잡지 기자로 이준섭의 소설을 다 읽어본 사람이다. 그만큼 이준섭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데, 이준섭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취재하러 나선 인물로 등장한다. 이준섭을 따라다니면서 궁금한 것을 이것저것 물어보는 통에 준섭은 귀찮은 점을 느끼기도 하지만, 장혜림은 준섭과 용순의 갈등을 풀어주는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 이해와 감상

◆ 제목 '축제'에 대해

이청준은 소설에서 자신의 감정을 이입한 이준섭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원래 '축제'라는 제목은 임권택 감독이 이청준 씨에게 요구했던 사항이다. 이 소설에서 '축제'가 가지는 의미는 두 가지로 다가온다.

첫째, 이준섭과 어머니의 축제로서의 장례식이다. 결국 이준섭은 엄숙하고 경건하게 장례식을 치룸으로써 어머니를 회상하며 어머니와의 부채를 청산해 나가는 몸짓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이준섭의 입장에서는 돌아가신 노인을 위한 뜻깊은 장례식이 당신을 편히 씻겨 보내드릴 수 있는 효의 발로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준섭이 회상을 통해서 많은 부분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일반적으로 보여지는 '축제'이다. 축제를 일종의 '어울림'으로 본다면 이 어울림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모임, 갈등 해소, 즐거움' 등이 한데 모여 화음을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청준을 제외하고 장례식에 모인 인물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바로 이러한 '어울림'의 과정이다.

소설에 나타난 축제의 의미는 첫 번째 이미지가 부각되어 있다. 결국 이 소설에서의 '장례식'은 주인공 이준섭에게 있어서, 어머니와 진정으로 대면하게 해 주는 하나의 수단이자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이청준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소설 창작과 영화 촬영을 동시에 진행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제목인 '축제'는 임권택 감독이 작가에게 요구한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축제로서 표현되는 초상의 과정은 이청준에게 있어서는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와 그의 아들 준섭과의 새로운 대화의 장이었다. 그래서 중심 인물을 논하자면 어머니와 이준섭이겠는데, 이용순과 외동댁 등 여타 다른 인물들은 그러한 어머니와 이준섭의 '대화'에 이용된 소설적 '소재'로서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이용순이다. 이용순은 이준섭의 형의 태외자식으로 집안의 문제로 통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장례를 계기로 잊혀진 문제에서 현재의 문제로 등장하게 되고, 그것이 이준섭의 어머니와의 대화에 있어 플러스 요인(두 개의 옷보퉁이)이 되기도 하고 마이너스 요인(삼촌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발로된 적대감)으로도 작용하면서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청준의 소설 <축제>는 제목과 어울리지 않게 죽음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어머니의 죽음과 그 초상을 통해 드러나는 '이준섭'의 생각을 읽어내고, 자칫 죽음이라는 일상적일 수 있는 일을 이준섭에게는 '경건하고 특별한 일'로 표현해 내고 있다. 이 소설에 특징이 있다면, 영화(임권택 감독)와 함께 집필되었다는 점이다.

● 핵심사항 정리

갈래 : 현대, 장편, 자전적, 가족 소설

시점 :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표현상 특징

******

주제 : 노모의 장례식을 계기로 표출된 가족 구성원 간의 갈등, 그리고 화해

● 생각해 볼 문제

◆ 이 작품의 중심 사건

(1) 장례식

소설의 시작과 끝인 ‘초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에서는 중심사건이 되지 못한다. 주인공 이준섭은 어머니의 초상을 치루는 상주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절차를 통해서 다시금 어머니를 회상하고 당신에게 가지고 있던 일종의 ‘부채’를 떨쳐버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 자신만이라도 엄숙하고 경건4)하게 어머니에 대한 회상을 장례식 속에서 끊임없이 하면서 어머니와 자신 사이에 있던 ‘짐’들을 하나씩 해소해 나가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하지만 장례식 절차를 밟아나가면서, 용순의 등장, 가족 간의 갈등,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문상객들 사이로 혼잡해진 식장 등, 준섭의 마음가짐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등장하고 그런 상황이 가중될수록 준섭은 더욱더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결국, 장례식 절차를 마무리해 갈수록 준섭의 어머니에 대한 회상도 막바지에 이르게 되고 장례식의 끝과 준섭의 회상은 동시에 마무리짓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은 엉뚱하게도 가족사진을 촬영하면서 마무리하게 된다. 이청준씨는 이것이 임권택 감독의 요청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제껏 보여준 이준섭의 태도와는 사뭇 상반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2) 손사래질

소설에 나타난 손사래질은 어머니가 준섭에 대해서 가지는 단오함의 표현이다. 가세가 기울게 되면서 준섭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 더군다나 상급학교를 광주로 진학하게 된 준섭은 이때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살게 된다. 하지만, 고향집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준섭은 어머니를 찾아뵙게 되었고, 이 때 손사래질을 통해 어머니는 아들에게 단호함을 보여주게 된다. 당신은 아들에게 짐이 될 수 없다는 표현으로서의 손사래질은 그 이후로 계속 준섭의 머리에 남아 어머니에 대한 일종의 부채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런 손사래질의 경험이 바로 어머니를 모실 수 없는 것으로 발전되었던 것이었다.

그날도 노인은 전에 늘 그래왔듯, 준섭이 차로 오를 때나 차 속으로 들어가 밖을 내다봤을 때나 뒤에서 연신 그 손 사래질을 쳐대며 그를 재촉하였고, 그러다 그 경황없고 망연스런 손사래질과 함께 순식간에 어둠속으로 파묻혀 사라져가 버린 것이었다.

작가가 표현하듯이 그러한 손사래질은 역설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소설에서도 준섭은 초상에서의 어머니와의 대화(회상)를 통해서 다시금 손사래질의 의미를 되새겨 가며, 부채를 덜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바로 그 오연스런 노인의 손사래질, 그러니까 준섭은 당시 상상도 못한 일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노인은 그 비정한 손사래질 속에 이미 그 당신만의 은밀스런 부끄러움의 씨앗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3) 옷보퉁이

옷보퉁이는 어머니가 준섭에 대해서 가지는 그리움의 표현이다. 소설에서 준섭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쫓기듯이 입영을 하게 되었다. 훈련소에서 바깥옷들을 소포로 고향으로 돌려보내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준섭의 그 옷을 당신이 돌아가실 적 까지 고이 간직하고 계셨다.

“그런디 하루는 그 옷보퉁이가 주인 잃은 물건마냥 참나무골에서 이손저손 몇 달을 헤매다가 어찌어찌 그 구평마을 나한테까지 찾아 당도하질 않았겄냐…그때까장도 나는 저 아가 군대살이를 들어간 중은 감감 모르고 있다가 엉덩이에 이곳저곳 맨흙자국진 저 후진 입성가지들을 지 본 듯 앉았다 보니, 늙은 것이 아무리 마음을 모질게 먹을래도 자꾸 눈물이 앞을 가려 오는구나. 그런다고 그 처지에 이웃 눈도 부끄럽고 청천한 대명천지 하늘도 부끄럽고, 누구보다 딸자식 사위자식부터 부끄러워 어디 한번 마음 놓고 울어 볼 수나 있었겄냐…그래 언제 한번 이거나마 부둥켜안고 속시원하게 울어볼 때라도 올까 싶어 나 혼자 간직해 온 것이 오늘에까지 이르렀구나…”

아들을 손사래질로 보내고서는 다시금 아들을 잊지 못해 그 옷보퉁이를 돌아가실 때까지 간직해 오셨던 모습에서 준섭은 어머니의 한과 역경을 이해하고 또 이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회상들을 통해서 준섭은 어머니와 다시금 대화를 하게 되고 질퍽하게 흘러가는 초상집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경건하게 자신의 절차를 진행해 나가게 된다.

● 더 읽을거리

◆ 읽을 거리    -퍼온 글-

이른 더위가 며칠 계속 되더니 기어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들큰한 흙의 단내가 올라오는 것을 보아 제법 많은 비가 내릴 것 같다.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빗소리에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잘 듣지 않던 엘피판 음반들 사이에서 <회심곡>을 찾아냈다.

'요보―오 시오, 시주님네 이내 말쌈 들어―보오소. 죽음에도 노소 있소? 늙으시―인―네나 젊으시―인―네나, 늙으며―어는 먼저 가고 젊은 처―엉춘은 나중 갈 제 공명천지도 발 아래 흘러―어 가는 물이라더라.'

오랜만에 듣는 창이었다. 김영임 씨의 창은 긴 가락을 넣고 빼는 들숨날숨이 까슬하면서도 휘감기는 맛이 있다. 창의 가락을 따라서 귀를 기울이다 보면 옛날 선조들은 참 소설적으로 살았구나, 하는 감탄을 하게 된다. 끝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스토리와 구성진 가락과의 어울림이 폐부 깊숙이 관통하며 전율을 일게 한다. 아마도 그것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덩더꿍 가락에 맞춰 절로 어깨춤이 나오는 것과도 같은 민족적 정서일 것이다.

이 회심곡은 죽은 자를 위한 회한과 위로의 '한풀이굿'으로 몇 년 전 정다운 글벗이 내게 준 것이다. 사는 일이 왠지 힘겹고 알 수 없는 힘에 떠밀리듯 내 마음자리가 두서없이 흔들릴 때였다. 그는 삶이 버거울 때는 오히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고 충고했다. 그러면 가슴에 바람 한자락 스며들 틈이 생길 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호의를 받지 못하고, 회심곡 한 소절을 듣는 둥 마는 둥 판을 내려놓고 말았다. 창(소리)의 무엇이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갑자기 나는 발기발기 찢기워지는 듯한 참담함에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이제 그 회심곡을 다 들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는 삶에 대한 집착이 수그러들어, 삶을 바라보듯이 죽음을 짐짓 태연히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일까? 바로 그 회심곡이 <축제>를 읽게 했다. 장례식을 소재로 한 소설이 없어서 언젠가 내가 쓰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중에, 작가의 서문에 '지난 일 년 반 동안은 글을 썼다기보다 '노인'의 굿을 치렀다고 해야 옳을 듯 싶다.'는 글을 보고 나는 곧 책을 사가지고 왔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몇 년 전 지하철의 손잡이를 잡고 선 그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모 출판사에서 신인상을 받은 선배의 시상식장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때도 여전히 흰 백발을 한 그의 깨끗한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의 첫 창작집 <별을 보여드립니다> 이후 여러 소설을 읽었으며, 침착하고도 섬세한 당신의 소설을 좋아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언젠가 작품 뒷글에서 그가 타인의 시선을 싫어한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나서, 깊은 사념에 빠진 듯한 그의 흰 백발만을 바라보았었다. 아마도 그날의 아쉬웠던 마음이, 이 작품을 택해서 쓰게 된 이유가 된 듯싶다. 임권택 감독이 만든 영화도 본 후에 이 글을 쓰고 싶었는데 짬이 나지 않았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원고를 넘기고 나서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제>의 줄거리는 40대 작가가 노모의 3일장을 치르는 이야기인데, 장례식을 통해서 앞세대의 삶이 어떤 의미로 뒷세대로 이어지는가를 그린 것이다. 그러나 작가도 언급했듯이 이 작품의 제목은 좀 엉뚱해 보였다. 임권택 감독과의 뒷글에서 작가는 영화의 주제가 '이 시대의 효(孝)'가 되어야 하며, 말년에 치매 증세로 고생을 하다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의 장례를 소재로 쓰는 만큼 자전적인 요소가 강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장례를 어떻게 축제의 의미와 연결지어야 할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상갓집 뒷방을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의 흥건한 잔치 분위기 같은 것은 떠오르지만, 영화를 위해서 소설의 제목마저 한 수 물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아심마저 갖게 했다.

며칠 전 모 신문 기사에서 작가는 '장례식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마지막으로 만나 한스런 세월의 응어리를 씻어낼 뿐 아니라 남은 사람들끼리도 서로 화해의 손길을 나누는 화합의 향현이란 의미를 던져준다.'고 했다. 그래서 작품의 제목을 <축제>로 정했다는 설명이었다. 그러고보니 언젠가 '씻김굿'을 소재로 한 연극에서도, 망자를 씻기는 절차가 거의 끝날 무렵이 되자 시끌벅적한 굿판이 벌어지면서, 상을 당한 가족과 친척들까지 불러들여 흥건한 춤과 노래로 끝매김을 하는 장면을 보았었다. 그러니 장례식이란 죽은 자를 위한 축제이되 산 자들의 상실의 아픔과 슬픔을 한자리에서 껴안는 일이고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산 자들의 축제라고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축제>에서 작가가 잡은 화두는 아마도 어머니의 '손사랫짓'과 '비녀'가 아닌가 싶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처럼, 어머니에게는 자식을 향한 모성이 존재하는데, 손사랫짓이야말로 바로 그것이다. 그 손사랫짓은 고향집과 식구들을 떠나 광주의 친척집으로 더부살이를 떠나는 아들을 배웅하는 어머니의 말없는 눈물이었으며, 운명에게 지지 않으려는 어머니로서의 강한 모습이다. 작가는 '그 손사래질은 스라린 자기 부인의 몸짓, 그것이 어쩌면 당신의 남은 생애를 짊어져 갈 아픈 운명의 모습이 아니었을까.'라고 말한다.

여자로서의 어머니를 작가는 '비녀'를 통해서 보여준다. 그것은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낭잣비녀였다.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그 비녀 하나만은 유복한 친정집 가세를 상징하듯 새짓이 제법 고급스런 빛 고운 비녀였다.'는 작품에서의 말처럼 노인에게 비녀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비녀가 없어진 후로 어머니는 '오랜 부끄러움과 마음의 빗장을 풀고 그 깜깜한 망각과 침묵의 깊은 치매기로 빠져 들어'간다. 죽음 앞에 이르러서도 마지막으로 비녀를 찾는 어머니의 그것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비녀는 쪽머리의 치장물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에게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두고 그것을 참아 넘기려는 강파른 자기 빗장, 혹은 자기 금도의 둘레, 나아가 자신의 삶을 큰 흔들림 없이 지탱해 온 숨은 자존심의 상징'이었다.

작품의 곳곳에는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레란다.>는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동화가 삽입되어 있는데, 작가가 모친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이 녹아 있다. 동화는 노인성 치매를 소재로 한 삶과 죽음의 의미, 그리고 그에 대한 가족들의 바람직스런 이해 방식과 태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할머니가 자꾸 키가 작아지는 것은 할머니가 그 나이를 은지에게 나눠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지는 할머니에게서 그 나이와 함께 지혜와 사랑을 나눠 받고 어른으로 자라가는 대신, 할머니는 그 줄어든 나이만큼 키와 몸집이 자꾸 작아져서, 끝내 더 나눠주실 나이나 작아질 몸집이 다하시게 되면, 마지막으로 그 눈에 보이는 육신의 옷을 벗고 보이지 않는 영혼만 저 세상으로 떠나가시게 된단다. 자꾸 더 작아져가는 키와 기억들은 모두 우리 뒷사람들의 삶과 지혜로 전해져 있다.'는 자신의 딸에게 향한 말에서 나타나 있는 것처럼 <축제>에는 다른 소설적인 장치나 기법보다도 작가의 삶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시선이 수채화처럼 투명하다.

그 아름다움은 '씻김' 장면에서도 보여진다. '할머니께서는 평생 동안 우리를 씻기고 입히고 돌봐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할머님께서 떠나가시려는 지금 단 한번 씻겨 드리고 입혀 드리고 있는 중이다. 평생 입은 은혜를 오늘 마지막에 단 한번 갚아드리는 기회인 셈이다.' 라는 작가의 숙연한 태도가 작품의 주제에 힘을 보태고 있다.

또한 작가는 용순과 장혜림 기자를 통해서 소설의 욕망에 대해서 말한다. 용순은 준섭에게 "그 돈이 어째서 삼촌 혼자서 번 돈이예요? 할머니 팔아먹고 집안 식구들 팔아먹고 ……" 하며 대든다. 사실 소설가가 자신을 뜯어먹지 않고 소설을 쓸 수는 없다. 전혀 자신과 상관없는 작품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뜻에선 소설이란 사실과 현실의 제약을 넘어서고 싶고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 바로 그 허구에의 욕망의 한 산물이다.'고 말하는 작가의 말은 그런 맥락과 통한다. 장례식장까지 취재차 나타난 장혜림 기자는 주인공 준섭의 펜이자 그의 소설의 다른 면을 캐내려는 탐색자이다. 그녀는 장례식장에 모인 가족들과 친척들을 들쑤시며 다닌다. 가족들이 가장 갈등하고 있었던 용순에 대해서도 장혜림 기자의 악착스런 취재는 따라붙는다. 장혜림을 통해서 작가는 글을 쓰는 자신의 뒷모습을 짚어보려고 했던 것 같다.

작가는 모친을 잃은 슬픔을 '고아가 된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한다. 함께 지낸 시간을 돌이켜 볼 사람을 잃는 것은 '세월에 대한 증인을 잃은 것'이며, 그 증인이 없는 그 세월만큼 남은 자 역시 '자기 삶의 역사를 잃은 것'이다. 장례식이 무르익을수록 준섭은 망연스런 심정이 되지만 그것을 아랑곳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안팎의 분위기는 계속 질펀한 취흥 속에 어지럽기만 하였고, 사람들은 흐느적거린다.'는 매김소리도 차츰 시간이 흐름에 따라 흔들려서, 앞소리나 상여꾼들의 뒷소리까지 모두 궤도를 벗어난다. 그러다 '소리판은 드디어 난장판이 되어 간다.' 어찌 보면 흥겨워 보이기까지 하는 산 자들의 축제 한마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세상을 떠난 사자의 모습은 뒤에 남은 자손들과 그 자손들의 삶의 모습으로 남게 된다.'는 화해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화합의 축제이며 죽은 자를 위한 마지막 잔치는, 그의 후손들의 모습을 담은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소설의 욕망에 대해 탐색하던 장혜림에 의해서 그 기념사진이 찍힌다는 데에도 의미가 깊다. 결국 작가는 소설을 쓰고 있는 자신과도 화해한 것이다. (1997년 문학과 창작에서)

 green37_up.gif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