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곡(相思曲)                                 - 박인로-

<전략>

춘창(春窓)에 늦게 일어 유회(幽懷)를 둘 데 없어

임풍(臨風) 초창(怊悵)하여 사우(四隅)로 돌아보니

온갖 꽃 다 피어 그린 듯이 고운데

탐화(探花) 봉접(蜂蝶)들은 다투어 다니거든

버들 위에 꾀꼬리는 쌍쌍(雙雙)이 비끼 날아

쫓기거니 따르거니 금(金)북을 던지는 듯

한 소리 두 소리 높으락낮으락

무정(無情)히 울건마는

어찌한 내 귀에는 유정(有情)하게 들리는구나

저 같은 미물(微物)도 자웅(雌雄)을 각각(各各) 생겨

교태(嬌態) 겨워 논다마는

최귀(最貴)한 사람은 대만도 못하구나

박명(薄命) 인생(人生)은 만물 중(萬物中) 불쌍하다

가을밤 채 긴 제 적막(寂寞)한 방(房) 안에

어둑한 그림자 말 없는 벗이 되어

고등(孤燈)을 도진(挑盡)하고 전전반측(輾轉反側)하여

밤중만 어느 잠이 오동비에 깨달으니

구곡(九曲) 간장(肝腸)을 끊는 듯 째는 듯

새도록 끓인다

하물며

풍청(風淸) 월백(月白)하고 삼경(三更)이 깊어 갈 제

동창(東窓)을 더디 닫고 외로이 앉았으니

님의 낯에 비친 달이 한빛으로 밝았으니

반기는 진정(眞情)은 님을 본 듯하다마는

님도 달을 보고 나를 본 듯 반기는가

저 달을 높이 불러 물어나 보고전들

구만리(九萬里) 장천(長天)에 어느 달이 대답하리

묻지도 못하니 눈물질 뿐이로다

어디 뉘 말이

춘풍(春風) 추월(秋月)을 흥(興) 많다 하던게오

어찌한 내 눈에는 다 설워 보인다

봄이라 이러하고 가을이라 그러하니

구수(舊愁) 신한(新恨)이 첩첩(疊疊)이 쌓였구나

천황(天荒) 지로(地老)한들 이내 한(恨)이 그칠 것이냐

몇 백세(百歲) 인생(人生)이 천세우(千歲憂)를 품어 있어

못 보는저 님을 이렇게까지 그리는가

잠시 동안 아주 잊어 팽개쳐 던져 두자

수(數) 있는 이합(離合)을 힘대로 할 것이냐

언약(言約)을 굳이 믿고 기다려는 보려구나

영허(盈虛) 비태(否泰)는 천도(天道)가 자연(自然) 그러하니

초승에 이지러진 달도 보름에 둥글거든

청춘(靑春)에 나눈 거울 이제 아니 모을소냐

기신(其新)도 공가(孔嘉)커든 기구(其舊)가 어떠할 것이니

흰머리 속에 소년정(少年情)을 가져 있어

산수(山水) 갖은 골에 초막(草幕)을 좁게 짓고

용치 못한 생애(生涯)를 유여(有餘)코저 바라겠나

<후략>

 

봄날에 늦게 일어나 그윽한 회포 둘 데가 없어

바람을 맞으니 더욱 슬퍼져 사방을 돌아보니

온갖 꽃들이 다 활짝 피어 그림을 그린 듯이 아름다운데

꽃을 탐하는 벌과 나비는 다투어 날아다니며 봄을 즐기거늘

버들가지 위의 꾀꼬리는 쌍쌍이 비스듬히 날아다니며

서로 쫓기고 따르는 꾀꼬리의 모습이 금북을 던지는 듯하고

한 소리 두 소리가 높았다가 낮았다가 아무 의미 없이 울건마는

어찌하여 내 귀에는 의미 있게 들리는구나

저 같은 미물인 꾀꼬리도 암수로 각각 태어나

서로 아양을 부리며 놀고 있지만 최고로 귀한 인간인 나는 새만도 못하는구나

박명한 인생은 만물 중에서 가장 불쌍하구나

가을밤 아주 길어진 때 적막한 방 안에

어둑한 내 그림자가 말 없는 벗이 되어

외따로 켜 있는 등불의 심지를 돋우어 태우고, 엎치락 뒤치락 잠을 못 이루어

한밤중 오동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깨달으니

구곡간장을 끊는 듯 칼로 째는 듯 밤새도록 애를 끓인다

하물며

바람소리 맑고 달이 밝아 밤이 깊어갈 때

동창을 늦게 닫고 외로이 앉았으니

임의 얼굴에 비추는 달이 같은 빛으로 (나 있는 곳에서도) 밝으니

달을 반기는 마음은 임을 본 듯 반가워할까

저 달을 큰 소리로 불러 물어나 보고 싶지만

아득히 높고 먼 하늘에 어떤 달이 대답할까

묻지도 못하니 눈물만 흐를 뿐이로다

어느 누가 말하기를,

봄 바람 가을 달을 흥이 많다고 했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내 눈에는 다 서러워 보이는가

봄에도 서럽고 가을에도 서러우니

옛날의 근심과 새로운 한이 겹겹이 쌓였구나

오랜 시간이 흐른들 이내 한이 그칠 것인가

몇 백 년을 사는 인생이 천년 뒤를 걱정하며 살아

못 보는 저 임을 이렇게까지 그리워 하는가

(임 생각을) 잠시 동안 아주 잊어 팽개쳐 던져 두자

운명으로 정해진 헤어지고 만남을 내 힘으로 바꿀 수 있겠느냐

임과 했던 약속을 굳게 믿고 기다려 보겠노라

하늘이 정해 준 운수가 자연히 그러하니

초승에 이지러진 달도 보름에는 둥글게 되는데

청춘 시절에 정표로 나누어 가진 거울 이제 아니 모으겠느냐

신혼 때 그토록 즐거웠는데, 오래 된 옛정은 지금이야 어떠하랴

몸은 늙었지만 어린 시절의 마음을 지니고 있어

산수 간 골짜기에 초가집을 작게 짓고

용하지 못한 삶에 여유까지 바라겠는가

 [주요 어구 풀이]

  • 초창 : 한탄스러우며 슬픔.
  • 사우 : 사방
  • 채 긴 제 : 아주 길어진 때
  • 고등을 도진하고 : 외따로 켜 있는 등불의 심지를 돋우어 태우고
  • 구수 신한 : 옛날의 근심과 새로운 한스러움
  • 천황 지로한들 : 오랜 시간이 흐른들
  • 영허 비태 : 천체의 빛이 그 위치에 의하여 증감하는 현상으로서 가득 참과 이지러짐, 막힌 운수와 터진 운수로서 불행과 행복을 아울러 이르는 말
  • 기신도 공가커든 기구가 어떠할 것이니 : 신혼 때 그토록 즐거웠는데 오래된 옛정은 지금이야 어떠하랴

 [감상 및 해설]

<상사곡>은 제목 아래 '상주영감영작'이라는 협주(夾註)가 있으므로 상주 영감의 영(令)을 받고 지은 것으로 보인다. 1690년에 한음 가문에서 '상주 영감'이라고 부를 만한 인물은 상주 목사를 지낸 이여규이다. 이여규는 상주에 도임하자 선친(先親)과 각별했던 노계를 상주로 초청하였고, 선가자(善歌者,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 노계에게 가사 한 편을 청했을 것이다. 충효사상이 투철했던 노계는 자연스럽게 연군가사인 정철의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떠올리며 연군의 정을 노래한 <상사곡>을 지었을 것이다. 이는 105행 222구 1,520여 자의 충신연주지사로, 10개의 단락 또는 기승전결의 구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임과 이별한 장부가 임을 절절히 그리워하는 형식을 빌려 변함없는 연군의 정을 구구절절이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상사곡>이 발굴됨으로서 가사문학 작가로서의 노계의 위상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으며, 정철의 전후미인곡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단락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부가 임을 절절히 그리워하는 형식을 빌려 변함없는 연군의 정을 읊은 충신연주지사로, 박인로의 가사 작품 중의 하나이다. <노계가집(경오본)>에 실린 작품으로, 임과 이별한 화자의 처지, 이별의 안타까움과 임에 대한 그리움, 임과의 재회를 바라는 심정, 그리고 임에 대한 변함없는 일념을 드러내고 있다.

 [핵심 정리]

◆ 갈래 및 형식 : 노계가사, 서정가사, 연군가사, 충신연주지사

◆ 특성

* 이덕형의 변함없는 연군의 정을 박인로가 노래한 충신연주지사임.

* 군신관계를 남녀관계에 빗대어 우의적으로 형상화함.

* 사랑하는 임과 이별한 장부가 화자로 등장함. → 남성 화자는 임을 잊지 못해 그리워하지만 상대방인 임은 소식조차 끊어 버린 상태임.

* 임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결여됨. → 임은 지상계에 존재하는 여성이라는 사실만 드러나 있을 뿐, 그 밖의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음.

* 화자는 버림받은 자신의 처지를 매우 비관하며 한탄함.

* 이별의 이유가 다소 막연하게 제시됨. → 다른 연군가사에서는 이별하게 된 이유가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데 반해, <상사곡>에서는 구체적인 이별의 이유를 화자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남.

* 한자어구와 전고(典故)의 빈번한 사용 → 표현이나 어구가 상당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작품 전체의 관념성을 더욱 강화하고 있음.

* 안빈낙도의 태도를 견지하며 성리학적 이념을 신봉하는 것으로 작품을 끝맺음.

* <상사곡>의 결말 → 임에 대한 그리움과 이별의 슬픔으로 절망하던 화자는 돌연 낙관적인 태도로 돌변한다. 문맥상 그 어떤 필연적인 계기도 제시하지 않은 채 화자는 비탄에 젖어 있다가 돌연 인생을 달관한 듯한 태도를 취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임과의 언약을 긍정하는 태도로의 급격한 변화는 어떤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근거의 제시도 수반하지 않고 있어 지극히 공허하고 관념적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 주제 : 변함없는 연군의 정

◆ 구성

* 1~19행 : 새만도 못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함.

* 20~46행 : 방 안에 외로이 앉아 임을 그리워하면서 서러움과 한을 느낌.

◆ 출전 : <노계가집>(경오본)

 [참고하기]

◆ <상사곡>의 전체 구성

* 1단락 → 임과 이별한 작중 화자의 처지

* 2단락 → 임을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

* 3단락 → 상사병이 고칠 수 없을 정도로 깊음.

* 4단락 → 임과 처음 인연을 맺었을 때를 떠올리며 지금의 이별한 처지를 슬퍼함.

* 5단락 → 가슴에 피어나는 수심(愁心)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는 심정

* 6단락 → 10년 전의 맹세를 생각하며 임에 대한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을 다짐함.

* 7단락 → 봄날에 느끼는 그윽한 회포

* 8단락 → 가을 달밤에 느끼는 슬픈 심회(백거이의 <장한가>를 인용)

* 9단락 → 임과의 재회를 바라는 심정

* 10단락 → 안분지족과 임에 대한 변함없는 일념

 

◆ 노계 박인로의 문학사적 위치

노계 박인로는 조선시대 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의 4대에 걸쳐서 생존했던 문인 중의 한 사람이다. 조선 시대의 역사를 임지왜란을 분수령으로 해서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는데, 그렇게 본다면 박인로는 조선 시대 전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살다간 인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박인로(1561~1642)가 살다간 시기는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겪었던 시기이니만큼, 사회적으로 혼란하기 이를 데 없었고 경제적으로 궁핍하기 이를 데 없었던 시기였다. 이처럼 험난했던 시절에 그는 직접 전쟁에 참가하여 전투를 하는 무부(武夫) 생활을 했고, 전쟁 후에는 무과(무과)에 급제하여 미관말직을 지내었고, 은퇴 후에는 사서삼경과 성리학에 잠심하는 유자(儒者) 생활을 했다. 특히 그의 유저 <노계집> 제3권에 있는 국문시가들은 그 양적인 면이나 질적인 면에서 우수성을 인정받아 송강 정철(1536~1593)과 고산 윤선도(1587~1671)와 더불어 조선시대의 3대 시인이란 칭호를 듣게 되었다.

박인로는 상당수의 국문 시가를 남기며 일찍부터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함께 주목 받아왔으며 그의 문학적 성과에 대한 평가는 대개 이들과의 비교를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가사와 시조의 어느 면에서도 탁월한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박인로와 정철, 윤선도를 평면적으로 비교, 평가하는 것은 각자의 정치적, 사회적 처지가 상이했음을 생각할 때 거의 무의미하다. 정철과 윤선도는 당대의 명문거족으로 몇 번의 정치적 좌절을 체험했다 하더라도 중앙 정계에 깊이 관여한 전형적 사대부임에 반하여, 박인로는 몰락한 양반으로 궁벽한 지방에서 평생을 곤궁하게 살면서 자신이 신봉한 유가의 이념과 그 실천을 제약하는 현실 사이에서 심각하게 고민한 한 인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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