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향날                       -채만식-   

● 줄거리

최 씨가 외할아버지의 제향날에 찾아와 재미난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외손자 영오에게 부정한 권력에 저항적인 삶을 살았던 자신의 남편 김성배와 아들 김영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김성배는 동학 혁명에 참가하였으나 혁명이 실패하면서 처형당하고 김영수는 3 · 1 운동을 주도하다 실패한 후 쫓기는 몸이 되어 상해로 떠난 뒤 20년 가까이 소식이 없다.

최 씨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김성배의 산소에 갔던 영오의 외사촌 형 상인이 돌아온다. 상인은 영오에게 영원히 받을 고초를 감수하면서도 인간에게 불을 전해 준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이야기해 주며 집안 대대로 간직해 온 불씨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그리고 상인은 볼일이 있다며 대문을 나서는데, 최 씨는 상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상인이 학교만 마치면 고생이 끝날 것이라 흐뭇해한다. 그러자 영오는 최 씨에게 상인이 사회주의라는 것을 한다는 말을 하지만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최 씨는 그저 앞날의 희망만 이야기할 뿐이다.

● 감상 및 이해

이 작품은 1937년에 발표된 채만식의 희곡으로, 구한말에서 1930년대까지 있었던 민족의 수난사를 김성배의 가족사를 통해 그려 내고 있다. 김성배와 그의 아들 김영수는 부정한 권력에 저항하였으나 결국엔 좌절하게 된다. 또한 작품의 결말을 통해 김성배의 손자 김상인의 저항적인 삶 역시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이들과 같이 좌절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더라도 지식인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는 실천 의지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는 것만이 민족의 역사를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이라는 생각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제3막에 삽입된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그가 전해 주는 불씨는 인류에게 이로운 역할을 하며, 최 씨의 대사에 나오는 대를 물리는 불씨와 같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영속성을 상징한다. 봉건적인 왕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김성배, 일제의 권력에 대항한 김영수, 독립운동의 성격과 유사한 면이 있는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김상인 모두 부정적인 세력에 대항하는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 정리하기

갈래 → 희곡, 장막극(3막), 사실주의극

▒ 성격 → 비판적

▒ 인물

* 최 씨 → 남편과 아들의 저항적 삶을 지켜본 관찰자. 영오와의 대화를 통해 극의 중심 내용을 서술하고 해설하는 역할을 한다.

* 영오 → 최 씨의 외손자로 최 씨에게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 김성배 → 제1막의 주인공. 동학 혁명군의 접주로 활약하지만 동학군이 패퇴하고 부친이 자기 대신 잡혀 곤혹을 당하자 자수하여 공개 처형된다.

* 김영수 → 제2막의 주인공. 김성배의 얼굴로, 소지주였던 부친의 가업을 잇다가 3 · 1운동을 도모한 후 일본 관헌에 쫓겨서 중국으로 망명한다.

* 김상인 → 김영수이 아들이자 김성배의 손자. 사회주의 운동을 하며 조부와 부친의 삶의 궤적을 이어간다.

▒ 배경 → 1937년 가을, 최 씨의 집

▒ 출전 → <조광>(1937)

▒ 주제부정적 세력에 대한 투쟁, 이상향 추구의 영속성

▒ 특성

1) 작가의 역사의식이 뚜렷하게 드러남.

2) 과거(김성배와 김상인의 과거 이야기)와 현재(최 씨가 이야기를 서술하는 현재 시점)를 교차하는 방식으로 진행됨. → 사건을 극적으로 제시하는 창(唱)과 사건을 요약 서술하는 아니리가 반복되는 판소리의 이야기 구조와 유사함.

3) '전경-제1막-제2막-제3막'으로 구성됨.

4)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삽입하여 김성배 일가의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함.

 

● 참고자료

◆ '제향날'에서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상징적 의미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 몰래 불을 훔쳐내어 인간에게 전해 주고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신의 분노를 사서 영원히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살을 쪼이는 형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지 않고 의연한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프로메테우스의 외침은 김성배와 김영수의 절규와 같다. 상인이 영오에게 들려주는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김성배와 김영수의 행위를 인류 역사를 위한 헌신으로 여기게 하며 그 가치를 드높이는 장치가 되고 있다.

◆ '제향날'에서 사용된 회상 기법

'회상'은 '제향날'에서 극을 진행하는 주요 기법이다.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포괄적인 이야기를 한 편의 연극으로 만들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채만식은 서술자와 같은 역할(극 중 서술자)로 최 씨 할머니를 설정하고, 최 씨가 손자에게 해 주는 설명에 따라 동학 혁명, 3 · 1운동 등의 사건이 무대에 재현되게 하였다. 이 극은 전체가 3막으로 되어 있는데 별도로 '전경(前景)'이라는 독립된 장면을 설정하고 있다. 바로 이 장면이 최 씨와 손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극 중 현재'에 해당한다.

◆ '제향날'의 희곡으로서의 한계와 가능성

동학금을 지원한 증조부, 동학 접주였던 조부, 3 · 1운동 주동자였던 부친, 주인공인 자신(상인) 등 4대에 걸친 가족사를 다룬 '제향날'은 식민지 현실을 역사 인식 연속선상에서 추구하면서 민족 장래를 상징적으로 모색하는 점에서 눈에 띈다. '제향날'은 남편 제삿날에 상인의 할머니인 최 씨가 외손자인 영오에게 가족사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야기 가운데 친손자인 상인도 가담하여 영오에게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들려준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현실 장면에서 과거사나 신화가 재현되는 회상 장면이 일곱 차례나 반복된다. 과거사나 신화를 같은 방식으로 재현시킨 것은 미숙한 수법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독백이나 설명을 곁들인 최 씨 대사는 속도가 느리고, 회상 장면과 일부 중복되는 내용도 있어, 극적 행동으로는 부자연스럽고 갈등 구조를 취약하게 하는 요인도 없지 않다. 그러나 가족사적인 투쟁이 인간을 구원하려는 프로메테우스의 희생에 비유되고, 미래 독립 국가 건설을 위한 불씨로 상징돼 어린 손자에게 교훈으로 남겨지는 점은 극적 상상력이 극도로 발현된 사실주의 극의 커다란 성과이다. 서사 극에 관한 선구적 시도도 주목할 만하다.

-서연호 · 이상우, "우리 연극 100년" 중에서

◆ 채만식과 극 문학

채만식은 소설가로서 이름을 알렸지만, 꾸준히 극작 활동도 하였다. 특히 일제 강점기의 척박했던 연극계의 환경을 고려하면 그가 창작한 극 문학은 문학사적으로 상당히 비중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채만식은 25편 가량의 작품을 남겼는데 이 중 그가 생존해 있ㅇ르 때 상연된 작품은 '예수가 믿었더면'이 유일하다. 채만식의 작품이 대다수 상연된 바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극 문학은 연극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낳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소설가의 극 작품을 경시하던 당시의 풍토나 당대의 사회 정치적 압력과 검열 때문에 상연이 어려웠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 대본 읽기

 

 

[무대] 배경은 빙원(氷原)과 눈 쌓인 원산(遠山). 무대에는 눈 덮인 빙판, 무대가 밝아지면 중앙에 남녀의 성별이 나지 않게 김생(짐승)의 털가죽으로 몸을 가린 원시인 5, 6인이 한 무더기가 되어 떨고 있고 손에 횃불을 든 프로메테우스(그리스 신화 속 인물), 상수(上手, 객석에서 무대를 보았을 때 무대의 오른쪽)로 서서히 등장.

원시인들

(프로메테우스와 불을 보고 겁을 내어 뒤로 물씬물씬 몰려간다.)

프로메테우스

 

 

무서워하지 마라.(원시인들은 불을 처음 보기 때문에 경계함.) 나는 느이를 구하러 왔느니라. 이 불을 느이를 줄 테니 이것을 받어 가지라.(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게 불을 주는 모습은, 김성배 일가 3대가 부정적인 권력자들에게 저항하며 당대 지식인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연상케함.)

원시인1

그건 무엇이오?

프로메테우스

 

 

 

 

이것은 불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면 치웁지 아니하고 음식을 이것에다가 익혀 먹으면 보드랍고도 맛이 있고 이것을 켜 놓으면 밤에도 모든 것이 보이고, 또 이것으로 쇠를 녹여서는 여러 가지 연장을 만들어 사냥을 할 수 있고, 느이를 침노하는 사나운 짐승들을 대적해서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해서 느이는 겨레가 크게 번성할 것이요 좋은 세상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프로메테우스가 원시인들에게 불을 가져다 준 궁극적인 이유에 해당함.)

원시인2

 

 

대체 그게 무엇이길래 그렇게 좋드람? 어데? (가까이 와서 불을 덥썩 만지다가 질겁하고 물러선다.) 아이구, 어얏? (성을 내어) 그런 독하고 무서운 것을 주면서 우리를 속이려고! (동류를 돌아보고) 손을 대니까 머 끊어지게 아픈 걸, 그래.

프로메테우스

 

 

 

아니다. 그렇게 너무 가까이 대니까 데어서 뜨거운 것이다. 자―― 이것을 받어 가거라. 그러나 이것은 물을 끼얹으면 죽는 법이다.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놓고 거기다 옮겨라. 그리고 어찌해서 영영 꺼져 버리거든 산에 가서 쇳덩이와 돌멩이를 구해서 그것을 마주 부드치면 거기서 조그마한 불이 일어나느니라. 그놈을 마른 풀잎에다가 받어서 불을 장만해라. 자―― 받어 가거라.

원시인 한 사람이 나서서 횃불을 받는다. 프로메테우스, 횃불을 주고 상수로 퇴장.

 

<중략>

무대 급히 암전.(연극에서 무대를 어둡게 한 상태에서 무대 장치나 장면을 바꾸는 일)  다시 밝어지면 도로 전경.(제1막 이전의 무대 배경으로 최 씨와 영오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

상인

그래서.

영오

뭘, 거짓뿌렁! 성냥이 있는데 왜 불이 없어.

상인

아, 그 녀석이! 너 할머니한테 여쭈어 보아라. 옛날에 성냥이 있었는가.

최 씨

 

 

 

 

 

 

없구 말구.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황(黃) 개피허구 부싯돌뿐이었드란다. 그러고 네 말이 근리한 말(이치에 거의 맞는 말)인가 부다. 옛날에는 밤에 화로에 불을 담어 두었다가 그 이튿날이면 그놈으로 불을 아루더니라. 그걸 불씨하고 하지. 어느 집에서는 불씨가 삼대째 내려오느니 사대째 내려오느니 하고, 그러고 그 화로는 그 집 맏며느리가 꼬옥 맡어 두더니라. 그렇게 맡었다가 이튿날 새벽에 불을 이루는데, 혹시 뿔씨를 죽였으면 집안이 망할 징조라고 큰일이 나지. 도루 쫓겨 가기가 십상이었지.(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행동에 담긴 정신이 우리 민족의 삶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온 것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상인

거 봐, 이 녀석아. 내가 거짓말을 했니?

영오

그럼, 자――. (밤 벗긴 것을 준다.)

상인

 

 

 

 

옳――지. (받어먹고) 그런데 말이다. 그 뒤에 하늘에서 하느님이 가만히 내려다보니까 아 인 버러지들이 불을 가지고 있겠지! 아, 그래서 하느님이 그만 노―발대발 역정이 나서 어떤 놈이 내 거룩한 불을 훔쳐다가 저놈들 인버러지를 주었단 말이냐고,(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것이 독단적인 행동이었다는 것과 그가 추궁을 받게 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인제 저것들이 불을 가지고 왼갓 짓을 다 해설랑은 내 턱을 치받으려 들테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고.

[무대] 배경은 멀리 연산(連山)의 산봉우리들. 무대에는 그들 연산 중에 제일 높은 봉이 보이는 바위 하나. 무대가 밝어지면 한쪽 눈이 상하고, 한편 귀가 떨어진 프로메테우스가 굵은 쇠사슬로 팔과 다리를 바위에 비끄러메고 앉어 있다.

프로메테우스

 

 

 

 

 

 

 

(눈을 치뜨고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의를 행한 보과(報果)품!(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이 겪는 끝없는 고통을 보람으로서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의로운 행동에는 희생이 따를 수 있다는 작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의를 이룬 보과품은 영겁의 고초! 죽지 아니하고 영겁토록 받는 고초! 사나운 수리가 살을 쪼아 먹고 까막까치는 눈을 파먹고 귀를 떼어 먹고 그러고도 끊이지 아니하는 극형! (프로메테우스의 절규에 담긴 의미 : 프로메테우스의 절규는 김성배 부자의 절규와 같다. 즉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김성배와 김영수의 행위를 인류 역사를 위한 헌신이라는 가치로 승화하는 장치가 되고 있다. 불씨를 옮겨다 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 세계에 풍요롭고 안락한 생활을 가져다 주었듯이, 어려운 시대에 의를 위해서 투쟁하는 자는 훌륭한 역사를 창조하는 자요, 역사를 이어가는 불씨 같은 존재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천둥소리 우르릉거리고 번개를 친다. 폭우가 내린다. 폭우가 그치고 강풍이 분다. 강풍이 그치고 눈이 내린다.(인물이 처한 극한 상황을 표현함. 감각적인 연출을 통해 관객을 장면에 집중하게 함. 이어지는 대사의 의미를 강조하는 분위기를 형성함. 자연의 변화를 통해 긴 시간이 흐른 것을 보여줌.)

프로메테우스

 

(눈이 내릴 때에) 응, 그래도 나는 의(義)를 이루었노라. 뉘우치지 아니하노라.(영원히 바위에 묶인 채 사나운 독수리에게 살을 쪼이는 형벌을 받아도 의를 이루었으므로 뉘우치지 않는다는 의연한 태도를 보임)

무대 급히 암전. 다시 밝어지면 도로 전경.

최 씨

아이! (혀를 끌끌 찬다.) 불쌍하다.

상인

하하하하, 불쌍해요?

최 씨

그럼, 불쌍하잖니! 언제까지고 그렇게 묶여 앉아 고생을 할 테니!

상인

그런데 얼마 전에 누가 가서 풀어 놓아주었답니다. 할머니.

최 씨

아이, 잘했다. 아무렴, 놓아주어야지.

상인

하하하하. (일어나서 마당으로 내려선다.)

영오

언니, 어데 가우?

상인

나 누구 좀 만나고 오마.

영오

나도 같이 가?

상인

너는 못 오는 데다.

최 씨

일찍 들어와서 저녁 먹어라.

상인

네. (차면(집의 내부가 바깥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도록 앞을 가리는 물건이나 장치)께로 걸어간다.)

최 씨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저것이 뒤태는 여승(영락없이) 제 애비야!

영오

외삼촌?

최 씨

 

그래. 돌아서서 저렇게 걸어나가는 걸 보면 그저 하릴없이 제 애빈 걸! 뒷데숙이(뒤통수)가 볼록 나온 것이며 어깨통이 떡 벌어진 것이며 걸음걸이며. (한숨)

상인

(한 번 돌려다 보고 차면 밖으로 퇴장)

최 씨

 

(방백) 어여 하루 바삐 공부를 다하고 와서 장가나 들고 자식이나 낳고 그래서 편안히 살아가게 해라.(상인이 안락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기를 희망함) 믿느니 믿느니 그것뿐이다. (한숨)

영오

할머니, 할머니

최 씨

오 ―― 냐.

영오

 

그런데 말이유. 우리 선생님도 그러시고 또 우리 반 동무아이도 그러는데 언니가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사회주의 한다고 그러겠지?

최 씨

무엇? 사우주? 그건 무슨 말이라든?(세상 물정에 어두운 최 씨의 면모)

영오

 

 

 

 

나도 모르겠어. 그냥, 이애 영오야! 느이 외갓집 상인이 형은 동경 가서 사회주의 한다지? 그래.(상인이 사회주의를 한다는 것의 의미 : 가정의 안녕과 평화라는 최 씨의 소박한 욕망이 시대를 외면하지 못한 남편과 아들에 의해 좌절되고, 또 다시 손자에 의해 좌절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할아버지 세대로부터 이어져 온 불의에 대한 저항의지가 상인의 사회주의 운동 참여로 인해 대물림될 것이라는 예상은 또 다른 의미에서 희망적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최 씨

 

 

 

 

 

 

 

 

 

 

응. 그럼, 아마 돈없이 고학한다는 말인가 보구나. 그렇다면야 어떻니? 그렇게 고학을 해서라도 공부만 착실히 잘해서 장하게 되어 가지고 잘살면 그만이지.(최 씨는 상인이 사회주의를 한다는 것을 고학한다는 말로 이해하고 있다. 그만큼 최 씨는 세상 물정에는 어두운 인물로, 그저 손자 상인이 착실하게 공부해서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고 있다.) (밤 담겨 있는 그릇을 들여다보고) 인제는 다 깠다. 그새 이애기를 하느라 까는 줄 모르게. (밤을 까서 물에 담근 그릇을 들여다보고) 많이도 깠다. (마지막 까던 밤을 물에다가 담방 담그면서) 내가 옛날 '노구할미'뽄이다. 노구할미가 상전이 벽해되는 것을 보고는 입에 물었던 대추씨 하나를 뱉어 놓고 연해 그런 것이 대추씨가 모여서 큰 산이 되었다더니 나도 이애기를 하는 동안에 밤을 이렇게 많이 까놓았구나!(옛이야기를 통해 상전벽해가 이루어지는 동안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이 오늘날에 이르렀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이는 동학 운동과 3 · 1 운동의 좌절을 나열한 다음 현실 속의 수난을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바깥을 우두커니 내어다보면서) 구름도 허연 게 탐스럽기도 헡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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