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여백                      -박이문-

  이해와 감상

이 글은 '공허감'을 인간 존재의 한 특징으로 보고, 그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진행해 나가고 있는 사색적인 중수필(에세이)이다. '공허감'이라는 것은 삶, 우주, 그리고 모든 존재의 궁극적 의미 부재가 가져오는 좌절된 의식을 말하는데, 철학과 종교는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한 인간 활동이다. 이런 궁극적 의미에 대한 욕망과 추구는 인간이 삶의 의미를 인식하는 존재라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글쓴이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공허감'을 느낄 수 있는 시간적 여유와 정신적 여백을 가져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요점 정리

성격 : 사색적, 철학적 수필

제재 : 공허감

주제 : 공허감의 본질과 의의

특성 : 비교를 통해 대상을 설명하고 있다.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사고 과정을 통해 주제를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을 설득하고 있다.

  작품 읽기

공허감은 무엇인가의 부재 의식이다. 무엇인가에 대한 욕망과 추구를 전제하지 않는 곳에 부재가 의식될 수 없고, 갈망과 추구는 언제나 어떤 대상을 전제하며 그래서 공허감은 필연적으로 어떤 대상의 부재가 가져오는 좌절된 의식이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좌절된 욕망이 다 같이 공허감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배고픔과 빈곤, 어떤 특정한 목적이나 사회적 실패는 다 같이 욕망 좌절의 예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좌절 의식은 공허감이 아니라 부족감을 의미한다. 부족감은 물질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음식이나 돈이 생기거나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고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면 해소된다. 그러나 인간은 물질적 혹은 사회적으로 충족된 후에도 어쩐지 부족감을 느낄 때가 있다. <성서>에 씌어 있는 것처럼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고, 공자가 효도에 대해 "요즘 효도란 봉양만 잘하면 되는 줄 안다. 그것쯤이야 개나 망아지도 할 수 있는 일인데, 존경하지 않는다면 다를 데가 없지 않는가."라고 말한 것처럼 이간은 정신적 동물로서 자신의 삶은 물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 '가치 · 의미'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유일하고 특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인간도 공허감, 즉 삶, 우주 그리고 모든 존재의 궁극적 의미 부재를 한 번이라도 그리고 순간적이나마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렇다. 아무리 만족스럽더라도 당신이나 남들이 한 일, 하고 있는 일, 앞으로 하게 될 일의 궁극적 의미를 생각해 보라. 당신의 존재, 반복되는 삶과 죽음의 의미, 자연 아니 모든 존재 전체의 궁극적 의미를 따져 보라. 그 의미가 어디에 있으며 언제 찾을 수 있겠는가? 철학과 종교는 이러한 물음과 이러한 물음에 대한 탐구의 두 가지 다른 표현이며 대답이기도 하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언제나 원시적이나마 철학적 사유가 있었고, 어떤 형태로든 종교가 동서를 막론하고 존재했던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궁극적 '의미'를 발견했다고 확신하고 있다. 종교적 신앙은 그러한 확신의 한 표현 형태이다. 따라서 그들로부터 공허감은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를 남들 이상 애타게 찾으면서도 발견한 것이라고는 오직 의미 부재, 즉 공허감뿐이라고 말하는 불행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인간의 삶, 자연의 모든 현상에 궁극적 의미가 정말 있으며 그래서 공허란 느낄 필요가 없는 감정인가, 아니면 모든 것은 사실 궁극적으로 공허한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결정적 대답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고 그로부터 어떤 필연적 결론도 논리적으로 나올 수 없다. 위와 같은 대답들에 대해서 인간으로서 내릴 수 있는 절대적 확신은 아무 데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공허감을 느껴 본 사람은 그런 것을 한번도 느껴 보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인간답고 그만큼 가치 있으며, 공허감을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인간의 삶은 공허감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인간의 삶보다 더 공허하다. 모든 궁극적 의미에 대한 욕망과 추구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 주는 가장 근본적인 특징이며, 따라서 인간의 유일하며 각별한 존엄성의 근거이다. 그렇다면 공허감을 느껴 보지 못한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마스크를 쓴 개나 돼지와 다를 바 없다. 이런 점에서 행복한 돼지보다 불행한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은 영원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공허감은 삶의 의미를 의식하고 그것을 발견하기 위한 첫째 조건이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공허감을 느낄 수 있는 시간적 여유와 정신적 여백이 필요하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공허감을 느껴 볼 여유도 없이 너나 할 것 없이 물질적 충만만을 위해서 서로 싸우면서 떠들고, 만들고, 팔고, 사고, 소유하고, 소비하기에만 바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로 채워진 오늘의 삶은 어떠한 삶보다도 더욱 공허해 보인다. 참다운 삶의 충만한 의미는 한 인간의 삶,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의 궁극적 공허를 느꼈을 때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돈벌이나 출세, 자연의 개발이나 애국적 사업에 바쁘기만 했던 활동을 잠시 잊고 무한한 우주 공간의 공허와 영원한 시간의 공허의 멀고도 은은한, 무한히 신비롭고 아름다운 울림에 잠시 귀를 기울이고 그것의 깊고도 깊은 의미를 잠깐이나마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