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우 (久雨)                              - 정약용-


          窮居罕人事(궁거한인사)

          恒日廢衣冠(항일폐의관)

          敗屋香娘墜(패옥향낭추)

          荒규腐婢殘(황규부비잔)

          睡因多病減(수인다병감)

          秋賴著書寬(추뢰저서관)

          久雨何須苦(구우하수고)

          晴時也自歎(청시야자탄)

             

            궁벽하게 사노라니 사람 보기 드물고

            항상 의관도 걸치지 않고 있네.

            낡은 집엔 향랑각시 떨어져 기어가고,

            황폐한 들판엔 팥꽃이 남아 있네.

            병 많으니 따라서 잠마저 적어지고

            글 짓는 일로써 수심을 달래 보네.

            비 오래 온다 해서 어찌 괴로워만 할 것인가.

            날 맑아도 또 혼자서 탄식할 것을.

             

 [ 이해와 감상 ]

이 시는 장마철의 농촌을 배경으로 가난한 삶을 살아가는 선비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 벼슬길에서도 멀어져 찾아오는 이도 없고, 의복은 남루한데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있는 상황이다. 집안에는 향랑각시(노래기)가 기어 다니고 들판은 황량한 모습이니 글을 지어 울적한 심정을 달래는 선비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가난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뻔히 알고 있지만, 자신에게 힘이 없어 괴로워해야 하는 작자의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그러니 차라리 비가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가져 보는 것이다. 가난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그런 현실 속에서 무기력하기만 한 자신에 대한 한탄이 담겨 있다.

마지막 두 연은 참으로 서글픈 느낌을 주기도 한다. 날이 개어도 뭐 달라질 것이 있겠느냐는 체념은 아마도 혼탁한 세상에 대한 저랑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오래 계속되는 비는 기약없는 유배생활을 뜻하고, 개인 날은 유배에서 풀려날 미래를 의미하는 것이겠는데, 귀양살이를 마친다고 장밋빛 세상이 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선생의 근심은 자기 자신의 영달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각박한 세상살이에 허덕이는 민초들의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대한 포부를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아닌 바에야 궂은들 개인들 거기가 거기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구절풀이>

* 궁벽하게 사노라니 사람 보기 드물고, 항상 의관도 걸치지 않고 있네. : 벼슬살이를 하지 않는 선비이기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 쓸쓸하게 보내는 모습을 표현했다.

* 낡은 집엔 향랑각시 떨어져 기어가고, 황폐한 들판엔 팥꽃이 남아 있네. : 장마철에 집도 낡은데다가 습기가 많아 노래기만 여기저기 기어다니고 들판에는 팥꽃만 남아 있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 병 많으니 따라서 잠마저 적어지고, 글 짓는 일로써 수심을 달래 보네. : 아무런 기쁨도 없는 자신의 삶을 한탄하고 있다. 병은 점점 몸을 옥죄어 오고 잠조차 적어지는 상황이다 보니 무료한 일상을 달래는 것은 오직 글 짓는 일뿐이다.

* 오랫동안 비 온다 해서 어찌 괴로워만 할 것인가, 날 맑아도 또 혼자서 탄식할 것을 : 화자가 탄식하며 괴로운 것은 단지 비가 오랫동안 내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조금도 혁파되지 못하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 처참한 가난 속에서 신음하는 백성들, 지식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현실 앞에서 무기력한 자아 등등의 복합적인 이유로 시인은 괴로울 따름이다.

 [ 요점정리 ]

■ 형식 : 한시. 5언 율시

■ 구성

♠ 1~2행 : 벼슬길에 멀어져 찾아오는 이도 없고 의복은 남루함.

♠  3~4행 : 집 안에 노래기 기어 다니고 들판은 황량함.

♠  5~6행 : 가난한 백성들을 도와줄 수 없어 수심에 싸임.

♠  7~8행 : 백성들의 생활고는 흐린 날 뿐 아니라 맑은 날에도 계속 되어 한스러움.

■ 표현 : 대구법, 영탄법

■ 출전 : 여유당전서

주제 : 장마철 궁핍한 농촌 현실에 대한 비판

 [ 참 고 ]

 ■ 정약용

조선후기의 학자 · 문신으로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 · 송보, 호는 다산 · 여유당, 가톨릭 세례명은 요안, 시호는 문도이다.

광주 출생으로 1776년(정조 즉위) 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해서, 이듬해 이가환 및 이승훈을 통해 이익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이 되었으나, 가톨릭 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의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 현감 서용보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 사건에 둘째 형 약전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1) 신유교난 때 장기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 기슭에 있는 윤박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 체계는 유형원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을 대표로 하는 부각파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 · 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 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 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 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마과회통><모시강의><매씨서평><상서고훈><상서지원록><상례사전><사례가식><악서고존><주역심전><역학제언><춘추고징><논어고금주><맹자요의> 등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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