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정기(1955)                           -계용묵-

  이해와 감상

이 글은 밤나무에 인격을 불어넣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있다. 여기에서 고향 집 정원에 있는 늙은 밤나무는 글쓴이의 삶과 글쓰기에 방향을 제시해 주는 소중한 존재다. 그래서 글쓴이는 고향을 떠나 있으면서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마다 밤나무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마음에 위안을 주는 밤나무와 같은 존재가 없는 서울의 삭막한 현실과 대비하여 밤나무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이 글은 사색과 관조를 통해 삭막한 현실에 대한 비판 정신을 드러내고 있고, 좋은 수필이 갖추어야 할 품격과 미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등 마치 소설이나 희곡을 보는 듯한 기법적 세련미도 보여 주고 있다.

  요점 정리

갈래 및 성격 : 경수필,  -사색적 · 관조적 · 비판적-

특성

* 추억을 회상하며 자신의 삶을 성찰함.

* 관조적인 태도로 사물의 의미를 꿰뚫음.

주제 : 밤나무의 부재에 따른 그리움과 성찰함.

출전 : <상아탑>(1955)

  생각해 보기

◆ 계용묵의 작품 세계

계용묵은 생전에 발표한 작품 수가 적어 '과작의 작가'라고도 불리는데, 짧은 콩트풍의 단편만을 썼다. 짧은 작품일수록 기교를 중시하여 예술적인 표현을 풍부하게 드러냈다. 그는 인간이 가진 선량함과 순수함을 옹호하여 인간 본성에 따르는 삶의 의미를 탐구하였다. 또한 해방 공간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담담하게 그려 냈고, 당대 현실을 묘사할 때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사소한 문제에 집중한 점이 두드러진다. 다만 현실의 부조리와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아 역사의식이 부재하다거나, 서민에 대한 관조적 시선을 지녔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언어적 측면에서는 장인 정신을 가지고 언어를 세밀하게 다듬어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였으며, 고향인 평안도 지역 사투리를 작품 속에서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였다.

◆ 좋은 수필의 요건

좋은 수필은 우리의 삶과 주변을 되돌아보게 하고 깨달음을 준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 성찰하기 위해서는 그것과 밀착해서는 안 되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대상에 밀착하게 되면 사사로운 감정에 물들기 쉽고 그 진면목을 제대로 꿰뚫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수필에서 관조적 태도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글에서 글쓴이는 밤나무가 없는 도시에서 살면서 그것의 의미와 소중함을 깨닫고 있다. 즉 대상의 부재나 상실을 통한 거리감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 읽기

그것은 몇 백 년이나 되었는지 팔순의 노인네들까지 자기의 어렸을 시절에도 역시 그저 지금이나 다름없는 모양으로 그렇더라고 하는, 언제 어느 때에 심어졌는지 그 유래조차 알 수 없는 그러한 연령을 가진 밤나무다.

어떠한 나무든지 아름드리 굵게 되면 그 보이는 품이 사람으로 비해 보면 많은 수양에 단련이 된 그러한 학자같이 침착하고 장중한 맛이 있어 보이거니와, 이 밤나무야말로 사상이 일관된 철학자같이 숭엄하게, 무겁게, 그리고 거룩하게 보였다.(글쓴이가 밤나무에게서 삶의 무게를 견디고 깨달음을 얻은 자의 풍모를 느끼고 예찬적인 태도를 보이는 부분이다.)

주위에 둘러선 백양이라든가 솔 같은 것은 바람이 부는 듯만 해도 바람 좇아 몸을 부지할 줄 모르건만 유독 이 밤나무만은 고삭고(곪아서 썩거나 삭아 빠지다) 무지러진(물건의 끝이 몹시 닳거나 잘리어 없어지다) 가지일래 의연히 서서 그 자세를 변치 않는다.(자신의 자리를 의연하게 지키는 밤나무의 기상을 나타냄.)

*밤나무의 긍정적인 속성

이것은 마치 그 속속들이 구새 먹어(살아 있는 나무의 속이 오래되어 저절로 썩어 구멍이 뚫리다) 썩어진 등덜미가 이러한 도를 닦기까지 얼마나한 세고의 풍상에 부대끼며 속을 썩인 그 자취인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 같아,(밤나무가 마치 온갖 고난을 겪고 삶의 깨달음을 얻게 된 사람 같다고 서술함. 고진감래) 그 밤나무를 대할 때마다 나는 무엇엔지의 사색에 저도 모르게 머리가 숙군했다.('밤나무'를 통해 삶을 성찰함) 어쩐지 나는 그것이 좋았다. 그것이 좋아서 조석으로 이 밤나무 그늘 아래를 거니는 것이 남 모르는 내 한동안의 즐거움이었다. -<중략>-

내 창작도 태반은 여기서 되었다. 이 철학자를 두고 짜인 것은 아직 한 편도 없으나, 이 철학자와 벗하여 상(想)이 닦여진 것만은 사실이다.(글쓴이가 아직 밤나무를 직접적으로 다룬 글을 쓴 적은 없으나, 밤나무가 자신의 창작에 영향을 주었음을 밝히고 있는 부분이다.) 상이 막히어 붓대가 내키지 않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책상을 떠나 이 철학자의 그늘 밑으로 나왔다. 그리하여 그 밑에서 고요히 눈을 감고 뒷짐지고 거닐면서 매듭진 상을 골라서 풀곤 했다. 생각이 옹색해도 이 그늘을 찾았고 독서와 붓놀음(글쓰기)에 지친 피로가 몸에 미칠 때에도 이 그늘을 찾았다. 실로 이 늙은 철학자 밤나무는 내 생명의 씨앗을 밝혀 주는 씨앗터였다.(은유법을 통해 의미를 강조함.)

*밤나무와 글쓴이와의 오래된 관계

이러한 씨앗터를 내 이제 떠나 살게 되니 해마다 버들잎에 기름이 지면 이 늙은 철학자의 그늘 밑이 더할 수 없이 그리워진다. 인제 밤나무에도 잎이 아마 푸르렀겠지. 비바람에 고삭은 가지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 안부가 지극히 알고 싶어지고, 그 밑에서 고요히 눈을 감고 사색에 잠겨 보고 싶어진다.

다방에도 제법 그 우리 고향 집 정원의 주인공 늙은 철학자와 같이 구새가 먹은 모양으로 흉내를 내어 꾸며서 분에다 심어 놓은 마치 애들의 장난감 같은 나무(분재를 말함.)가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것의 그늘 밑에서 한동안의 마음을 가라앉히기는커녕, 그리하여 사색에의 힘을 얻기커녕 인위적으로 자연을 모독하여 순진한 사람의 눈을 속이려는 그것에 도리어 불쾌를 느끼게 되는 것밖에 없다.(자연을 흉내 낸 분재에게는 마음의 윈안을 받을 수 없음) 그리고 현대의 권태가 담배 연기와 같이 떠도는 그 분위기 속에 숨 막히는 답답함이 도리어 정신을 흐려 놓아 줄 뿐이다.(분재 화분의 인위적인 모습 때문에 어지럼증이 나고, 인위적인 것만이 존재하는 현대의 쉼터인 다방에 답답함과 권태를 느끼는 부분이다.)

*다방의 분재를 보며 떠올리는 삭막한 현대인의 모습

하지만 잠시나마 다리를 쉬자면 역시 그러한 다방밖에 어디 밑 붙일 휴식처가 없으니 인위적인 철봉으로 생나무를 지지여 놓고 자연을 비웃으려는 그 분에 심은 나무와 억지로라도 벗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하면, 그리하여 그 나무를 무시로 대하고 바라보며 인생을 생각해야 되는 것인가 하면, 내 자신의 마음까지도 그 나무와 같이 철봉에지지워드는 것 같아 그러지 않아도 속인으로서의 고민이 큰데 자꾸만 인위적인 속인의 속인으로 현대화되어 가는 것 같은 자신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 늙은 철학자 밤나무의 자연 속에 생각을 깃들여 자연 그대로 살고 싶은 욕망이 전보다도 더 한층 간절하다.(현대인의 인위적인 면을 비판하고 있다. 또한 글쓴이 역시 인위적인 자연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자신도 이 인위적인 환경을 닮아갈 수 있다는 염려를 드러내고 있다.)

*밤나무와 함께 살고 싶은 욕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