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윤오영-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단순한 사춘기적 감정으로서의 부끄러움을 넘어서서, 가장 한국적인 정서로서의 부끄러움을 보여 주고 있다. 지은이의 시선이 담담하고도 단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고전적 부끄러움의 멋을 표상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 작품은 기(起)-서(敍)-결(結)의 3단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첫부분은 소녀와 그녀의 가족이 나와 맺고 있는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둘째 부분은 그 집을 방문하여 소녀의 방에서 ‘곤때 묻은 적삼’을 발견하기까지의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결말 부분에는 나의 당혹감을 충분히 배려하면서 심부름하는 노파를 기켜 가만히 그 옷을 감추면서도 못내 부끄러워하는 소녀의 깔끔한 마음씨가 드러나 있다. ‘간소하나 정결하고 깔밋’한 밀국수에 대한 묘사는 그저 아무런 의미가 없이 삽입된 게 아니다. 소녀의 마음씨를 음식 맛에 비유한다. 돌아오는 ‘나’를 배웅하지 않는다고 소녀를 나무라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소녀의 사춘기적인 심성을 배려할 줄 아는 아주머니의 태도에서도 한국적인 정조를 은근히 엿볼 수 있다.

작자의 담담한 시선이 고전적 부끄러움을 표상화하는 데 일조를 하고 있으며 잘 가다듬은 매끄러운 문장은 핵심적인 어휘를 긴 여운으로 남기는 데 기여하고 있다. 별다른 부연 설명 없이 한국적 부끄러움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기교는 독자로 하여금 잔잔한 미소를 짓게 하고 마치 자신의 아름다운 추억의 한 장면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정서를 고양시키는 격조 높은 수필이다.  

  요점 정리

성격 : 경수필, 서사적 수필. 고전적, 일화적 성격

표현 : 추보식 구성

             감정의 노출이 없는 깔끔한 문체 구사

주제 : 가장 한국적 정서인 고전적 부끄러움의 멋

출전 : <고독의 반추>(1974)

  작품 읽기

고개 마루턱에 방석소나무가 하나 있었다. 예까지 오면 거진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이 마루턱에서 보면 야트막한 산 밑에 올망졸망 초가집들이 들어선 마을이 오른쪽으로 넓은 마당 집이 내 진외가로 아저씨뻘 되는 분의 집이다.

* 아저씨뻘 되는 분의 집 ·배경 설명

나는 여름 방학이 되어 집에 내려오면 한 번씩은 이 집을 찾는다. 이 집에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열세 살 되는 누이뻘 되는 소녀가 있었다. 실상 촌수를 따져 가며 통내외까지 할 절척(切戚)도 아니지만 서로 가깝게 지내는 터수라, 내가 가면 여간 반가워하지 아니했고, 으레 그 소녀를 오빠가 왔다고 불러 내어 인사를 시키곤 했다. 소녀가 몸매며 옷매무새는 열 살만 되면 벌서 처녀로서의 예모를 갖추었고 침선이나 음식솜씨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집 문 앞에는 보리가 누렇게 패어 있었고, 한편 들에서는 일군들이 보리를 베기 시작했다. 나는 사랑에 들어가 어른들을 뵙고 수인사 겸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얼마 지체한 뒤에, 안 건넌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점심 대접을 하려는 것이다. 사랑방은 머슴이며, 일군들이 드나들고 어수선했으나, 건넌방은 조용하고 깨끗하다. 방도 말짱히 치워져 있고, 자리도 깔려 있었다. 아주머니는 오빠에게 나와 인사하라고 소녀를 불러 냈다.

* 가깝게 지내는 사이인 누이뻘 되는 소녀의 성장해 가는 모습

소녀는 미리 준비를 차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옷도 갈아 입고 머리도 곱게 매만져 있었다. 나도 옷고름을 매만지며 대청으로 마주 나와 인사를 했다. 작년보다는 훨씬 성숙해 보였다. 지금 막 건넌방에서 옮겨 간 것이 틀림없었다. 아주머니는 일군들을 보살피러 나가면서 오빠 점심 대접하라고 딸에게 일렀다. 조금 있다가 딸은 노파에게 상을 들려 가지고 왔다. 닭국에 말은 밀국수다. 오이소박이와 호박눈썹나물이 놓여 있었다. 상차림은 간소하고 정결하고 깔밋했다. 소녀는 촌이라 변변치는 못하지만 많이 들어 달라고 친숙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곱게 문을 닫고 나갔다.

 남창으로 등을 두고 앉았던 나는 상을 받느라고 돗자리 길이대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맞은편 벽 모서리에 걸린 분홍 적삼이 비로소 눈에 띄었다. 곤때가 묻은 소녀의 분홍 적삼이.

* 소녀와의 만남·소녀의 분홍 적삼 발견

나는 야릇한 호기심으로 자꾸 쳐다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밖에서 무엇인가 수런수런하는 기색이 들렸다. 노파의 은근한 웃음 섞인 소리도 들렸다. 괜찮다고 염려 말라는 말같기도 했다. 그러더니 노파가 문을 열고 들어 왔다. 밀국수도 촌에서는 별식이니 맛 없어도 많이 먹으라느니 너스레를 놓더니, 슬쩍 적삼을 떼어 가지고 나가는 것이었다.

 상을 내어 갈 때는 노파 혼자 들어오고, 으레 따라올 소녀는 나타나지 아니했다. 적삼들킨 것이 무안하고 부끄러웠던 것이다. 내가 올 때 아주머니는 오빠가 떠난다고 소녀를 불렀다. 그러나 소녀는 안방에 숨어서 나타나지 아니했다. 아주머니는 "갑자기 수줍어졌니, 얘도 새롭기는."하며 미안한 듯 머뭇머뭇 기다렸으나 이내 소녀는 나오지 아니했다. 나올 때 뒤를 홀낏 홈쳐본 나는 숨어서 반쯤 내다보는 소녀의 빰이 확실히 붉어 있음을 알았다. 그는 부끄러웠던 것이다.

* 부끄러워하는 소녀·부끄러움의 멋과 의미 

 

# 촌수(寸數) : 친족 간의 멀고 가까운 관계를 나타내는 수

# 통내외(通內外) : 먼 친척, 또는 절친한 친구 사이에 남녀가 내외 없이 지냄

# 절척(切戚) : 동성 동본이 아닌 가까운 친척

# 터수 : 서로 사귀는 분수

# 실상 촌수를 따져 가며∼가깝게 지내는 터수라. : 촌수(寸數)가 아주 가까운 친척은 못 되지만 서로 가깝게 지내는 사이라는 의미이다.

# 범절(凡節) : 법도에 맞는 모든 질서나 절차. 모든 행사

# 예모(禮貌) : 예의를 지키는 태도나 행동

# 침선(針線) : 바늘과 실. 곧 바느질하는 일

# 벌써 처녀로서의∼나타내기 시작했다. : 성장기에 있는 여인이 갖추어야 할 교양인 예의 범절과 바느질 및 음식솜씨가 갖추어져 가기 시작했다.

# 패다 : 곡식의 이삭이 생겨 나오다

# 대청(大廳) : 집 몸채의 방과 방 사이에 있는 큰 마루

# 밀국수 : 밀가루로 만든 국수

# 호박눈썹나물 : 호박 껍질을 벗기지 않고 채 썰어 만든 나물

# 깔밋하다 : (모양새나 차림새가) 간단하고 조촐하다. 손끝이 여물다.

# 적삼 : 윗도리에 입는 홑옷

# 곤때 : 겉으로는 그다지 표시 나지 않으나 약간 오래된 때

# 너스레 : 떠벌려 늘어 놓아 주선하는 말솜씨

# 맞은편 벽 모서리에 걸린∼소녀의 분홍 적삼이 : 소녀에 대한 작자의 관심이 환기되는 대목이다. 작자의 사춘기적 감수성이 빛을 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