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의 시(倡義詩)                               - 최익현-


          皓首奮견묘 (호수분견묘)

          草野願忠心 (초야원충심)

          亂賊人皆討 (난적인개토)

          何須問古今 (하수문고금)

             

              백발로 밭이랑에서 분발하는 것은

              초야의 충심을 바랐음이라.

              난적은 누구나 쳐야 하니,

              고금을 물어서 무엇하리.

               

 [ 이해와 감상 ]

이 작품은 구한말에 씌어진 최익현의 의병 관계 투쟁 경과를 담은 글인 <면암선생창의전말>에 실려 전한다. 창의시란 곧 나라의 어려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키는 시라는 뜻이 된다. 내용은 나이와 관계없이 또한 살고 있는 장소에 관계없이 모두가 왜적을 물리치는 일에 앞서 나가야 할 것을 강조하는 의기가 담겨 있다.

늙은 노인이 초야에 묻혀 살아도 그 충성심은 오래도록 잊지 않고 살기를 바란다는 마음으로, 현재의 작자 자신의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왜적을 만나면 구구하게 옛일을 들추어내지 말고 마땅히 알아서 스스로 하자는  '의(義)'를 노래한다.

연륜의 나이를 가진 만큼, 이제 남은 여생을 나라와 작자 자신을 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려는 노인의 의지가 돋보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애국 계몽 문학이자, 항일 문학의 대표적인 시문으로 계승되고 있다. 의병장들의 작품에는, 한문학의 고식적(姑息的)인 표현의 인습을 버리고 역사적 삶의 경험과 투쟁 의식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특징이 있다. 이 작품에도 장쾌(壯快)한 선비 정신이 드러나 있으며, 의병을 일으켜야 하는 취지가 선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 요점 정리 ]

형식 : 한시, 오언 절구, 애국 계몽시

구성

* 1~2행 : 초야에 묻혀 분발함.

* 3~4행 : 난적을 치는 일의 당위성 - 투쟁 의식

제재 : 창의(나라의 어려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키는 것)

주제 : 의병에 가담하여 적을 물리치자는 강한 의지

출전 : <면암선생창의전말(勉庵先生倡義顚末)>

 [ 참고 ]

최익현에 대해서 > :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 · 지사(志士)

본관 경주(慶州). 자 찬겸(贊謙). 호 면암(勉庵). 경기 포천(抱川) 출생. 김기현(金琦鉉)·이항로(李恒老) 등의 문인(門人).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수봉관 ·지방관 ·언관 등을 역임하며 강직성을 드러내 불의 ·부정을 척결하여, 관명을 날리고, 1868년(고종 5)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873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기용되자 명성황후(明成皇后) 측근 등 반(反)흥선 세력과 제휴, 서원(書院) 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 왕의 친정(親政), 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이듬해 명성황후 척족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5조(條)로 된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되었으며 1879년 석방되었다. 1895년에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다 투옥되었다. 1898년(광무 2)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고 뒤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의정부 찬정(贊政)·경기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1904년 러 ·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借款) 금지, 외국에 대한 의부심(倚附心) 금지 등을 상소하여 친일 매국도배들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당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쓰시마섬[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유소(遺疏)를 구술(口述), 임병찬에게 초(抄)하여 올리게 한 뒤 굶어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문집에 《면암집(勉庵集)》(합 48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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