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덕송(牛德頌)                       -이광수-

  이해와 감상

사람을 위해 일생을 봉사하다가 죽은 후까지도 살과 뼈와 가죽을 사람에게 내어 주는 소를 통해, 인간이 계발하고 수행해야 할 몇 가지 미덕을 제시한 교훈적인 성격의 글이다. 계몽주의적 성격을 띠는 이광수의 문학관이 여기서도 역시 엿보인다.

이 글의 앞부분은 색깔에 대한 통념을 논하면서 검은 소 이야기를 하는데, 그 서술이 너무 길어진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색을 설명하면서 들고 나오는 천의무봉한 소재들에서 역시 이광수가 대단한 작가임을 발견하게 된다. 뒷부분에서는 소의 덕성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소의 생활 하나하나에 성인, 순교자, 영웅, 애국자, 종교가 등, 한마디로 성인이 갖춘 덕성을 부여한다. 특히 소의 어질고 인자함을 높이 사면서, ‘인도주의자요, 성자요, 부처라’라고 결론짓는다. 더 나아가 인간이 신성에 도달하려 할 때 본받아야 할 동물로 여기고 있다..

소는 우리와 가까운 동물이며 특이한 성격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지칠 줄 모르는 힘겨운 노동에도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견실함, 사악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커다란 눈, 마침내는 죽어서 고기 한 점, 뼈 한 조각도 버리지 않고 오로지 인간을 위해 자신의 온몸을 던지는 소야말로 우리 민족이 가장 신뢰할 만한 동물로 부각시켜 왔다. 따라서 우리 문학은 소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왔고, 수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이 글에서 소는 수많은 미덕을 간직한 동물로 우리 앞에 존재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바라보는 소에 대한 관점은 일반적인 이미지의 반복일 뿐 새삼스럽게 새로울 것은 없다. 소로부터 이끌어내는 교훈은 상투적이기까지 하다. 또한 소의 덕성을 부각시키느라 다른 동물을 너무 폄하했다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경망한 대로 당나귀는 당나귀대로의 덕이 있는 것이고, 요망하다 해도 족제비는 족제비다운 날쌤이 바로 그의 덕일진대, 동물의 특성을 너무 인간성 위주로만 파악하려한 오류가 지적되기도 한다.

  요점 정리

■ 갈래 : 수필

■ 성격 : 예찬적, 교훈적

■ 주제 : 소의 덕성 예찬

■ 표현 : 풍성한 비유와 열거

  생각해 볼 문제

1. 이 글에서 작가가 범하고 있는 잘못이 무엇일지 비판해 보라.

⇒ 동물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본성과 본능대로 살아간다. 이를 외모만으로 평가하여 그 동물의 덕을 인간성에 비유하는 것은 오류이다. 인간의 덕은 교육과 수양을 쌓을 수 있는 것이지만, 동물들은 그것이 본능이기 때문이다.

2. 작가가 사물을 대하는 태도는 선조들의 전통적인 자연관과 유사한 면이 있다. 무엇일지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 선조들은 자연의 본성에서, 이 작가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배워야 할 덕을 찾고자 하였다. 사군자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3. 이 글에서 지은이가 말하는 소의 덕성은 어떤 것이며, 그것을 무엇에 비유했는가?

4. 이 글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표현법은?

⇒ 비유법, 열거법

  작품 읽기

금년은 을축년(乙丑年)이다. 소의 해라고 한다. 만물에는 각각 다소의 덕(德)이 있다. 쥐 같은 놈까지도 밤새도록 반자 위에서 바스락거려서 사람에게,

"바쁘다!"
하는 교훈을 주는 덕이 있다. 하물며 소는 짐승 중에 군자다. 그에게서 어찌해 배울 것이 없을까. 사람들아! 소 해의 첫날에 소의 덕을 생각하여, 금년 삼백육십오 일은 소의 덕을 배우기에 힘써 볼까나.

특별히 우리 조선 민족과 소와는 큰 관계가 있다. 우리 창조신화(創造神話)에는 하늘에서 검은 암소가 내려와서 사람의 조상을 낳았다 하며, 또 꿈에서 소가 보이면 조상이 보인 것이라 하고 또 콩쥐팥쥐 이야기에도 콩쥐가 밭을 갈다가 호미를 분지르고 울 때에 하늘에서 검은 암소가 내려와서 밭을 갈아 주었다. 이 모양으로 우리 민족은 소를 사랑하였고, 특별히 또 검은 소를 사랑하였다.

소와 우리민족의 관련성

검은 소를 한문으로 쓰면, '청우(靑牛)' 즉 푸른 소라고 한다. 검은빛은 북방 빛이요, 겨울 빛이요, 죽음의 빛이라 하여 그것을 꺼리고 동방 빛이요, 봄 빛이요, 생명 빛인 푸른 빛을 끌어다 붙인 것이다. 동방은 푸른빛, 남방은 붉은 빛, 서방은 흰 빛, 북방은 검은 빛, 중앙은 누른 빛이라 하거니와, 이것은 한족들이 생각해 낸 것이 아니요, 기실은 우리 조상들이 생각해 낸 것이라고 우리 역사가(歷史家) 육당(六堂)이 말하였다고 믿는다. 어쨌거나 금년은 을축년이니까, 푸른 소 즉 검은 소의 해일시 분명하다. 육갑(六甲)으로 보건대, 을축년은 우리 민족에게 퍽 인연이 깊은 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검은 빛 말이 났으니 말이거니와, 검은 빛은 서양 사람도 싫어한다. 그들은 사람이 죽은 때에 검은 빛을 쓴다. 심리학자의 말을 듣건대, 검은 빛은 어두움의 빛이요 어두움은 무서운 것의 근원이기 때문에 모든 동물이 다 이 빛을 싫어한다고 한다. 아이들도 어두운 것이나 꺼먼 것을 무서워한다.

어른도 그렇다. 캄캄한 밤에 무서워 아니하는 사람은 도둑질하는 양반밖에는 없다. 검은 구름은 농부와 뱃사공이 무서워하고, 검은 까마귀는 염병 앓는 사람이 무서워하고, 검은 돼지, 검은 벌레, 모두 좋은 것이 아니다. 검은 마음이 무서운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요, 요새 활동 사진에는 검은 손이 가끔 구경꾼의 가슴을 서늘케 한다. 더욱이 우리 조선 사람들을 수십 년 이래로 검은 옷을 퍽 무서워했다.

그러나 검은 것이라고 다 흉한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검어야만 하고, 검을수록 좋은 것이 있다. 처녀의 머리채가 까매야 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렇게 추운 때에 빨간 불이 피는 숯도 까매야 좋다. 까만 숯이 한 끝만 빨갛게 타는 것은 심히 신비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처녀들의 까만 머리채에 불 같은 빨간 댕기를 드린 것도 이와 같은 의미로 아름답거니와, 하얀 저고리에 까만 치마와 하얀 얼굴에 까만 눈과 눈썹도 어지간히 아름다운 것이다.

빛 타령은 그만하자, 어쨌거나 검은 것이라고 반드시 흉한 것이 아니다. 먹은 검을수록 좋고, 칠판도 검을수록 하얀 분필 글씨와 어울려 건조 무미한 학교 교실을 아름답게 꾸민다. 까만 솥에 하얀 밥이 갓 잦아 구멍이 송송 뚫어진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하얀 간지에 사랑하는 이의 솜씨로 까만 글씨가 꿈틀거린 것은 누구나 알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구태 검은 소라고 부르기를 꺼려서 푸른 소라고 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푸른 하늘, 푸른 풀 할 때에는, 또는 이팔 청춘이라 하여 젊은 것을 푸르다고 할 때에는 푸른 것이 물론 좋고, 풋고추의 푸른 것, 오이지에 오이 푸른 것도 다 좋지마는, 모처럼 사온 귤 궤를 떼고 본즉, 겉은 누르고 큰 것이나 한 갈피만 떼면 파란 놈들이 올망졸망한 것이라든지, 할멈이 놀림 빨래를 망하게 하여 퍼렇게 만든 것이며, 남편과 싸운 아씨의 파랗고 뾰족하게 된 것은 물론이요, 점잖은 사람이 순사한테 얻어맞아서 뺨따귀가 퍼렇게 된 것 같은 것은 그리 좋은 퍼렁이는 못 되다.

그러니까 우리는 구태 검은 소를 푸른 소로 고칠 필요는 없다. 검은 소는 소대로 두고 우리는 소의 덕이나 찾아보자.

검은 소에 대한 이야기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마라 하였으나, 대개는 속 마음이 외모에 나타나는 것이다. 아무도 쥐를 보고 후덕스럽다고 생각은 아니할 것이요, 할미새를 보고 진중하다고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돼지를 소담한 친구라고는 아니할 것이다. 토끼를 보면 방정맞아는 보이지만 고양이처럼 표독스럽게는 아무리 해도 아니 보이고, 수탉을 보면 걸걸은 하지마는, 지혜롭게는 아니 보이며, 뱀은 그리만 보아도 간특하고 독살스러워 구약(舊約) 작자의 저주를 받은 것이 과연이다 ― 해 보이고, 개는 얼른 보기에 험상스럽지마는 간교한 모양은 조금도 없다. 그는 충직하게 생겼다.

말은 깨끗하고 날래지마는 좀 믿음성이 적고, 당나귀나 노새는 아무리 보아도 경망꾸러기다. 족제비가 살랑살랑 지나갈 때에 아무라도 그 요망스러움을 느낄 것이요, 두꺼비가 입을 넓적넓적하고 쭈그리고 앉은 것을 보면, 아무가 보아도 능청스럽다. 이 모양으로 우리는 동물의 외모를 보면 대개 그의 성질을 짐작한다. 벼룩의 얄미움이나 모기의 도심질이나 다 그의 외모가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소는 어떠한가. 그는 말의 못 믿음성도 없고, 여우의 간교함, 사자의 교만함, 호랑이의 엉큼스럼, 곰이 우직하기는 하지마는 무지한 것, 코끼리의 추하고 능글능글함, 기린의 외입쟁이 같음, 하마의 못 생기고 제 몸 잘 못 거둠, 이런 것이 다 없고, 어디로 보더라도 덕성스럽고 복성스럽다. '음매'하고 송아지를 부르는 모양도 좋고, 우두커니 서서 시름없이 꼬리를 휘휘 둘러,

"파리야, 달아나거라, 내 꼬리에 맞아 죽지는 말아라."
하는 모양도 인자하고, 외양간에 홀로 누워서 밤새도록 슬근슬근 새김질을 하는 양은
성인이 천하사(天下事)를 근심하는 듯하여 좋고, 장난꾼이 아이놈의 손에 고삐를 끌리어서 순순히 걸어가는 모양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 같아서 거룩하고, 그가 한 번 성을 낼 때에 '으앙'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부릅뜨고 뿔이 불거지는지 머리가 바수어지는지 모르는 양은 영웅이 천하를 취하여 대로(大怒)하는 듯하여 좋고, 풀밭에 나무 그늘에 등을 꾸부리고 누워서 한가히 낮잠을 자는 양은 천하를 다스리기에 피곤한 대인(大人)이 쉬는 것 같아서 좋고, 그가 사람을 위하여 무거운 멍에를 메고 밭을 갈아 넘기는 것이나 짐을 지고 가는 양이 거룩한 애국자나 종교가창생(蒼生)을 위하여 자기의 몸을 바치는 것과 같아서 눈물이 나도록 고마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세상을 위하여 일하기에 등이 벗어지고 기운이 지칠 때에, 마침내 푸줏간으로 끌려 들어가 피를 쏟고 목숨을 버려 내가 사랑하던 자에게 내 살과 피를 먹이는 것은 더욱 성인(聖人)의 극치인 듯하여 기쁘다. 그의 머리에 쇠메가 떨어질 때, 또 그의 목에 백정의 마지막 칼이 푹 들어갈 때, 그가 '으앙'하고 큰 소리를 지르거니와, 사람들아! 이것이 무슨 뜻인 줄을 아는가,

"아아! 다 이루었다."
하는 것이다.

소를 느리다고 하는가. 재빠르기야 벼룩 같은 짐승이 또 있으랴. 고양이는 그 다음으로나 갈까. 소를 어리석다고 마라. 약빠르고 꾀잇기로야 여우 같은 놈이 또 있나. 쥐도 그 다음은 가고, 뱀도 그만은 하다고 한다.

"아아! 어리석과저. 끝없이 어리석과저. 어린애에게라도 속과저. 병신 하나라도 속이지는 말과저."
소더러 모양 없다고 말지어다. 모양 내기로야 다람쥐 같은 놈이 또 있으랴. 평생에 하는 일이 도둑질 하기와 첩 얻기밖에는 없다고 한다. 소더러 못났다고 말지어다. 걸핏하면 발끈하고 쌕쌕 소리를 지르며 이를 악물고 대드는 것이 고양이, 족제비, 삵 같은 놈이 있으랴. 당나귀도 그 다음은 가고, 노새도 그 다음은 간다. 그러나 소는 인욕(忍辱)의 아름다움을 안다.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하기와, '원수를 사랑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 할 줄을 안다.

소! 소는 동물 중에 인도주의자(人道主義者)다. 동물 중에 부처요, 성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마따나 만물이 점점 고등하게 진화되어 가다가 소가 된 것이니, 소 위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거니와, 아마 소는 사람이 동물성을 잃어 버리는 신성(神性)에 달하기 위하여 가장 본받을 선생이다.

소가 지닌 덕성 예찬

# 반자 : 방이나 마루의 천정을 평평하게 받드는 시설.

# 육갑 : 육십 갑자(六十甲子).

# 간지 : 두껍고 질긴 종이로, 편지지로 사용하던 것.

# 창생(蒼生) : 세상의 모든 사람.

# 쇠메 : 쇠로 만든 무거운 방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