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亂中日記)                                  - 이순신 -

● 본문

을미년(1595년) 7월

1일

잠깐 비가 내렸다. 나라 제삿날(인종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고 홀로 누대에 기대고 있었다. 내일은 돌아가신 부친의 생신인데, 슬픔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동량(棟樑, 기둥과 들보를 아울러 이르는 말)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사직(왕실과 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충신으로서의 면모)

2일

맑음. 오늘은 돌아가신 아버님의 생신이다. 슬픔에 젖어 생각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효자로서의 면모). 늦게 활 열 순(활을 쏠 때에 각 사람이 화살을 다섯 대까지 쏘는 한 바퀴)을 쏘았다. 또 철전(무쇠로 만든 화살을 통틀어 이르는 말) 다섯 순을 쏘고 편전(총통에 넣어서 쏘는, 하나로 된 화살) 세 순을 쏘았다.

3일

맑음. 아침에 충청 수사에게로 가서 문병하니 많이 나았다고 한다. 늦게 경상 수사가 이곳에 와서 서로 이야기한 뒤에 활 열 순을 쏘았다. 이경(밤9시~11시)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긴 하나 밥맛이 쓰시다고 한다. 매우 걱정이다.(효자로서의 면모)

4일

맑음. 나주 판관이 배를 거느리고 진으로 돌아왔다. 이전(李筌) 등이 산 일터에서 노(櫓) 만들 나무를 가져와 바쳤다. 식후에 대청으로 나갔다. 미조항 첨사와 웅천 현감이 와서 활을 쏘았다. 군관들이 활쏘기를 시합하여 향각궁(鄕角弓)을 상으로 걸었는데 노윤발이 일등을 차지하였다. 저녁에 임영, 조응복이 왔다. 양정언은 휴가를 얻어 돌아갔다.

5일

맑음.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보았다. 늦게 박 조방장(주장을 도와서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장수), 신 조방장이 왔다. 방답 첨사가 활을 쏘았다. 임영은 돌아갔다.

6일

맑음. 정항(鄭沆), 금갑도 만호, 영등포 만호가 와서 만났다. 늦게 나가 공무를 보고 활 여든 순을 쏘았다. 종 목년이 고음내(古音川)에서 왔는데, 그 편에 어머님께서 평안하시다는 것을 알았다.

7일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경상 수사, 두 조방장과 충청 수사가 왔다. 방답 첨사, 사도 첨사 등에게 편을 갈라 활을 쏘게 했다. 경상 우병사(김응서)에게 유지(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던 글)가 왔는데, "나라의 재앙이 참혹하고 원수가 사직(나라 또는 조정을 이르는 말)에 남아 있어서 귀신의 부끄러움과 사람의 원통함이 온 천지에 사무쳤건만, 아직도 요사한 기운을 재빨리 쓸어 버리지 못하고 원수와 함께 한 하늘을 이는 분통함을 모두 절감하고 있다. 무릇 혈기 있는 자라면 누가 팔을 걷고 절치부심(몹시 분하여 이를 갈며 속을 썩임)하여 그놈의 그 살을 찢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경은 적과 마주하여 진을 치고 있는 장수로서 조정이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함부로 적과 대면하여 감히 도리에 어긋난 말을 지껄이는가. 또 누차 사사로이 편지를 보내어 그들을 높여 아첨하는 모습을 보이고 수호(修好, 나라와 나라가 서로 사이좋게 지냄), 강화하자는 말을 하여, 명나라 조정에까지 들리게 해서 치욕을 끼치고 사이가 벌어지게 했음에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도다. 마땅히 군법으로 다스려도 아까울 것이 없거늘, 오히려 관대히 용서하고 돈독히 타이르며 경고하고 책망하기를 분명히 하였다. 그런데도 미혹한 것을 고집하기를 더욱 심하게 하여서 스스로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드니, 나는 몹시 해괴하게 여겨져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이에 비변사(조선 시대에 군국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아)의 낭청 김용을 보내어 구두로 나의 뜻을 전하니, 경은 그 마음을 고치고 정신을 가다듬어 후회할 일을 남기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니, 놀랍고도 황송한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김응서란 어떠한 사람이기에 스스로 회개하여 힘쓴다는 말을 들을 수가 없는가. 만약 쓸개 있는 자라면 반드시 자결이라도 할 것이다.

8일

맑음. 식후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영등포 만호, 박 조방장이 와서 만났다. 우수사의 군관 배영수가 그 대장의 명령을 가지고 와서 군량 스무 섬을 빌려 갔다. 동래 부사 정광좌가 와서 부임했다고 보고하기에 활 열 순을 쏘고 헤어졌다. 종 목년이 돌아왔다.

9일

맑음. 오늘은 말복이다. 가을 기운이 서늘해지니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매우 많다. 미조항 첨사가 와서 만나고 갔다. 웅천 현감, 거제 현령이 활을 쏘고 갔다. 이경에 바다의 달빛이 수루에 가득 차니, 가을 생각이 매우 어지러워 수루 위를 배회하였다.

10일

맑음. 몸이 몹시 불편하다. 늦게 우수사를 만나 서로 이야기했다. 군량이 떨어졌다는 말을 많이 하였으나 달리 계책이 없었다. 매우 걱정스럽다. 박 조방장도 왔는데, 술 몇 잔을 마시고 몹시 취했다. 밤이 깊어 수루 위에 누웠더니 초승달 빛이 수루에 가득하여 갖은 생각을 이길 길이 없다.

11일

맑음. 아침에 어머님께 편지를 쓰고, 또 여러 곳에 편지를 써 보냈다. 무재(武才), 박영(朴永)이 신역(身役) 때문에 돌아갔다. 나가 공무를 보고, 활 열 순을 쏘았다.

12일

맑음. 아침 식사 후에 경상 우수사가 와서 만났다. 그와 함께 활 열 순, 철전 다섯 순을 쏘았다. 해질 무렵 서로 회포를 풀고 물러갔다. 가리포 첨사도 와서 함께 했다.

13일

맑음. 가리포 첨사와 우수사가 함께 왔는데 가리포 첨사가 술을 바쳤다. 활 다섯 순, 철전 두 순을 쏘았는데 나는 몸이 몹시 불편했다.

14일

늦게 갬. 군사들에게 휴가를 주었다. 노곧 만호 송여종을 시켜 죽은 군졸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쌀 두 섬을 주었다. 이상록, 태구련, 공태원 등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하니 흔행한(기쁘고 다행한) 마음 그지없다.

● 감상 및 이해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부터 시작하여 전쟁이 끝나는 순간을 앞에 두고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까지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까지 전쟁 중에 있었던 7년 간의 일을 기록한 일기다. 본래 충무공 이순신은 다만 일기를 썼을 뿐, 거기에 어떤 이름을 붙였던 것은 아니며, 정조 때에 이르러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의상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여 권5에서 권8에 걸쳐 수록한 다음부터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순신은 국난을 극복해 낸 수군사령관으로서, 엄격하고도 지적인 진중 생활을 평이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 정리하기

갈래 → 고전 수필, 일기문

성격 → 사실적, 체험적, 서사적

특성

1) 시간의 흐름에 따른 추보식 구성

2) 개인적인 체험뿐만 아니라 전쟁 전의 상황과 임진왜란 당시의 전황을 알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임.

주제나라에 대한 걱정과 충성심 그리고 효심

출전 → <이충무공전서>

● 참고자료

◆ <난중일기>의 구성

-. 임진년(선조 25년 : 서기 1592년(48세)) / 1592년 1월 1일 ~ 8월 27일.  임진년 4월 12일에 거북선을 완성하고 시범 항해를 하자 하루 뒤인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남. 제1차 옥포해전, 제2차 당포해전, 제3차 한산도 대첩, 제4차 부산대첩에서 승리를 거둠.

-. 계사년(선조 26년 : 서기 1593년(49세)) / 1593년 2월 1일 ~ 9월 14일.  장기전에 대비하여 군무에 정진, 수만 석의 군량을 확보하고 전선을 만들었으며 각종 무기를 준비함.

-. 갑오년(선조 27년 : 서기 1594년(50세)) / 1594년 1월 1일 ~ 11월 28일.  군무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전염병으로 죽은 군사와 백성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주고 글(제문)을 지어 위로해 줌.  10월에는 장문포의 왜군을 수륙 연합으로 협공하여 승리함.

-. 을미년(선조 28년 : 서기 1595년(51세)) / 1595년 1월 1일 ~ 12월 20일.  나라는 휴전상태에 들어갔으나 이순신은 한산도 진에서 항상 바쁘게 생활함. 군량을 준비하고 군사를 훈련시켰으며, 전선을 정비함.

-. 병신년(선조 29년 : 서기 1596년(52세)) / 1596년 1월 1일 ~ 10월 11일.  일기 도처에 어머님에 대한 걱정이 나타나 있음.

-. 정유년(선조 30년 : 서기 1597년(53세)) / 1597년 4월 1일 ~ 12월 30일.  왜가 다시 침략함. 선조대왕은 이순신에게 출병할 것을 명하였으나 일본 측의 간계를 꿰뚫어 본 이순신은 본영을 벗어날 수 없었음. 이로 인하여 공은 옥에 갇힘. 28일의 옥고를 치르고 전쟁터에 나감. 명량대해전

-. 무술년(선조 31년 : 서기 1598년(54세)) / 1598년 1월 1일 ~ 11월 17일.  노량해전.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함.

 

◆ <난중일기>의 가치

①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상황을 가장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일기로서, 전란 전반을 살피는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와 나라를 구해낸 영웅의 인간상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② 생사를 걸고 싸우던 당시의 군대 안의 일기로서 그 생생함이 더욱 돋보인다.

③ 그 당시의 정치 · 경제 · 사회 · 군사 등의 여러 부문에 걸친 일들과 수군의 연구에 도움을 준다.

④ 충무공의 꾸밈없는 충 · 효 · 의 · 신을 보여주는 글이라는 점에서 후세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

⑤ 무인의 글답게 간결하고도 진실성이 넘치는 문장을 볼 수 있어 예술적 가치도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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