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   리                                    -한흑구-

 

 ■ 이해와 감상

보리의 순박함과 강인함을 농부의 덕성에 비추어서 쓴 수필이다. 모두 여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보리를 2인칭으로 대상화하여 의인법을 두드러지게 사용하는 표현양식을 가지고 있다.

일찍이 "내 수필의 주제는 미(美)와 진(眞)이다."라고 말한 작가답게, 시정신에 입각해 쓴 그의 글은 수필이기보다 한편의 산문시 같은 정경 묘사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참신한 묘사가 적고 동어반복적인 표현 일색인 점이 글의 매력을 감해 버렸다는 아쉬움은 있다. 현란한 수사의 미문이라면 글 자체가 독자에게 미적 쾌감을 제공해야 할 텐데 표현은 평이하면서 단어만 화려할 때는 전체 분위기가 공허해지기 쉽다.

보리는 매서운 바람과 얼음같이 차가운 눈, 그리고 그 속에 덮힌 어둠과 같은 시련과 고난을 견디면서, 억센 생명의 힘으로 결실에의 희망과 기다림으로 살아 마침내는 환희의 봄날을 맞이한다. 뿐만 아니라, 결실하여 고개를 숙이는 겸손함과 사명의 완수를 기도한다. 따라서, 지은이는 이런 보리의 일생을 통해서 성실과 끈질김으로 고난을 견디어 내면 환희와 보람이 반드시 따른다는 생의 교훈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이에 곁들여 순박하지만 억세고 참을성 있게 살아가는 농부의 삶과 노동의 가치를 예찬하고 있다.

 ■ 요점 정리

◆ 성격 : 경수필, 교훈적 수필

표현 : 상징적인 은유, 의인법

◆ 구성

       1 : 늦가을의 보리 파종

       2 : 겨울을 이겨내는 보리의 강인함

       3 : 봄을 맞은 보리의 생명력

       4 : 무르익는 여름의 보리

       5 : 가을의 수확

       6 : 보리에 대한 예찬

주제 : 보리의 강인함, 꿋굿함, 인내력 예찬

 ■ 생각해 보기

1. 이 글이 지닌 구성상의 특징에 대해 말해 보자

⇒ 보리를 심어서 수확하기까지의 과정을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이야기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보리를 예찬하는 내용으로 마무리하면서 6단락으로 나누어 놓고 있다. 각 단락은 시간 구성에 의해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의 형식이 자유로운 내용에 어울리는 자유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면, 이 글은 수필의 구성법을 잘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논리 정연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체계를 지니고 있고, 전문적이지 않으면서 보리의 속성을 재미있게 이야기 하고 있다.

 

2. 글의 대상인 '보리'를 '너'로 부름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는 ?

⇒ '너'라는 2인칭을 사용함으로써, 보리와 대화하는 느낌을 주며, 오랫동안 잘 알고 지낸 사이같은 친근감을 느끼게 해 준다.

 

 ※[수필적 사고와 형식]

같은 대상을 놓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민주적인 방법이듯이, 개성적인 생각을 표현한 수필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사고 구조나 방식 또는 관점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앎이다. 수필 작품의 감상에서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하는 방식의 특이성에 주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한편 수필의 형식이 자유로운 것은 자유로운 내용에 꼭 어울리는 형식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문제에 대하여 생각을 펴고 그것을 매듭짓는 방식은 우리 일상 생활에서 효율적으로 말하고 글을 쓰는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말하는 어투와 형상화 방식, 그리고 전개의 방식이 지닌 특징을 이해하는 것도 새로운 삶을 아는 방법을 확충하는 길이다.

 ■ 작품 읽기

 1.

보리.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왔다.

이미 한 해도 저물어 논과 밭에는 벼도 아무런 곡식도 남김없이 다 거두어들인 뒤에, 해도 짧은 늦은 가을날, 농부는 밭을 갈고 논을 잘 손질하면서, 너를 차디찬 땅 속에 깊이 묻어 놓았었다.

차가움에 엉긴 흙덩이들을 호미와 고무래로 낱낱이 부숴가며, 농부는 너를 추위에 얼지 않도록 주의해서 굳고 차가운 땅 속에 깊이 묻어 놓았었다.

"씨도 제 키의 열 길이 넘도록 심어지면 움이 나오기 힘이 든다"

옛 늙은이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농부는 너를 정성껏 땅 속에 묻어 놓고, 이제 늦은 가을 짧은 해도 서산을 넘은 지 오래고, 날개를 자주 저어 까마귀들이 깃을 찾아간 지도 오랜, 어두운 들길을 걸어서 농부는 희망의 봄을 머릿속에 간직하며, 굳어진 허리도 잊으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2.

온갖 벌레들도, 부지런한 꿀벌들과 개미들도 다 제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몇 마리 산새들만이 나지막하게 울고 있던 무덤가에는, 온 여름 동안 키만 자랐던 억새풀 더미가, 갈대꽃 같은 솜꽃만을 싸늘한 하늘에 날리고 있었다.

물도 흐르지 않고 다 말라 버린 갯강변 밭둑 위에는 앙상한 가시덤불 밑에 늦게 핀 들국화들이 찬 서리를 맞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논둑 위에 깔렸던 잔디들도 푸른 빛을 잃어버리고, 그 맑고 높던 하늘도 검푸른 구름을 지니고 찌푸리고 있는데, 너, 보리만은 차가운 대기 속에서도 솔잎 끝과 같은 새파란 머리를 들고, 머리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솟아오르고만 있었다.

이제 모든 화초는 지심(地心) 속의 따스함을 찾아서 다 잠자고 있을 때, 너, 보리만은 억센 팔들을 내뻗치고, 새말간 얼굴로 생명의 보금자리를 깊이 뿌리박고 자라왔다.

날이 갈수록 해는 빛을 잃고 따스함을 잃었어도, 너는 꿈쩍도 아니하고 그 푸른 얼굴을 잃지 않고 자라왔다.

칼날같이 매서운 바람이 너의 등을 밀고, 얼음같이 차다찬 눈이 너의 온몸을 덮어 억눌러도, 너는 너의 푸른 생명을 잃지 않았었다.

지금 어둡고 차디찬 눈 밑에서도, 너, 보리는 장미꽃 향내를 풍겨 오는 그윽한 유월의 훈풍과 노고지리 우짖는 새파란 하늘과, 산 밑을 훤히 비추어 주는 태양을 꿈꾸면서, 오로지 기다림과 희망 속에서 아무 말이 없이 참고 견디어 왔으며, 삼월의 맑은 하늘 아래 아직도 쌀쌀한 바람에 자라고 있다.

3

춥고 어두운 겨울이 오랜 것은 아니었다.

어느덧 남향 언덕 위에 누른 잔디가 파아란 속잎을 날리고, 들판마다 민들레가 웃음을 웃을 때면, 너, 보리는 논과 밭과 산등성이에까지, 이미 푸른 바다의 물결로써 온 누리를 뒤덮는다.

낮은 논에도, 높은 밭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보리다. 푸른 보리다. 푸른 봄이다.

아지랑이를 몰고 가는 봄바람과 함께 온 누리는 푸른 봄의 물결을 이고, 들에도 언덕 위에도 산등성이에도 봄의 춤이 벌어진다. 푸르는 생명의 춤, 새말간 봄의 춤이 흘러 넘친다.

이윽고 봄은 너의 얼굴에서, 또한 너의 춤 속에서 노래하고 또한 자라난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너의 푸른 얼굴들이 새날과 함께 빛 날 때에는, 노고지리들이 쌍쌍이 짝을 지어, 너의 머리 위에서 봄의 노래를 자지러지게 불러 대고, 너의 깊고 아늑한 품 속에 깃을 들이고 사랑의 보금자리를 틀어 놓는다.

4

어느덧 갯가에 서 있는 수양버들이 그의 그늘을 시내 속에 깊게 드리우고,나비들과 꿀벌들이 들과 산 위를 넘나들고, 뜰 안에 장미들이 그 무르익은 향기를 솜같이 부드러운 바람에 풍겨 보낼 때면, 너, 보리는 고요히 머리를 숙이기 시작했다.

온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다 이겨 내고, 봄의 아지랑이와 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 장미의 그윽한 향기를 온몸에 지니면서, 너, 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와 비명(悲鳴)을 다 마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머리를 숙이고 성자(聖者)인 양 기도를 드린다.

5

이마 위에는 땀방울을 흘리면서 농부는 기쁜 얼굴로 너를 한아름 덤썩 안아서, 낫으로 스르릉스르릉 너를 거둔다.

농부들은 너를 먹고 살고, 너는 또한 농부들과 함께 자란다.

너,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고,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너를 키우고, 너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6

보리, 너는 항상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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