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 급 품(特級品)                   -김소운-

 

  ■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균열이 생겼다가도 스스로 결합하는 유연성이 비자를 특급품으로 만드는 사실과, 과실을 범했다가도 그것을 뉘우치며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연결시키는 참신한 발상이 돋보인다. 그것을 통해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그러한 유연성이 필요하다는 것, 우리에게 과실을 범한 사람을 소외시키지 말 것 등을 넌지시 충고한다. 문장은 논리적이고 차분하며 고문의 그윽한 맛이 있다. '양언(揚言)'이나 추상 열일(秋霜烈日)', '후안무치(厚顔無恥)' 등의 단어사용이 그러하다. 이글은 참신한 발상과 논리적이고 그윽하고 예스러운 문장을 통해 수필 읽기의 즐거움을 준다.

가장 좋은 '특급품'으로 치는 바둑판은 흠이 있는 것이라는 데서 인생의 의미를 생각해 낸 것이 이 글의 중심내용이다. 즉, 바둑판과 인생이 서로 조응(照應)하고 있다. 문학이 가치 있는 체험의 형상화라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바둑판이 곧 가치있는 체험으로 형상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바둑판 하나를 두고 인생을, 그리고 인간을 이해하는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는 데서 작가의 혜안을 짐작할 수 있으며, '재미가 깨를 볶는 이야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수필은 작가가 인생의 훌륭한 안내자인 것을 느끼게 한다. 이 글을 읽고 있으면 인생의 교사가 들려 주는 매력적인 설교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끌려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요점 정리

◆ 성격 : 경수필  -유추적, 교훈적-

제재 : 비자반(비자목으로 만든 바둑판)

◆ 특성

* 사물이 지닌 성질에서 인생의 지혜를 이끌어냄.

* 사실과 의견을 적절히 섞어서 서술해 나감.

* 특급품 비자반와 유사한 사례(조개, 재수생, 베토벤)

◆ 주제 : 삶의 과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연한 삶의 태도의 필요성

◆ 출전 : <건망허망>(1952)

  ■ 생각해 보기

◆ 이 작품을 읽고 다음과 같은 한자성어를 떠올릴 수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 보자.

⑴ 청출어람(靑出於籃) : 균열이 간 비자반이 이삼 년 후에는 일등품보다 좋은 특급품이 된다는 사실에서

⑵ 개과천선(改過遷善) : 균열을 스스로 봉합해 최고 품질이 되는 특급품과, 과실을 뉘우치고 스스로 가시밭길을 감내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잘못을 고치어 착하게 된다는 한자숙어인 개과천선을 떠올릴 수 있음.

⑶ 전화위복(轉禍爲福) : 균열이 오히려 최고를 만들 게 하는 비자반 특급품이나, 과실을 통해 더욱 인간적으로 거듭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화가 바뀌어 복이 된다는 이 숙어와 관련이 있음.

⑷ 고진감래(苦盡甘來) : 균열 끝에 최고가 되는 비자반 특급품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이 숙어를 떠올리게 함.

 ■ 작품 읽기

일어(日語)로 '가야'라고 하는 나무 - 자전에는 '비(榧)'라고 했으니 우리말로 비자목이라는 것이 아닐까. 이 비자목으로 두께 여섯 치, 게다가 연륜이 고르기만 하면 바둑판으로는 그만이다. 오동으로 사방을 짜고 속이 빈 - 돌을 놓을 때마다 '떵떵' 하고 울리는 우리네 바둑판이 아니라, 이건 일본식 통나무 기반(碁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비자는 연하고 탄력이 있어 두세 판국을 두고 나면 반면(盤面)이 얽어서 곰보같이 된다. 얼마 동안을 그냥 내버려 두면 반면은 다시 본디대로 평평해진다. 이것이 비자반의 특징이다. 비자를 반재(盤材)로 진중(珍重)하는 소이(所以)는, 오로지 유연성을 취함이다. 반면(盤面)에 돌이 닿을 때의 연한 감촉 -, 비자반이면 여느 바둑판보다 어깨가 마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흑단(黑檀)이나 자단(紫檀)이 귀목(貴木)이라 해도 이런 것으로 바둑판을 만들지는 않는다.

비자반 일등품 위에 또 한층 뛰어 특급품이란 것이 있다. 반재며, 치수며, 연륜이며 어느 점이 일급과 다르다는 것이 아니나, 반면에 머리카락 같은 가느다란 흉터가 보이면 이게 특급품이다. 알기 쉽게 값으로 따지자면, 전전(戰前) 시세로 일급이 2천원(돌은 따로 하고) 전후인데, 특급은 2천 4,5백원, 상처가 있어서 값이 내리키는커녕 오히려 비싸진다는 데 진진(津津)한 묘미가 있다.

반면이 갈라진다는 것은 기약치 않은 불측(不測)의 사고다. 사고란 어느 때 어느 경우에도 별로 환영할 것이 못 된다. 그 균열의 성질 여하에 따라서는 일급품 바둑판이 목침(木枕)감으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큰 균열이 아니고 회생할 여지가 있을 정도라면 헝겊으로 싸고 뚜껑을 덮어서 조심스럽게 간수해 둔다.(갈라진 균열 사이로 먼지나 티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단속이다.)

1년, 이태, 때로는 3년까지 그냥 내 버려둔다. 계절이 바뀌고 추위, 더위가 여러 차례 순환한다. 그 동안에 상처났던 바둑판은 제 힘으로 제 상처를 고쳐서 본디대로 유착(癒着)해 버리고, 균열진 자리에 머리카락 같은 희미한 흔적만이 남긴다.

비자의 생명은 유연성이란 특질에 있다. 한번 균열이 생겼다가 제 힘으로 도로 유착, 결합했다는 것은 그 유연성이라 특질을 실지로 증명해 보인, 이를테면 졸업 증서이다. 하마터면 목침감이 될 뻔했던 불구 병신이, 그 치명적인 시련을 이겨 내면 되레 한 급이 올라 특급품이 되어 버린다. 재미가 깨를 볶는 이야기다.

더 부연할 필요도 없거니와, 나는 이것을 인생의 과실과 결부시켜서 생각해 본다. 언제나, 어디서나 과실을 범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을 매양 꽁무니에 달고 다니는 것이, 그것이 인간이다.

과실에 대해서 관대해야 할 까닭은 없다. 과실은 예찬하거나 장려할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어느 누구가 '나는 절대로 과실을 범치 않는다'고 양언(揚言)할 것이냐? 공인된 어느 인격, 어떤 학식, 지위에서도 그것을 보장할 근거는 찾아내지 못한다.

어느 의미로는 인간의 일생을 과실의 연속이라고도 볼 수 있으리라. 접시 하나, 화분 하나를 깨뜨리는 작은 과실에서 일생을 진창에 파묻어 버리는 큰 과실에 이르기까지 여기에도 천차만별의 구별이 있다. 직책상의 과실이나 명리(名利)에 관련된 과실은 보상할 방법과 기회가 있을지나, 인간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과실도 있다. 교통사고로 해서 육체를 훼손하거나, 잘못으로 인명을 손상했다거나 -.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과실이 아니다.

애정 윤리의 일탈(逸脫), 애정의 불규칙 동사, 애정이 저지른 과실로 해서 뉘우침과 쓰라림의 십자가를 일생토록 짊어지고 가려는 이가 내 아는 범위로도 한둘이 아니다. 어떤 생활, 어떤 환경 속에도 카츄사가 있고, 호손의 '주홍글씨'의 주인공은 있을 수 있다. 다만 다른 것은, 그들 개개의 인품과 교양, 기질에 따라서 그 십자가에 경중(輕重)의 차가 있다는 것 뿐이다.

남편은 밤이 늦도록 사랑에서 바둑을 두고 노는 버릇이 있었다. 그 사랑에는 남편의 친구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슬쩍 자리를 비켜서 부인이 잠들어 있는 내실로 간 것을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인은 모기장을 들치고 들어온 사내를 잠결에 남편인 줄만 알았다 ……. 그 부인은 그날로 식음을 전폐하고 남편의 근접을 허락지 않았다. 10여 일을 그렇게 하다가 고스란히 그는 굶어 죽었다. 구체적인 예를 들추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실례를 하나 들어본다. 십수 년 전에 통영에서 있었던 실화이다.(입을 다문 채 일체 설명 없이 그 부인은 죽었다는데 어느 경로로 어떻게 이 진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인지 그것은 나도 모른다.)

이렇게 준엄하게, 이렇게 극단의 방법으로 하나의 과실을 목숨과 바꾸어서 즉결 처리해 버린 그 과단, 그 추상열일(秋霜烈日)의 의기에 대해서는 무조건 경의를 표할 뿐이다. 여기에는 이론도 주석도 필요치 않다. 어느 범부(凡夫)가 이 용기를 따르랴! 더욱이나 요즈음 세태에 있어서 이런 이야기는 옷깃을 가다듬게 하는 청량수요, 방부제이다.

백 번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 하나의 여백을 남겨두고 싶다. 과실을 범하고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가 있다 하여 그것을 탓하고 나무랄 자 누군인가? 물론 여기도 확연히 나누어져야 할 두 가지 구별이 있다. 제 과실을 제 스스로 미봉해 가면서 후안무치(厚顔無恥)하게 목숨을 누리는 자와, 과실의 생채기에 피를 흘리면서 뉘우침의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이와 -.  전자를 두고는 문제삼을 것이 없다. 후자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죽음이란 절대다. 이 죽음 앞에는 해결 못할 죄과가 없다. 그러나 또 하나의 선택, 일급품 위에다 '특급품'이란 예외를 인정하고 싶다.

남의 나라에서는 채털리즘이 논의된 지도 오래다. 그러나 우리들은 로렌스, 스탕달과는 인연 없는, 백 년, 2백 년 전의 윤리관을 탈피 못 한 채 새 것과 낡은 것 사이를 목표 없이 방황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느 한쪽의 가부론(可否論)이 아니다. 그러한 공백(空白) 시대인데도 애정 윤리에 대한 관객석의 비판만은 언제나 추상같이 날카롭고 가혹하다.

전쟁이 빚어 낸 비극 중에서도 호소할 길 없는 가장 큰 비극은, 죽음으로 해서, 혹은 납치로 해서 사랑하고 의지하던 짝을 잃은 그 슬픔이다. 전쟁은 왜 하는 거냐? '내 국토와 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내 국토는 왜 지키는 거냐? 왜 자유는 있어야 하느냐? - '아내와 지아비가 서로 의지하고, 자식과 부모가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떳떳하게, 보람 있게 살기 위해서'이다. 그 보람, 그 사랑의 밑뿌리를 잃은 전화(戰禍)의 희생자들-, 극단으로 말하자면, 전쟁에 이겼다고 해서 그 희생이 바로 그 당자에게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죽은 남편이, 죽은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전쟁 미망인, 납치 미망인들의 윤리를 운위(云謂)하는 이들의 그 표준하는 도의의 내용은 언제나 청교도(淸敎徒)의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채찍과 냉소(冷笑)를 예비하기 전에 그들의 굶주림, 그들의 쓰라림과 눈물을 먼저 계량할 저울대가 있어야 될 말이다. 신산(辛酸)과 고난을 무릅쓰고 올바른 길을 제대로 걸어가는 이들의 그 절조(節操)와 용기는 백 번 고개 숙여 절할 만하다. 그렇다하기로니, 그 공식, 그 도의 하나만이 유일무이(唯一無二)의 표준이 될 수는 없다.

어느 거리에서 친구의 부인 한 분을 만났다. 그 부군은 사변의 희생자로 납치된 채 상금 생사를 모른다. 거리에서 만난 그 부인 ― 만삭까지는 아니라도 남의 눈에 띌 정도로 배가 부른 ― 그이와 찬 한 잔을 나누면서 "선생님도 저를 경멸하시지요. 못된 년이라고 ……." 하고 고개를 숙이는 그 부인 앞에서 내가 한 이야기가 바로 이 바둑판의 예화(例話)이다.

과실은 예찬할 것이 아니요, 장려할 노릇도 못 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과실이 인생의 올 마이너스일 까닭도 없다. 과실로 해서 더 커지고 깊어가는 인격이 있다. 과실로 해서 더 정화되고 굳세어지는 사랑이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느 과실에도 적용된다는 것은 아니다. 제 과실의 상처를 제 힘으로 다스릴 수 있는 '가야' 반(盤)의 탄력 ― 그 탄력만이 과실을 효용한다. 인생이 바둑판만도 못하다고 해서야 될 말인가?

 

* 양언(揚言) - 목청을 높여 공공연하게 말함.

* 추상열일(秋霜烈日) - (가을의 찬 서리와 여름의 뜨거운 햇볕이란 뜻으로) 형벌이나 권위  따위가 몹시 엄함.

* 후안무치(厚顔無恥) - 뻔뻔스러워 부끄러움을 모름.

* 채털리즘 - 자유로운 애정 추구의 태도('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라는 작품이 추구하는 경향에서 나온 말)

* 신산(辛酸) - 세상살이의 고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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