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삶과 얇은 삶                    -김 현-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아파트에서의 삶과 땅집에서의 삶을 대조하면서 인생에 대한 통찰을 담아낸 수필이다. 작가는 아파트와 땅집이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고 양식을 대변한다는 관점에서 두 대상의 차이점을 기술하고 있다. 작가는 아파트에서의 삶은 얇은 삶, 즉 인위적이고 표면적인 것만을 중시하는 삶의 양식을 보여주며, 땅집에서의 삶은 두꺼운 삶, 즉 자연적이고 정신적인 가치가 존중되는 삶의 양식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깊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땅집'과 '아파트'의 상징적 의미

땅집은 비밀을, 깊이를 가지고 있다는 그의 시각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우선 그것은 김현 선생이 고독과 칩거를 그리워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복잡하고 거친 인간관계에 부딪치는 현대인에게 자발적 고독은 이룰 수 없는, 그러나, 영원히 갈구되는 소망이다. 과연, 그는 "화가 나서, 주위의 사람들이 미워서, 어렸을 때에 다락방이나 지하실에 혼자 들어가, 낯설지만 흥미로운 것들을 한두 시간 매만지면서 나 혼자만의 세계에 잠겨 있었을 때에 정말로 내가 얼마나 행복했던고!"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혼자만의 세계에 잠기는 것이 유폐와 고립의 선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낯설고 흥미로운 것들'이라는 말이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다. 어떤 '신비 덩어리'와의 만남이 그 꿈 안에 깃들어 있었다. 물론 그 만남이 신비(비현실적 환상)에의 침닉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숨기고 혼자 있는 시간은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다. 그의 이야기는 비밀을 간직하고 숨기는 것만이 곧 바깥과의 통화를 가능케 한다는 놀라운, 얼핏 보기에는 역설적인 발견으로 나아간다. '그 가장 첨예한 상징적인 사실이 아파트에서는 채소를 손수 가꿔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아파트에서는 자연과의 직접 교섭이 거의 완전히 단절된다. 아파트에 자연이 있다면 그것은 인위적인 자연이다. 아파트 안에서 키워지는 꽃이나 나무들은 자연의 그것이 아니라, 깊이 없는 사물들에 다름 아니다.' 나는 이 대목의 자연을 그대로 바깥으로 치환해 읽는다. 그가 말하는 자연은 나와 다른, 혹은 규정되지 않은 자율적 존재들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아파트에서는 자연마저도 사회적으로 규정된, 다시 말해 사회적 자아로서의 나와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사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가 인공적인 세상과 싸워야 하는 것은 자연의 보존과 획득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인공 세계가 말살하기 때문이다.

  요점 정리

성격 : 수필(사회 비판적, 자기 고백적)

표현

* 비판적인 현실 인식이 드러나 있다.

*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을 고백적 어조로 표현하고 있다.

* 의문형 어미를 활용하여 생각을 확장시키고 있다.

* 아파트의 삶과 땅집에서의 삶의 대조

주제 : 자연적이고 정신적인 가치의 중요성

  교과서 활동 다지기

1. 이 작품에 나타난 아파트와 땅집의 특징을 비교해 보자.

아파트

땅집

드러남(노출)

자연이 상실됨.

숨김, 감춤

자연과 더불어 삶.

 

2. 다음 활동을 통해 이 작품의 제목이 지닌 의미를 이해해 보자.

(1) 이 작품에서 말하는 '두꺼운 삶'과 '얇은 삶'은 어떠한 삶인지 설명해 보자.

* 두꺼운 삶 → 내면의 깊이가 있는 삶, 성찰하는 삶, 자연과 함께하는 삶

* 얇은 삶 → 표피적이고 가벼운 삶, 깊이가 없는 인위적인 삶

 

(2) 이 작품에 드러난 작가의 가치관을 토대로 다음 소설에 나오는 어른들을 평가해 보자.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른들은 새로 사귄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도 제일 중요한 것은 도무지 묻지를 않는다.

어른들은 '그 친구의 목소리가 어떠하니? 무슨 놀이를 제일 좋아하니? 나비를 수집하니?'라고 묻는 법이 절대로 없다. '나이는 몇이야? 형제는 몇이나 되지? 몸무게는 얼마고? 그 친구 아버지는 부자니?'라는 것만 고작 물을 뿐이다.

그래야 그 친구를 아는 줄로 생각한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가에는 제라늄이 피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곱고 고운 붉은 벽돌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어른들은 도대체 그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생각해 내지 못한다. 어른들에게는 '10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해야 한다. 그래야 '아, 참 굉장한 집이겠구나!'하고 부르짖는다.

-생텍쥐베리, '어린 왕자' 중에서

→ 여기에서 숫자(돈)는 표면적이고, 내면적 성찰이 없는 현대인들의 삶의 태도를 상징한다. 이 작품 속의 어른들은 대상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금전적 가치, 즉 표면적인 가치만을 중시한다.

 

3. 다음에 제시된 아파트의 삶과 관련된 영상물을 보고, 다음 활동을 해 보자.

(1) 위 영상물에 드러나는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정리해 보고,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해 보자.

→ 좀 더 큰 집, 좀 더 비싼 아파트를 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현대인들이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인들은 스스로에게 가치 있는 삶을 꿈꾸기보다 다른사람에게 과시하기 위해 살고 있는 것 같다.

 

(2) '두꺼운 삶과 얇은 삶'과 위 영상물을 바탕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삶에 대해 친구들과 토의해 보자.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삶은 물질적으로 궁핍하지 않고 가끔은 나만의 사치도 누릴 수 있는 정도의 경제적 안정을 토대로,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믿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삶이다. 또한 아무도 거짓을 말하거나 남을 속이려고 하지 않고, 누구나 진실되게 살 수 있는 삶이 바람직한 삶이다.

 

  작품 읽기

<전략>

땅집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많은 것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에 대한 아름다운 산문을 남긴 생텍쥐페리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디엔가 우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어딘가에 우물이 있기 때문에 사막이 아름답다는 생텍쥐페리의 말을 통해 숨김이 가능한 비밀스러운 것이 있기 때문에 땅집이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인용함.). 과연 그렇다. 땅집이 아름다운 것은 곳곳에 우물과 같은 비밀스러운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에는 그 비밀이 있을 수가 없다. 오분 안에 찾아낼 수 없는 것은 아파트에 없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노출되어 있다. 스물두 평 또는 서른두 평의 평면 위에 무엇을 숨길 수가 있을 것인가. 쓰임새 있는 것만이 아파트(실용성을 중시하는 현대 문명을 대표함.)에서는 존중을 받는다. 아파트에 쓰임새 없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값비싼 골동품뿐이다. 그 골동품들 또한 아파트에서는 얼마나 엷게 보이는지. 그것은 얼마짜리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그것의 두께로 존재하지 않는다. 두께 없는 사물과 인간. 아파트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산다. 그러나 감출 것이 없을 때는 드러낸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감출 수도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사람은 자기가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숨겨야 살 수 있다. 그 숨김이 불가능해질 때에 사람은 사회가 요구하는 것만을 살 수밖에 없게 된다(두꺼운 삶, 깊이 있는 삶의 필요성). 무의식은 숨김이라는 생생한 역동성을 잊고 표면과 동일시되어 메말라 버린다. 표면의 인공적인 삶만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 가장 첨예한 상징적인 사실이 아파트에서는 채소를 손수 가꿔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아파트에서는 자연과의 직접 교섭이 거의 완전히 단절된다. 아파트에 자연이 있다면 그것은 인위적인 자연이다. 아파트 안에서 키워지는 꽃이나 나무들은 자연의 그것이 아니라, 깊이 없는 사물들에 다름 아니다. 자연의 상실은 아파트에서의 삶을 더욱 엷게 만든다. 그 삶을 약간이나마 두껍게 해 주는 것이 음악일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 또는 나 같은 사람에겐 시나 소설이다. ―― 그것들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그런데도 나는 아파트에서 살 수밖에 없다. 나의 적은 월급으로는 가정부를 두어야 버텨 낼 수 있는 땅집에서 견뎌 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나는 아파트에 살면서 내 아이들에게 가장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 아이들은 비록 아파트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아이 시절을 아파트 단지 안에서 보냈다. 그리고 아직도 보내고 있다. 그들이 보고 느끼는 것은 아파트의 회색 시멘트와 잔가지가 잘 정돈된 가로수들뿐이다. 그들에겐 자연이 없다(자식들에게 삭막한 자연환경밖에 보여줄 수 없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남도의 조그마한 섬이다. 그곳은 예술가들이 많이 태어나서 이제는 꽤 이름이 알려진 곳이다. 아무튼 그 조그마한 섬에서, 나는 산에 올라가 산나무 열매를 따 먹거나, 떼지어 몰려다니며 밭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을 몰래 맛보거나 ―― 목화꽃을 따 먹을 때에, 무나 감자를 몰래 캐 먹을 때에, 옥수수를 불에 구워 먹을 때에 우리는 얼마나 즐거웠던가. 어른들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무서움까지도 우리에게는 즐거움이었다 ―― 선창(물가에 다리처럼 만들어 배가 닿을 수 있게 한 곳)에 나가 서너 시간씩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도 내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면, 옻나무나 발목까지 빠지던 펄의 감촉이 맨 처음 되살아나오고, 가도가도 끝이 없던 여름날의 황톳길의 더위와 모깃불의 매캐한 냄새가 나를 가득 채운다(어린 시절의 추억을 촉각적 · 후각적으로 제시함). 나는 내 아이들에게 그 자연을 살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대신에 내가 소풍날에야 한두 개 얻어먹었던 삶은 달걀이나, 내가 고등학교 때에야 맛본 자장면 따위를 시켜 주며, 그들의 관심을 '원더우먼'이나 '육백만 불의 사나이'로 돌려놓고 있다. 나의 바다와 산은 '원더우먼'이나 '육백만 불의 사나이'의 달리기와 높이 뛰어오르기 또는 높은 데서 뛰어내기리고 바뀌어져 있다. 좋은 자연을 보고 숨쉬는 대신에 이제는 하도 먹어 맛도 없는 달걀이나 자장면을 먹고 자라는 내 불쌍한 아이들! 계속 자라면서 그들이 배우는 것은 선생님게 잘 보이기, 과외 공부하기, 회색 시멘트에 길들기, 오 · 엑스식의 문제 알아맞히기, 그리고 재치 있게 말하기 따위이다. 한마디로 감춰지지 않는 것 배우기이다. 아니 이렇게 쓰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나도 내 아이들처럼 아파트의 삶에 완전히 길들여져 있다('나'의 삶에 대한 반성). 그래서 내 주위의 모든 것을 엷게 본다. 거기에서 벗어나기란 얼마나 힘이 드는가. 그것은 거기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당위만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파트에서 벗어나야, 아니 땅집으로 가야 사물과 인간의 두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내가 아파트에서의 삶에 깊이 물들어 있음을 보여 준다.

아니 그러면 다락방이나 지하실이나 부엌(땅집에 사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공간, 숨겨진 것· 노출되지 않은 것 · 비밀스러운 것, 깊이 있는 삶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없는 곳에서 산 사람에겐 깊이가 없단 말인가? 바다와 산만을 보고 자라나야 삶의 깊이를 깨달을 수 있단 말인가? 또 아이들은 언제나 신비 덩어리가 아닌가? 아이들에게는 조약돌 하나로도 우주보다도 넓은 세계를 꿈꿀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내 아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은 나의 잘난 체하는 태도의 소산이 아닌가?(아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도 자신의 시각으로 봤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함.) 이 모든 것을 깊이 있게 생각해야 아파트에서의 나의 삶에 대한 충분한 비판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데, 그 비판을 하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어렵다. 그 생각에 깊이 잠기면 잠길수록 나는 어느 틈엔가 남도의 한 조그마한 섬('두꺼운 삶'이 존재하는 곳)의 밭에, 산에, 바다에 내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한 젊은 시인의 표현을 빌면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리는 것이다. 그 말을 뒤집으면 내가 두껍지 않을 때에 나는 엷게 판단한다는 것이 될지 모르겠다. 아파트에 살면서 아파트를 비난하는 체하는 자기 모순. 나에게 칼이 있다면 그것으로 너를 치리라. 바로 나를!(작가의 자기반성 → 마지막 단락에서 작가는 이 모든 비판이 혹시 자신이 얇은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작가는 두꺼운 삶이 존재하는 고향에 가 있지 않으면 두꺼운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지금 자신이 얇은 생각으로 얇은 삶을 비판하고 있음을 깨닫고, 자신의 모습을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