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절터를 찾아                   -유병근-

 

 ■ 이해와 감상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산속 절터에 서 있는 두 개의 석탑을 찾아본 후, 석탑이 견뎌 왔을 오랜 세월의 의미와, 자연과 시간의 변화, 그 속에서 인생이 갖는 의미 등을 사유하고 있다.

 ■ 요점 정리

◆ 갈래 및 성격 : 경수필(서정적, 관조적)

◆ 주제 : 옛 절터에서 깨달은 세상과 인생의 의미

 ■ 작품 읽기

가시덩굴이 길을 가로막는 골짝에 작은 삼층석탑이 숨은 듯 서 있다. 탑 속에는 부장품처럼 햇빛과 달빛이 고여 있을 성싶다. 바람과 구름, 풀벌레며 산새의 울음도 탑을 둥지 삼아 깃들어 있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그동안 숱한 비바람과 진눈깨비, 때로는 무더위에 시달린 탑이다. 그런 탓인지 손으로 살짝 밀기만 해도 부스러질 듯 조마조마한 낌새다. 어느 날은 뼈와 살이 깎이고 뭉그러지는 아픔도 겪었을 것이다. 그런데 용케도 버티고 있다. 그게 무슨 힘일까. 나는 슬그머니 탑 곁에 다가선다.

절은 남향으로 서 있었던 듯하다. 당우(큰 집과 작은 집)의 양 추녀 끝을 받치느라고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활주처럼 탑을 세웠을 것만 같다. 해가 뜨고 지는 궤도에 따라 세월의 흐름을 두 탑에서 읽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고 있으니 탑이 뭐라고 하는 것 같다. 날이 새었다고 동탑은 서탑에게 말하고, 날이 저문다고 서탑은 동탑에게 말하는 기척을 어렴풋이 읽는다.

나는 탑 주위를 서성거린다. 날이 새고 저무는 이야기를 한 맥락으로 가지런히 세운 뜻은 무엇일까. 그러자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말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삶이란 죽음으로 가는 길이며 죽음 또한 삶으로 가는 상징을 두 탑의 배열에서 읽는다. 생사윤회라는 말을 버릇처럼 구시렁거린다.

탑은 역사란 말로 표현될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역사란 서 있는 두 탑이다. 역사 속에서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궤도가 있다. 봄과 가을 사이에는 무더운 여름이 있다. 수확의 기쁨도 잠시 칼바람같이 매서운 겨울의 사슬에 꽁꽁 얽매어지는 모진 징벌도 있다. 탑은 어쩌면 아픔으로 점철된 세월의 덧없는 이끼 아니던가.

이렇게 탑을 보다가 주변의 산세에 눈을 주면 푸른 능선이 다가와 포근한 배경이 된다. 그 능선이 탑을 감싸고 다독이는 자비의 손인지도 모른다. 절을 짓고 탑을 세울 때, 주변의 경관을 염두에 두었을 것임은 틀림없다. 좌청룡 우백호며 현무 주작을 찾아 패를 놓았을 것이다. 개토(집을 짓거나 묘를 쓰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함)에 앞서 능선에게 엎드려 간절히 사유를 고했을 법도 하다. 그래 탑을 본다는 것은 어쩌면 주변의 산수경관을 보는 일이기도 하다. 가령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허허벌판이라면 스치는 바람에도 가눌 수 없는 아픔과 쓸쓸함이 배어 있을 것이다. 절은 쓰러지고 빈터만 낙엽처럼 엎드렸지만 탑이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된다. 탑은 또 말한다. 주변의 산세라는 배경이 있어 외롭지 않은 세월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고.

배경이라는 것은 그 배경을 차지하는 대상에게 뜻밖의 힘이 되기도 한다. 가령 성자의 어깨 너머로 떠오르는 배광은 성자를 더욱 우러르게 하는 무언의 설법 아니던가. 성자에게로 이끌리게 하는 말과 글이 불립문자 같은 신기루가 되어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가 아늑하게 사라지기도 한다. 두 개의 나란한 탑 주변에는 세월이라는 배광(背光)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탑의 소리를 듣게 하는 힘이며 역사 아니겠는가. 그 역사에 끌려 나는 이따금 탑을 찾는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이 내 안에 있다는 건 다소 묘하기는 하다. 그러나 탑을 돌면서 멀리 하늘을 보면 거기 가물가물한 빗살무늬 같은 것이 떠오르는 느낌에 찬다. 그건 탑의 발자취인지도 모른다.

감히 그런 맥락은 아니지만 나 또한 가물가물한 무엇이 되어 세상을 살아간다면 어떨까도 싶다. 그걸 덧없는 삶이라고 하는지 모른다. 무심한 세월이라는 말속에 으레 공수래공수거가 꼬리처럼 따라붙기도 한다. 그 꼬리표가 덧없는 인생을 상징한다면 어떨까. 이렇게 말하면 무슨 허무주의니 뭐니 하는 수식어가 따르겠지만, 나는 거창한 주의 따위에는 귀를 기울이거나 흥미도 갖지 않는다.

언젠가 몇 사람이 한담하는 자리에서 우연히 배경이란 말에 꼬리를 단 적이 있다. 그때 누가 말했다. 전쟁에서 어린 병사가 '빽' 소리를 남기며 죽었다. 죽어가는 마지막 소리, 그걸 배경(back)으로 풀었다. 뒤를 보아주는 이가 없어 전투에 나서게 되고 또 죽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때 내 안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학맥이니 인맥이니 하는 말이었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은근히 주눅이 들던 내 안에서 '빽'하는 신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듯했다. 탑의 배경에는 능선이 있다. 그것은 역사이며 빽이다. 기울어질 듯한 탑인데 역사의 힘이 있어 기울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흘러가는 구름에 멀거니 시선을 돌리기도 한다. 그러면 두 개의 탑이 구름을 타고 흘러가고 있다. 탑은 지상만이 아니라 하늘엗 구름처럼 뜨지 않는가. 글이란 걸 끄적이고 있으니 뜻밖에도 글이 탑이다. 거기 마음이 홀려 내 안에서 탑을 세우다가 망가뜨리고 또 세우는 환상에 사뭇 끌린다. 탑은 어떻게 구름처럼 뜨는지 알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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