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땅 (1984)

- 임철우 -     

◆ 소설 읽기  

● 줄거리

나와 오 일병이 길을 걷고 있다. 까마귀 떼가 푸드득 날자 오 일병은 돌멩이를 던지며 불쾌해 한다. 그러면서 꿈속에 상여를 본 것 때문에 오늘 이 일이 있었다고 불평한다. 나는 흉물스런 새 떼의 모습에 까닭 없이 마음이 우울해진다. 어머니는 철새가 날아오면 하늘을 한참 바라보았다. 새도 때가 되면 제 고향에 찾아올 줄 아는 법이라고 말하며 멀리 사라지는 새들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었다.

인가에 도착해 어떤 노부부에게, 참호를 파다 유골을 한 구 발견하였다고 말한다. 진지를 구축하던 중 오 일병과 내가 맡은 위치에서 참호를 파던 중 시체가 나온 것이다. 시체의 몸통은 피피선으로 묶인 채였다. 노파는 노인에게 지난 밤 꿈이 맞지 않느냐고 말한다. 노인은 술을 준비시키고 두루마기를 차려 입은 후 우리를 따른다.

철새가 날아오는 가을이면 어머니는 하늘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중학생이 되고서 아버지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를 추궁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해 변명을 했지만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고, 죄인은 아버지의 환영은 이제 어디에나 숨어 있어, 핏자국처럼 지워지지 않는 저주와 공포로 나를 끝끝내 휘감아 버렸다.

현장에 도착한 영감에게 소대장은 전투가 치열했겠다고 말한다. 지형적인 특색으로 이 곳을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게 되었고, 이름과 고향을 모르는 시체들이 즐비해 묻어 주었다고 말한다. 영감은 뼛조각을 하나씩 주워 잘 닦아서는 신문지 위에 가지런히 놓고 있다. 빨갱이 시체인지 아닌지를 따지고 있는 소대원들에게 영감은 소리친다. 이제 그게 대관절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죽어서까지 이쪽 저쪽을 따져야 하느냐는 것이다. 노인은 몸통을 감싸고 결박을 풀어 멀리 내던진다.

어머니가 모래밭을 걸어오고 있는 뒤편에 한 사내가 따르고 있었다. 아버지였다. 가까이 왔을 때 아버지의 환영은 사라지고 어머니의 발자국만 모래밭에 찍히고 있었다. 꿈이었었다.

우리는 정돈된 유해를 다시 묻었다. 음복을 했다. 어머니의 기다림이 떠오르고, 아버지가 가슴과 팔목에 철사줄을 동여 매인 채 겁먹은 얼굴로 서 있는 모습이 환영으로 떠오른다. 총성이 들려왔다. 순간 눈앞이 부옇게 흐려 온다. 아버지는 어느 버려진 밭고랑에서 잠들어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에 잠긴다.

산을 내려오며 나는 노인과 대화를 나눈다. 노인의 형도 그렇게 죽어 갔다고 한다. 좀전의 시체가 혹시 형님의 것이 아니냐고 물어본다. 노인은 이제 그를 알아볼 수 없고, 그저 불쌍한 영혼 하나를 편안히 잠들게 한 것에 만족해 한다. 첫눈이 내리고 있다.

첫 휴가를 갔을 때, 어머니는 무심코 오늘이 하필 아버지의 생일이라고 했었다. 어머니는 얼결에 말해 놓고는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마구 화를 냈었다. 죽은 사람 기다릴 필요도 없고, 차라리 죽어 버린 게 우리에게 낫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말에 섭섭해 했다. 어머니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자상한 눈빛으로만 남았던 것이다. 어머니의 눈물은 끈덕진 기다림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기다림이 까마득히 멀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인은 멀리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까마귀가 운다. 나는 얼어붙은 땅 밑에서 웅크리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눈이 내리고 있다. 새 떼, 들판, 산들을 하얗게 지우고 있다. 그것은 어머니의 소반 위에 올려진 사기대접의 눈부시도록 하얀 빛깔이었다.

● 인물의 성격

◆ 나 → 주인공. 홀어머니와 살고 있는 군인.  공산주의자로 월북한 아버지로 인해 죄의식을 지님. 야영지에서 이름 모를 시신의 발굴을 통해 지난날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에게 가해졌던 폭력의 흔적을 확인하고 갈등함. 성장과정에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내면에 깊숙히 자리잡음.

◆ 노인 → 유골을 수습함으로써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해 주며, 노인의 형도 또한 전쟁의 희생자였으며,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비판함.

◆ 어머니 → 이념과 관계없이 월북한 아버지를 언제까지나 순수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음.

◆ 아버지 → 전쟁 중 빨치산이 되어 월북함. '나'의 증오와 분노의 대상임.

● 구성 단계

◆ 발단 → 철사줄에 묶인 무연고 유골이 드러나자 '나'는 좌익 활동을 했던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리다.

◆ 전개 → 까마귀 떼를 바라보며, 어머니가 새떼를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던 과거를 되새긴다.

◆ 위기 → 전쟁 때 죽은 형님을 찾지 못한 노인의 한을 통해 '나'는 어머니의 한을 생각한다.

◆ 절정 → 노인이 유골을 수습하는 장면을 통해 '나'는 비로소 어머니의 한을 이해한다.

◆ 결말 → 함박눈이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이제껏 증오했던 아버지를 용서한다.

● 이해와 감상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은 그의 첫 소설집의 제명(題名)이 된 작품으로서, 임철우 소설 세계를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작품이다. 흔히 그는 우리 시대의 현실이 안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를 리얼리스틱 수법으로 파헤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이 <아버지의 땅>에 드러난 작가의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소설적 관심은 체제와 이데올로기적 폭력,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 동요되는 개인의 모습들에 있다. 그래서 그는 분단 체제의 현실과 광주 항쟁 등 일련의 시국 사건들에 직접 · 간접적으로 관계된 인물들을 다루고 있으며, 이러한 현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인물들이 현실의 다양한 폭력 앞에서 어떻게 파멸되어 가는지를 꾸준히 이야기하고 있다. /  또, 그의 소설에서 다루어지는 폭력들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 개인과 사회, 실존적 고뇌와 공동체적 실천 사이의 문제에 대해 언제나 통찰하고 탐구하는 대상이 된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우리 시대의 폭력적 현실과 과거의 폭력, 개인의 파멸과 사회의 부도덕함 사이의 관계를 진지하게 다룸으로써 분단 체제와 광주 항쟁 같은 비극적 현실의 원죄(原罪)를 극복하고자 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전쟁으로 인해 벌어진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나'의 가슴 아픈 가족사와 연결 짓고 있다. 작품에서 사건 전개의 계기가 되는 것은 무연고 유골의 발견이다. 이 유골은 이데올로기 대립의 희생자로 볼 수 있다. 더구나 철사에 몸이 감겨 있었다는 것은 그러한 이념 대립의 고통이 현재까지 지속됨을 의미한다.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이념 대립으로 인해 돌아가신 아버지와 남겨진 어머니,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가슴 아픈 가정사를 떠올리게 된다. '나'는 가정의 비극을 남겨준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성장했는데, 노인이 유골을 정성껏 위로하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고, 아버지와의 화해를 시도한다. 유골이 오랜 세월 동안 철사줄에 묶여 있었다는 것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억압적인 상황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나'의 삶을 제약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과 중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제목인 '아버지의 땅'은 아버지의 시대로부터 물려받아 민족사의 상처로 남아 있는 비극적인 분단의 상황을 상징한다. 나아가 분단이 지속되는 상황에 살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기도 하다.

● 핵심사항 정리

갈래 : 단편소설, 전후소설, 분단소설 - 사실적, 현실비판적, 회고적

표현상 특징

* 화자와 아버지의 거리 좁히기의 과정 = 이념 대립을 해소하는 과정

* 현재와 과거('나'의 회상)를 교차시키면서 사건을 전개해 나감.

* 상징적 소재들을 적절히 활용함(까마귀, 철사줄, 함박눈, 하얀 물그릇 등).

* '나'의 내면 심리의 변화가 잘 드러나 있음.(1인칭 주인공 시점)

◆ 상징적 소재

* 철사줄 → 전쟁과 이념 대립의 '폭력성'과 '냉혹함'과 '구속'을 상징

* 까마귀 → 불길함, 세상의 화해를 방해하는 세력의 상징

* 함박눈 → 불길함을 지우고,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로 어우러지게 함(합일, 정화의 이미지).

* 하얀 물사발 → 아버지를 향한 어머니의 순수한 사랑과 그리움의 상징

주제

* 분단 현실로 인한 상처와 그 극복의 모색

* 이념 대립을 극복하는 사랑과 용서의 방법론

● 더 읽을거리

◆ 역사의 단절과 지속 

한국 전쟁을 제재로 한 작품은, 전쟁을 직접 치렀던 세대에 의해서 작품화되거나, 어릴 때 그것을 목격한 세대들이 어른이 된 후 어린 목격자의 눈으로 재해석하는 작품이 한국 전쟁 소설의 주종을 이루었다. 한국 전쟁 이후의 미체험 세대에 의해 작품이 씌어졌다는 것은 전쟁을 해석하는 눈이 조금 달라질 가능성을 애초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땅>은 전후 세대가 유산처럼 안게 된 부담과 불행에서 그날에의 이해로 거리를 축소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은 참호를 파다 밭고랑에서 발견된 유해 한 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유해는 오랜 세월 땅 밑에 묻혀 있다가 눈앞에 모습을 보이는 순간 과거의 일은 현재성을 지니고 목전에 다가온다. 그렇기 때문에 시체의 발견 자체가 문제성을 안고 이 시점에 부각되는 것이다. 이 시체를 둘러싼 인물들, 소대원과 마을 노인의 위상은 상당한 차이를 가진다. 소대원들과 이 시체와의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다. 그러나 노인의 경우는 그 거리가 가깝다. 노인은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경험하였고, 또 그의 형이 그 피해의 당자사란 점에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안고 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이 시체와 노인의 관계가 밀접한 것은 아니다. 그의 형의 시체라고 단정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노인도 그렇게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노인이 시체를 바라보는 시각은 대단히 따뜻하다.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애도의 표현이면서, 노인의 가슴에 내재된 한의 표현이기도 하다. 노인은 전후 세대인 소대원과 달리 과거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존재이다. 노인에게 역사는 지속되고 있지만, 소대원은 한국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단절돼 있다. 이 연결과 단절의 차이가 결국 시체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다.

작가는 바로 이 점을 주제의식으로 삼는다. 한국 전쟁은 과연 사라진 역사적 사실일까. 현재에도 끈질기게 남아 우리를 제약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인 것이다. 노인이 한으로 끈덕지게 얽매여 있듯이 그 날의 비극은 민족사의 앙금으로 남아 여전히 현실을 아프게 한다는 메시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과거와의 철저한 만나므 그것은 바로 '나'에 의해 구체화된다. 시체와 무관했던 '나'가 혈육과 같은 끈끈함으로 맺어지는 것을 통해 그 점은 구체화된다.

술이 가득 차 오른 반합 뚜껑을 나는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저것 봐래이. 날짐승도 때가 되면 돌아올 줄 아는 법이다. 어머니가 말했다. 저만치 웬 사내가 서 있었다. 가슴과 팔목에 철사줄을 동여맨 채 사내는 이쪽을 응시하며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퀭하니 열려 있는 그 사내의 눈은 잔뜩 겁에 질려 있는 채로였다. 애앵. 총성이 울렸고 그는 허물어지듯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불현 듯 시야가 부옇게 흐려 왔다. 아아,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쓰러져 누워 계실 것인가. 해마다 머리맡에 무성한 쑥부쟁이와 엉겅퀴꽃을 지천으로 피워내며 이제 아버지는 어느 버려진 밭고랑, 어느 응달진 산기슭에 무덤도 묘비도 없이 홀로 잠들어 있을 것인가. 반합 뚜껑에 술이 쭐쭐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화자는 드디어 이 무연고 시신 앞에서 아버지를 발견하고, 잊고 싶었던 과거와 처절하게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저주와 공포로 얼룩졌던 아버지의 기억이 다시금 다사로운 눈물과 애정으로 화하는 승화된 만남이 되는 것이다. 한국 전쟁은 이렇게 잊혀지지 않고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어 전후 세대에 이어지고 있음을 이 작품은 보여 준다. 지금도 어머니처럼 철새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는 세대가 여전히 살아 있고, 자신처럼 비록 무관한 것으로, 때로는 무거운 짐으로 남아, 버려야 할 악귀와 같이 냉담하게 인식하던 것에 대해 다시 새로운 시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전후 세대는 그 아픔의 역사를 고스란히 유산으로 받았기 때문에 결코 거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것의 부정성에 매몰되지 않고 따뜻한 애정으로 수용하게 된다면 잃었던 아버지도 마음에 살게 되며, 용서와 화해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다. 노인이 던진 말, "이렇게 죽어 누운 다음에까지 이쪽이니 저쪽이니 하고 그런 걸 굳이 따져서 무얼 하자는 말이오."에 그 해답이 담겨 있다.

 

◆ 표현과 구성의 힘 

이 작품은 이런 주제를 형상화하기 위해 구조와 표현의 면에서 세심한 배려를 한 흔적이 뚜렷하다. 시체를 두고 벌어지는 현재 상황과 어머니의 이야기가 중첩되게 하여 현재와 과거를 이어가고 있으며,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해의 메시지를 이런 이중 구조를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더없이 아름답게 하고, 감동을 주는 요소는 그 상징적 표현에 있을 것이다. 서사 구조도 탄탄하지만 그 구조를 떠받드는 표현의 상징성은 주제를 더욱 선명히 하면서 문학적 감명을 암시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어느 틈에 날아왔는지 길 옆 밭고랑마다 수많은 까마귀들이 구물거리고 있었다. 온 세상 가득히 내려 쌓이는 풍성한 눈발 속에 저희들끼리만 모여서 새까맣게 구물거리며 놈들은 그 음산함과 불길함을 역병처럼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틈만 나면 이데올로기를 들추며 사랑과 화해를 방해하는 세력들을 까마귀로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현실을 바라보는 눈이 어떠한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살도 녹이고 뼈까지도 녹슬게 만든 그 오랜 시간과 땅 밑의 어둠을 끝끝내 견뎌 내고 그렇게 시퍼렇게 되살아나는 그것의 놀라운 끈질김과 냉혹성이 언뜻 소름 끼치도록 무서움증을 느끼게 했다.

시체를 감싸고 있는 철사줄은 여전히 우리를 구속하고 있는 이념의 잔인성을 상징한다. 노인이 그 철사를 풀어 푸른 하늘에 버리는 행위에서 이제는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얻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철사줄을 통해 보여 준다. 어머니가 늘상 해 오던, 새 바라보기도 그러하다. 어머니는 철이 되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새 떼를 보며 아버지를 끊임없이 기다린다. 그것은 지울 수 없는 한이다.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 기다림에 매달리지 않고서는 한 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것이다. 어머니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이념과 무관한, 그저 자상한 모습의 남편일 뿐이다. 어머니는 기다림이라는 행위를 통해 아버지의 원래 모습을 가슴에 영원히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굵고 탐스러운 눈송이들은 세상을 가득 채워 버리려는 듯이 밭고랑을 지우고, 밭둑을 지우고, 그 위에 선 내 발목을 지우고, 구물거리는 검은 새 떼를 지우고, 이윽고는 들판과 또 마주 바라뵈는 거대한 산의 몸뚱이마저도 하얗게 지워 가고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새벽마다 샘물을 길어 와 소반 위에 떠서 올려 놓곤 하던, 바로 그 사기대접의 눈부시도록 하얀 빛깔이었다.

눈은 까마귀와 대조되어 있다. 까마귀가 불길함을 상징한다면, 눈은 그것을 지우는 것으로 표상된다. 시체가 묻혔던 밭고랑도 지우고, 이념도 갈등으로 충돌했던 그 참혹의 현장이었던 산도 지우고, 그 동안 내가 지녔던 편견과 몰이해를 지우고, 아직도 큰 힘으로 음모를 획책하는 세력들을 지워, 모든 하얀 색깔 하나로 어우러진 세상을 염원하는 주제가 이 눈 오는 광경의 묘사를 통해 상징화되고 있는 것이다. 순백의 눈으로 원래의 순수를 되찾아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증오의 마음을 사랑으로 바꾸어 나갈 때 전쟁의 아픔은 더 큰 가슴에 의해 아늑히 품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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