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무한(山情無限)                   -정비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금강산 장안사로 가는 길부터 시작하여 ‘장안사→명경대→황천 계곡과 망군대→마하연과 비로봉→마의 태자의 묘지’에 이르는 여정과 감상을 담은 것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절경이요, 신비로운 일화가 얽혀 있어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저절로 탄성을 울리게 하는 금강산. 지은이는 이 금강산의 풍치와 절경과 거기서 오는 낭만적 정감을 신선한 감각과 화려하고 섬세한 문체로 표현함으로써 기행문이라는 단순한 기록성을 뛰어넘어 서경과 서정이 잘 조화된 문학으로 승화시켜 기행 수필의 차원을 한 단계 높이고 있다. <금강산 기행>을 남긴 사람은 여럿이지만, 정비석 수필처럼 현란하고 격렬하게, 애상적이고 회고적으로 자연 친화의 감정을 표출한 작품은 다시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금강산 기행에서 느낀 감회를 낭만적, 감상적, 회고적으로 그린 수필이다. 노정에 따른 추보식 구성으로 씌어진 이 글은, 화려한 문체로 서경과 서정을 적절하게 배합하고 있다. 여행객이 지닌 가벼운 해방감과 감수성으로 노정을 선명히 드러내고, 관찰과 연상에 의해 작자의 유려한 문체와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 있기도 하다.

이처럼, 기행문이라는 형식이 지닌 단순한 기록성을 뛰어넘어 서경과 서정이 잘 조화된 문학으로 승화시킴으로써, 기행 수필의 차원을 한 단계 높이고 있다. 선경후정(先景後情)이라는 표현이 있다. 금강산의 경(景)을 먼저 구경하고, 여기에서 촉발된 작자의 정(情)을 담담히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시적(詩的) 수필에 가깝다.

  요점정리

성격 : 경수필, 기행수필

표현 : 서경과 서정의 조화(선경후정)

              화려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다소 긴 문장 구사(화려체, 우유체, 만연체)

              여정에 따른 추보식 구성

              직유와 은유의 자유자재한 구사, 한자어 표현의 깊은 함축, 묘사의 독창성

주제 : 금강산의 빼어난 정경과 그 여정

  작품 읽기

산길 걷기에 알맞도록 간편히만 차리고 떠난다는 옷치장이 정작 푸른 하늘 아래에 떨치고 나서니 멋은 제대로 들었다. 스타킹과 낙카아팬트와 잠바로 몸을 거뿐히 단속한 후, 등산모 젖혀 쓰고 바랑을 걸머지고 고개를 드니, 장차 우리의 발 밑에 밟혀야 할 만이천 봉이 천리로 트인 창공에 뚜렷이 솟아 보이는 듯하다. 그립던 금강으로, 그리운 금강산으로!

떨치고 나선 산장에서는 어느 새 산의 향기가 서리서리 풍긴다. 산뜻한 마음으로 활개쳐 가며 산으로 떠나는 지완과 나는 이미 진고개에 방황하던 창백한 인텔리가 아니라 역발산 기개세의 기개(힘이 산이라도 빼어 던질 만하고, 세상을 덮을 정도로 기력이 웅대함.)를 가진 갈데없는 야인 문 서방이요, 정 생원이었다.

경원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차 안에서 무슨 홀게 빠진(대수롭지 않다. 가볍다) 체모란 말이냐? 우리 조상들의 본을 떠서 우리도 할 소리 못할 소리 남 꺼릴 것 없이 성량껏 떠들었으면 그만이 아닌가? 스스로 야인의 긍지에 도취되어서, 뒤로 흘러가는 창 밖의 경개를 우리는 호화로운 심정으로 영접하였다. 고리타분한 생활을 항간에 남겨 두고, 잠시나마 악착스러운 생활을 벗어나 순수한 자연의 품 안에 들어 본다는 것은 항상 오만한 인간 생활의 순화를 위하여 얼마나 긴요한 일일까?

허심탄회, 인화지와 같은 마음으로 앞으로 전개될 자연들을 우리는 해면처럼 흡수했으면 그만이었다. 철원서 금강 전철로 차를 바꿔 탄 것이 저무는 7시쯤. 먼 산골에는 황혼이 어리고 대지는 각일 각회 색으로 용해되어 가는데, 개성을 추상당한(일정한 인식 목표를 추구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표상이나 개념에서 특정한 특성이나 속성을 빼냄) 산령들이 묵직한 윤곽만으로 서녘 하늘에 웅크렸다.

고요하고 태고 같은 이 풍경 속에서 순시(삽시간, 잠깐)도 멎음 없이 변화를 조종하는 기막힌 조화는 대체 누가 부리는 요술이던가? 창명히 저물어 가는 경개에 심취하여, 창가에 기대인 채 마음의 평화를 즐기다가, 우리는 어느덧 저 모르게 가슴 깊이 지녔던 비밀들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보배로 여기던 비밀을 아낌 없이 털어놓도록 그만큼 우리를 에워싼 분위기는 순수했던 것이다. 유리창 밖으로 비치는 지완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의 청춘사에서도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웠을 사랑담을 허심히(남의 말을 잘 받아들임) 들어 넘기며 나는 몇 번이고 담배를 바꿔 피웠다. 침착한 여인네가 장롱에 옷가지 챙겨 넣듯 차근차근 조리 있게 얽어 나가는 지완의 능숙한 화술은 맑은 그의 음성과 어울려서 귓가에 도란도란 향기로웠다. 사랑이 그처럼 담담할 수 있을까? 세상에 사랑처럼 쓰라린 것, 매운 것은 없다는데 지완의 것은 아침 이슬같이 담결(담백하고 깨끗함)했다니, 그도 그의 성격의 소치일까? 창밖에 금풍(가을 바람)이 소슬해서 그 사람이 유난히 고매하게 느껴졌다.

 

내금강 역사(역으로 쓰는 건물)에 도착.

어느 외국인의 산장을 그대로 떠다 놓은 듯이 멋진 양관(서양식의 집. 양옥). 외금강 역과 아울러 이 한국식 내금강역은 산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무한 정다운 호대조(좋은 대조를 이룸)의 두 건물이다. 내(內)와 외(外)를 여실히 상징한 것이 더 좋았다.

십삼야월(13일의 밤에 뜬 달)의 달빛 차갑게 넘실거리는 역 광장에 나서니 심산의 밤이라 과시(과연) 바람은 세찬데, 별안간 계간(산골짜기를 흐르는 시냇물)을 흐르는 물 소리가 정신을 빼앗을 듯 소란하여 추위는 한층 뼈에 스민다. 장안사로 향하여 몇 걸음 걸어가며 고개를 드니, 산과 산들이 병풍처럼 사방에 우쭐우쭐 둘러선다. 기 쓰고 찾아온 바로 저 산이 아니었던가고 금세 어루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힘껏 호흡을 들여마시니, 어느덧 간장도 청수에 씻기운 듯 맑아 온다. 청계를 끼고 물소리를 즐기며 걸어가기 10분쯤, 문득 발부리에 나타나는 단청된 다리는 이름부터 격에 어울려 함부로 건너기조차 외람된 문선교(問仙橋)!

문선교! 어느 때 어떤 은사(숨어 지내는 선비)가 예까지 찾아와서 선경이 어디냐고 목동에게 차문(남에게 모르는 것을 물음)한 고사라도 있었던가? 있을 법한 일이면서 깜짝 소문에조차 듣지 못한 것은, 역시 선경과 속계가 스스로 유별한 탓이었던가?

차문주가하처재(借問酒家何處在)

목동요지행화촌(牧童遙指杏花村)

은 속계의 노래로, 속계에서는 이만하면 풍류객이었다. 동양류의 선경이란 풍류객들이 사는 고장을 일컬음이니, 선경과 속계는 백지 한 겹밖에 아닐 듯이 믿어지니, 이미 세진(세상의 먼지)을 떨치고 나선 몸이라 서슴지 않고 문선교를 건너기로 하였다.

 

이튿날 아침, 고단한 마련해선 일찌감치 눈이 떠진 것은 몸이 지닌 기쁨이 하도 컸던 탓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간밤에 볼 수 없던 영봉(靈峯)들을 대면(對面)하려고 새댁 같이 수줍은 생각으로 밖에 나섰으나, 계곡은 여태짙은 안개 속에서, 준봉(峻峯)은 상기 깊은 구름 속에서 용이(容易)하게 자태를 엿보일 성싶지 않았고, 다만 가까운 데의 전나무, 잣나무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쭉 뻗고,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것이 눈에 뜨일 뿐이었다.

모두 근심 없이 자란 나무들이었다.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하늘을 향하여 밋밋하게 자란 나무들이었다. 꼬질꼬질 뒤틀어지고 외틀어지고 한 야산(野山) 나무밖에 보지 못한 눈에는, 귀공자와 같이 기품(氣稟)이 있어 보이는 나무들이었다.

조반(朝飯) 후 단장(短杖) 짚고 험난한 전정(前程)웃음경삼아 탐승(探勝)의 길에 올랐을 때에는, 어느덧 구름과 안개가 개어져 원근(遠近) 산악이 열병식(閱兵式)하듯 점잖이들 버티고 서 있는데, 첫눈에 비치는 만산(萬山)의 색소는 홍(紅)! 이른바 단풍이란 저런 것인가 보다 하였다.

만학천봉(萬壑千峯)이 한바탕 흐드러지게 웃는 듯, 산색(山色)은 붉은 대로 붉었다. 자세히 보니, 홍만도 아니었다. 청(靑)이 있고, 녹(錄)이 있고, 황(黃)이 있고, 등(登)이 있고, 이를테면 산 전체가 무지개와 같이 복잡한 색소로 구성되었으면서, 얼른 보기에 주홍(朱紅)만으로 보이는 것은 스펙트럼의 조화던가?

복잡한 것은 색(色)만이 아니었다. 산의 용모는 더욱 다기(多岐)하다. 혹은 깎은 듯이 준초(峻痒)하고, 혹은 그린 듯이 온후(溫厚)하고, 혹은 막잡아 빚은 듯이 험상궂고, 혹은 틀에 박은 듯이 단정하고 . 용모, 풍취가 형형색색인 품이 이미 범속(凡俗)이 아니다.

산의 품평회(品評會)를 연다면, 여기서 더 호화로울 수 있을까? 문자 그대로 무궁무진(無窮無盡)이다. 장안사(長安寺) 맞은편 산에 울울창창(鬱鬱蒼蒼) 우거진 것은 다 잣나무뿐인데, 모두 이등변삼각형(二等邊三角形)으러 가지를 늘어뜨리고 섰는 품이, 한 그루의 나무가 흡사히 괴어 놓은 차례탑(茶禮塔) 같다. 부처님은 예불상(禮佛床)만으로는 미흡(未洽)해서, 이렇게 자연의 진수성찬(珍羞盛饌)을 베풀어 놓으신 것일까? 얼른 듣기에 부처님이 무엇을 탐낸다는 것이 천만부당(千萬不當)한 말 같지만, 탐내는 그것이 물욕(物慾) 저편의 존재인 자연이고 보면, 자연을 맘껏 탐낸다는 것이 이미 불심(佛心)이 아니고 무엇이랴.

장안사 앞으로 흐르는 계류(溪流)를 끼고 돌며 몇 굽이의 협곡(峽谷)을 거슬러 올라가니 산과 물이 어울리는 지점에 조그마한 찾집이 있다.

다리도 쉴 겸, 스탬프북을 한 권 사서, 옆에 구비된 기념 인장을 찍으니, 그림과 함께 지면(紙面)에 나타나는 세 글자가 명경대(明鏡臺)! 부앙(俯仰)하여 천지에 참괴(慙愧)함이 없는 공명(公明)한 심경명경지수라고 이르나니, 명경대란 흐르는 물조차 머무르게 하는 곳이란 말인가! 아니면, 지니고 온 악심(惡心)을 여기서만은 정(淨)하게 하지 아니하지 못하는 곳이 바로 명경대란 말인가! 아무러나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찻집을 나와 수십 보를 바위로 올라가니, 깊고 푸른 황천담(黃泉潭)을 발 밑에 굽어보며 반공(半空)외연(巍然)히 솟은 절벽이 우뚝 마주 선다. 명경대였다. 틀림없는 화장경(化粧鏡) 그대로였다. 옛날에 죄의 유무(有無)를 이명경에 비추면, 그 밑에 흐르는 황천담에 죄의 영자(影子)반영되었다고 길잡이는 말한다.

명경! 세상에 거울처럼 두려운 물건이 다신들 있을 수 있을까! 인간 비극은 거울이 발명되면서 비롯했고, 인류 문화의 근원은 거울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나의 지나친 억설일까? 백 번 놀라도 유부족(猶不足)일 거울의 요술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일상(日常)으로 대하게 되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가경(可驚)할 일인가?

신라조(新羅朝) 최후의 왕자인 마의 태자(麻衣太子)는 시방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바위 위에 꿇어 엎드려, 명경대를 우러러 보며 오랜 세월을 두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염송(念誦)했다니, 태자도 당신의 업죄(業罪)를 명경(明鏡)에 영조(暎照)해 보시려는 뜻이었을까! 운상기품(雲上氣稟)에 무슨 죄가 있으랴만, 등극(登極)하실 몸에 마의(麻衣)를 감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이 이미 불법(佛法)이 말하는 전생의 연(緣)일는지 모른다.

두고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며 계곡을 돌아 나가니, 앞으로 염마(閻魔)처럼 막아 서는 웅자(雄姿)가 석가봉(釋迦峯)! 뒤로 맹호(猛虎)같이 덮누르는 신용(神容)이 천진봉(天眞峯)! 전후 좌우를 살펴봐야 협착(狹窄)한 골짜기는 그저 그뿐인 듯. 진퇴유곡절박감을 느끼며 그대로 걸어 나가니, 간신히 트이는 또 하나의 협곡(狹谷)!

몸에 감길 듯이 정겨운 황천강(黃泉江) 물줄기를 끼고 돌면, 길은 막히는 듯 나타나고, 나타나는 듯 막히고, 이 산에 흩어진 전설과, 저 봉에 얽힌 유래담(由來談)을 길잡이에게 들어 가며 쉬엄쉬엄 걸어 나가는 도안에, 몸은 어느덧 심해(深海)같이 유수(幽邃)한 수목(樹木) 속을 거닐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천하에 수목이 이렇게도 지천(至賤)으로 많던가! 박달나무, 엄나무, 피나무, 자작나무, 고로쇠나무 . 나무의 종족은 하늘의 별보다도 많다고 한 어느 시의 구절을 연상하며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단풍 뿐, 단풍의 산이요, 단풍의 바다다.

산 전체가 요원(燎原) 같은 화원(花園)이요, 벽공(碧空)에 외연(巍然)히 솟은 봉봉(峯峯)은 그대로가 활짝 피어 오른 한떨기의 꽃송이다. 산은 때 아닌 때에 다시 한 번 봄을 맞아 백화난만(百花爛漫)한 것일까? 아니면, 불의(不意)의 신화(神火)에 이 봉 저 봉이 송두리째 붉게 타고 있는 것일까? 진주홍(眞珠紅)을 함빡 빨아들인 해면(海綿)같이, 우러러 볼수록 찬란하다.

산은 언제 어디다 이렇게 많은 색소를 간직해 두었다가, 일시에 지천으로 내뿜는 것일까?

단풍이 이렇게 고운 줄은 몰랐다. 김 형(金兄)은 몇번이고 탄복하면서, 흡사히 동양화의 화폭(畵幅) 속을 거니는 감흥을 그대로 맛본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도 한 떨기 단풍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다리는줄기요, 팔은 가지인 채, 피부는 단풍으로 물들어 버린 것 같다. 옷을 훨훨 벗어 꽉 쥐어 짜면, 물에 헹궈 낸 빨래처럼 진주홍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다.

그림 같은 연화담(蓮花潭) 수렴폭(垂簾瀑)을 완상(琓賞)하며, 몇십 굽이의 석계(石階)목잔(木棧)철삭(鐵索)을 답파(踏破)하고 나니, 문득 눈 앞에 막아서는 무려 3백 단의 가파른 사닥다리―한 층계 한 층계 한사코 기어오르는 마지막 발걸음에서 시야는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탁 트인다. 여기가 해발 5천 척의 망군대(望軍隊)―아! 천하는 이렇게도 광활하고 웅장하고 숭엄하던가!

이름도 정다운 백마봉(白馬峯)은 바로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서 있고, 내일 오르기로 예정된 비로봉(毘盧峯)은 단걸음에 건너뛸 정도로 가깝다. 그밖에도, 유상무상(有象無象)의 허다한 봉들이 전시(戰時)에 할거(割據)하는 군웅(群雄)들처럼 여기에서도 불끈 저기에서도 불끈, 시선을 낮춰 아래로 굽어보니, 발 밑은 천인단애(千?斷崖), 무한제(無限際)로 뚝 떨어진 황천계곡(黃泉溪谷)에 단풍이 선혈처럼 붉다. 우러러보는 단풍이 새색시 머리의 칠보 단장(七寶丹粧) 같다면, 굽어보는 단풍은 치렁치렁 늘어진 규수의 붉은 치마폭 같다고나 할까. 수줍어 수줍어 생글 돌아서는 낯 붉힌 아가씨가 어느 구석에서 금방 튀어나올 것도 같구나!

저물 무렵에 마하연(摩詞衍)의 여사(旅舍)를 찾았다.

산중에 사람이 귀해서였던가. 어서 오십사는 상냥한 안주인의 환대도 은근하거니와, 문고리 잡고 말없이 맞아주는 여관집 아가씨의 정성은 무르익은 머루알같이 고왔다.

여장(旅裝)을 풀고 마하연함(摩詞衍庵)을 찾아갔다. 여기는 선원(禪院)이어서, 공부하는 승려뿐이라고 한다. 크지도 않은 절이건만 승려 수는 실러 30명은 됨직하다. 이런 심산(深山)에 웬 중이 그렇게도 많을까?

    한없은 청산 끝나 가려 하는데, [無限淸山行欲盡]

    흰구름 깊은 곳에 노승도 많아라. [白雲深處老僧多]     -당승(唐僧) 영일(靈一)의 시 -

옛 글 그대로다.

노독(路毒)을 풀 겸 식후에 바둑이나 두려고 남포동 아래에 앉으니, 온고지정(溫故之情)이 불현 듯 새로워졌다.

"남포동은 참말 오래간만인데."

하며, 불을 바라보는 김 형의 말씨가 하도 따뜻해서, 나도 장난 삼아 심지를 돋우었다 줄였다 하며, 까맣게 잊었던 옛 기억을 되살렸다. 그리운 얼굴들이, 흐르는 물의 낙화(落花) 송이 같이 떠돌았다.

밤 깊어 뜰에 나가니, 날씨는 흐려 달은 구름 속에 잠겼고, 음풍(陰風)이 몸에 선선하다. 어디서 솰솰 소란히 들려 오는 소리가 있기에 바람 소린가 했으나, 가만히 들어 보면 바람 소리만도 아니요, 물 소린가 했더니 물 소리만도 아니요, 나뭇잎 갈리는 소린가 했더니 나뭇잎 갈리는 소리가 함께 어울린 교향악인 듯 싶거니와, 어쩌면 곤히 잠든 산의 호흡인지도 모를 일이다.

뜰을 어정어정 거닐다 보니, 여관집 아가씨는 등잔 아래에 외로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무슨 책일까? 밤 깊은 줄조차 모르고 골똘히 읽는 품이, 춘향(春香)이 태형(苔刑) 맞으며 백(百)으로 아뢰는 대목일 것도 같고, 누명(陋名) 쓴 장화(薔花)가 자결을 각오하고 원한을 하늘에 고축(告祝)하는 대목일 것도 같고, 시베리아로 정배(定配)가는 카추샤의 뒤를 네프 백작(伯爵)이 쫓아가는 대목일 것도 같고 . 궁금한 판에 제멋대로 상상해 보는 동안에 산 속의 밤은 처량히 깊어갔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산을 찾아 나섰다. 자꾸 깊은 산속으로만 들어가기에, 어느 세월에 이 골을 다시 헤어나 볼까 두렵다. 이대로 친지와 처자를 버리고 중이 되는 수밖에 없나 보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이키니, 몸은 어느새 구름을 타고 두리둥실 솟았는지, 군소봉(群小峯)이 발 밑에 절하여 아뢰는 비로봉 중허리에 나는 서 있었다. 여기서부터 날씨는 급격히 변화되어 이 골짝 저 골짝에 안개가 자옥하고 음산(陰散)한 구름장이 산허리에 감기더니, 은제(銀梯), 금제(金梯)에 다다랐을 때, 기어이 비가 내렸다. 젖빛 같은 연무(煙霧)가 짙어서 지척을 분별할 수 없다. 우장(雨裝)없이 떠난 몸이기에 그냥 비를 맞으며 올라가노라니가, 돌연 일진 광풍(一陣狂風)이 어디서 불어 왔는지, 휙 소리를 내며 운무(雲霧)를 몰아가자, 은하수같이 정다운 은제와, 주홍 주단 폭 같이 늘어놓은 붉은 진달래 단풍이, 몰려가는 연무 사이로 나타나 보인다. 은제와 단풍은 마치 이랑이랑으로 섞바꾸어가며 짜 놓은 비단결 같이 봉에서 골짜기로 퍼덕이며 흘러내리는 듯하다. 진달래 꽃보다 단풍이 배승(倍勝)함을 이제야 깨달았다.

오를수록 우세(雨勢)는 맹렬했으나, 광풍이 안개를 헤칠 때마다 농무(濃霧) 속에서 홀현홀몰(忽顯忽沒)하는 영봉(靈峯)을 영송(迎送)하는 것도 과히 장관(壯觀)이었다.

산마루가 가까울수록 비는 폭주(暴注)로 내리붓는다. 만 이천 봉을 단박에 창해(滄海)로 변해 보리는 것일까. 우리는 갈데 없이 물에 빠진 쥐 모양을 해 가지고 비로봉 절정(絶頂)에 있는 찻집으로 찾아드니, 유리창 너머로 내다보고 섰던 동자(童子)가 문을 열어 우리를 영접하였고, 벌겋게 타오른, 장독 같은 난로를 에워싸고 둘러앉았던 선착객(先着客)들이 자리를 사양해 준다. 인정이 다사롭기 온실 같은데, 밖에서는 몰아치는 빗발이 뒤집히는 듯하다. 용호(龍虎)가 싸우는 것일까? 산신령이 대노(大怒)하신 것일까? 경천동지(驚天動地)도 유만부동(類萬不同)이지, 이렇게 만상(萬象)을 뒤집을 법이 어디 있으랴고, 간장(肝腸)을 죄는 몇 분이 지나자, 날씨는 삽시간에 잠든 양같이 온순해졌다. 변환(變幻)도 이만하면 극치에 달한 듯싶다.

비로봉 최고점(最古點)이라는 암상(巖上)에 올라 사방을 조망(眺望)했으나, 보이는 것은 그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운해(雲海)뿐, ―운해는 태평양보다도 깊으리라 싶었다. 내 · 외 · 해(內外海) 삼금강(三金剛)을 일망지하(一望之下)에 굽어 살필 수 있다는 한 지점에서 허무한 운해밖에 볼 수 없는 것이 가석하나, 돌이켜 생각건대 해발 육천 척에 다시 신장 오척을 가하고 오연(傲然)히 저립(佇立)해서, 만학천봉(萬壑千峯)을 발 밑에 꿇어 엎드리게 하였으면 그만이지, 더 바랄 것이 무엇일랴.

마음은 천군만마(千軍萬馬)에 군림하는 쾌승 장군(快勝將軍)보다도 교만해진다.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수해(樹海)였다. 설자리를 삼가, 구중심처(九重深處)가 아니면 살지 않는 자작나무는 무슨 수중 공주(樹中公主)이던가!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이 애화(哀話) 맺혀 있는 용마석(龍馬石)― 마의 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능(陵)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던― 철책(鐵柵)도 상석(床石)도 없고, 풍림(風霖)에 시달려 비문(碑文)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히려 처량하다.

무덤가 비에 젖은 두어 평 잔디밭 테두리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석양이 저무는 서녘 하늘에 화석(化石)된 태자의 애기(愛騎) 용마(龍馬)의 고영(孤影)이 슬프다. 무심히 떠도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르는 듯, 소복(素服)한 백화(百花)는 한결 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 달이 중천에 서럽다.

태자의 몸으로 마의(麻衣)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險山)에 들어온 것은, 천 년 사직(千年社稷)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몸에 짊어지려는 고행(苦行)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入山)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胸裡)가 어떠했을까? 흥망(興亡)이 재천(在天)이라. 천운(天運)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信義)가 있으니, 태자가 고행으로 창맹(蒼氓)에게 베푸신 도타운 자혜(慈惠)가 천 년 후에 따습다.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悠久)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던가!

고작 칠십 생애(七十生涯)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角逐)하다가 한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愁愁)롭다.

 

#산정무한(山情無限) : 산에서 느끼는 감정과 흥이 끝이 없음

# 고단한 마련 해선 :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 영봉(靈峰) : 신령스러운 산봉우리

# 새댁같이 수줍은 생각으로 : 아름다운 금강산의 절경을 처음 보는 데서 오는 설렘을 새댁의 수줍음에 비유하여 표현한 구절이다. 금강산에 대한 작자의 기대와 애정이 담겨 있다.

# 준봉(峻峰) : 높고 험한 산봉우리

# 청운의 뜻을 - 나무들이었다. : 마치 대망(大望)이라도 이루려는 듯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나무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근심 없이 자란 나무’란 표현과 어울려 인위적인 힘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의 원시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 외틀어지고 : 비뚤게 틀어지고

# 단장(短杖) : 지팡이

# 전정(前程) : 앞길

# 웃음경삼아 : 웃음을 주는 경치로 삼아

# 탐승(探勝) : 경치 좋은 곳을 찾음

# 만학천봉(萬壑千峰) : 수많은 골짜기와 산봉우리들

# 등(橙) : 오렌지 색

# 다기(多岐) : 여러 갈래

# 준초(峻峭)하고 : 가파르고 험하고

# 차례탑(茶禮塔) : 차례 때 높이 괴어 올린 제물

# 예불상(禮佛床) : 예불시 음식물을 차려 놓은 상(床)

# 부앙(俯仰) : 굽어보고 우러러봄

# 참괴(慙愧) : 부끄러움

# 부앙(俯仰)하여 천지에 참괴함이 없는 공명한 심경 :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고 사사로움이 없이 정당하고 맑은 마음. <맹자> 인용

# 명경지수(明鏡止水) : ‘맑은 거울과 잔잔한 물’이라는 뜻으로 아주 맑고 깨끗한 심경(心境)을 일컫는 말

# 반공(半空) : 중천(中天)

# 외연(巍然)히 : 높고 크게 우뚝이

# 층암절벽(層巖絶壁) : 험한 바위들이 층층이 쌓인 낭떠러지

# 영자(影子) : 그림자

# 반영(反映) : 반사되어 비침

# 인간 비극은 - 거울에서 출발했다. : 인간은 거울을 봄으로써 자기의 부족함에 대한 열등 의식이 싹터 고뇌와 비극이 시작되었고, 또한 자기의 참모습을 깨달아 자신을 개선하고 환경과 생활을 고쳐 나감으로써 문화의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 억설(臆說) : 근거나 이유가 없는 억측의 말

# 유부족(猶不足)할 : 오히려 부족할

# 가경(可驚) : 놀랄 만함

# 염송(念誦) : 마음 속으로 부처를 생각하여 염불을 욈

# 업죄(業罪) : 전생에 지은 죄

# 영조(映照) : 밝게 되비춤

# 운상기품(雲上氣稟) : 속됨을 벗어난 고상한 기품. 곧 왕족의 기품으로 백성의 세계에 대하여 왕족의 세계를 이룸

# 염마(閻魔) : 염라 대왕. 저승의 임금

# 웅자(雄姿) : 늠름하고 씩씩한 모습. 웅장한 모습

# 협착(狹窄)한 : 매우 좁은

# 진퇴유곡(進退維谷) :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어, 어찌할 길이 없음

# 절박감(切迫感) : 매우 급한 느낌. 다급한 느낌

# 유래담(由來談) : 사물의 내력에 대한 이야기

# 유수(幽邃)한 : 그윽하고 깊숙한

# 지천(至賤) : 너무 많아 조금도 귀할 것이 없음

# 단풍의 산이요 단풍의 바다다. : 온 산과 계곡이 단풍으로 뒤덮여 있어서 마치 단풍으로 이루어진 산과 바다와 같다. 황홀하고 찬란한 단풍을 표현한 것이다.

# 산 전체가 요원(燎原) 같은 화원이요, - 한 떨기의 꽃송이다. : 산의 아름다운 단풍을 표현. 산과 봉봉은 그대로 단풍에 덮여 있으므로 산과 봉우리는 곧 단풍이라 할 수 있다.

# 백화난만(百花爛漫) : 온갖 꽃이 피어 한창 무르익어 곱게 흐드러진

# 신화(神火) : 도깨비불. 까닭 없이 저절로 일어난 불

# 진주홍(眞朱紅) : 진한 주홍빛. 새빨간 빛

# 해면(海綿) : 갯솜. 동물의 뼈로서 솜같이 된 것

# 화폭(畵幅) : 그림을 그려 놓은 종이 헝겊 등의 조각

# 감흥(感興) : 마음에 느끼어 일어나는 흥취

# 다리는 줄기요 - 물들어 버린 것 같다. : 탐승하는 일행을 나무에 비유하여 마치 몸의 다리는 줄기이고 팔은 나뭇가지이며, 피부는 온통 단풍의 빛깔로 물들어 버린 것 같다. 주객일체(主客一體), 물심일여(物心一如)의 경지를 나타내었다

# 완상(玩賞)하며 : 즐기며 구경하며

# 석계(石階) : 돌계단

# 목잔(木棧) : 나무로 사다리처럼 놓은 길

# 철삭(鐵索) : 철사로 꼬아 만든 줄

# 답파(踏破)하고 : 끝까지 다 걸어가고

# 일망무제(一望無際) : 멀고 넓어서 바라보는 데 막힘이 없음

# 광활(廣闊) : 환하고 넓음

# 지호지간(指呼之間) : 아주 가까운 거리

# 유상무상(有象無象) : 세상 물건을 이것저것 구별하지 않고 통틀어 일컫는 말

# 유상무상의 - 저기에서도 불끈, : 갖가지 모양의 봉우리들이 솟아 있는 모습을 싸움터의 영웅에 비유한 것이다.

# 전시(戰時) : 전쟁 중에

# 할거(割據) : 제각기 땅을 차지하여 자리를 잡음

# 군웅(群雄) : 많은 영웅들을 이르는 말이나 여기서는 많은 산봉우리를 이름

# 천인단애(千仞斷崖) : 천 길이나 되는 낭떠러지

# 칠보 단장(七寶丹粧) : 여러 패물로 단장함

# 환대(歡待) : 반가이 대접함

# 선원(禪院) : 참선(參禪)하는 절

# 이런 심산에 - 많을까? : 은근히 당나라의 시인이 쓴 시구인 ‘白雲深處老僧多’(흰 구름 깊은 곳에 노승도 많아라.)를 인용하고 있다. 사람이 귀한 여관 풍경과 대비시키고 있다.

# 온고지정 : 옛것을 살피고 생각하는 마음

# 음풍 : 음산한 바람. 겨울 바람

# 고축(告祝) : 신명(神明)에게 고하여 빎.

# 시베리아로 정배가는 ~ 쫓아가는 대목 :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의 장편 <부활>의 한 장면을 말함.

# 홀연홀몰 :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짐.

# 경천동지 : 하늘이 놀라고 땅이 울린다는 뜻으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함.

# 오연히 : 오만스럽게

# 저립해서 : 우두커니 섬.

# 풍림 : 바람과 비, 풍우

# 섬섬옥수 : 가냘프고 고운 여자의 손

# 창맹 : 세상의 모든 백성, 창생.

# 남가일몽 : 덧없는 부귀 영화

# 수유 : 잠시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