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십이곡 발(跋)                   - 이황 -

● 본문

이 '도산십이곡'은 도산 노인(이황 자신을 객관화한 호칭)이 지은 것이다. 노인이 이 시조를 지은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 동방의 가곡은 대체로 음와(淫蛙, 음란하고 음탕함)하여 족히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저 '한림별곡'과 같은 류는 문인의 구기(口氣, 말씨)에서 나왔지만 긍호(矜豪, 교만과 허세)와 방탕에다 설만(褻慢, 행동이 무례하고 거침)과 희압(戱狎, 희롱하고 업신여김)을 겸하여 더욱이 군자로서 숭상할 바 못 되고, 다만 근세에 이별(李鼈)이 지은 '육가(六歌)'란 것이 있어서 세상에 많이들 전한다. 오히려 저것(육가)이 이것(한림별곡)보다 나을 듯하나, 역시 그 중에는 완세불공(琓世不恭, 세상을 희롱하고 공손하지 못함)의 뜻이 있고 온유돈후(溫柔敦厚, 마음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를 뜻함)의 실(實)이 적은 것이 애석한 일이다.

▶ '도산십이곡'을 지은 이유

노인이 본디 음률을 잘 모르기는 하나, 오히려 세속적인 음악을 듣기에는 싫어하였으므로, 한가한 곳에서 병을 수양하는 나머지에 무릇 느낀 바 있으면 문득 시로써 표현을 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시(한시를 가리킴)는 옛날의 시와는 달라서 읊을 수는 있겠으나 노래하기에는 어렵게 되었다. 이제 만일에 노래를 부른다면 반드시 이속(상스럽고 속됨)의 말(우리 국어)로써 지어야 할 것이니, 이는 대체로 우리 국속(國俗, 우리말을 가리킴)의 음절이 그렇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 '도산십이곡'이 국문인 까닭

그러기에 내가 일찍이 이별의 노래(육가)를 대략 모방하여 '도산육곡'을 지은 것이 둘이니, 기 일(其一)에는 '지(志, 자연을 벗하며 사는 자세)'를 말하였고, 기 이(其二)에는 '학(學), 학문의 즐거움과 자세)을 말하였다. 아이들로 하여금 조석으로 이를 연습하여 노래를 부르게 하고는 궤(机, 책상)에 비겨 듣기도 하려니와,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래를 부르는 한편 스스로 무도(舞蹈, 춤을 춤)를 한다면 거의 비린(鄙吝, 비루하고 인색함)을 씻고 감발(感發, 감동하여 분발함)하고 융통할 바 있어서, 가자(歌者)와 청자(聽者)가 서로 자익(資益, 사람의 근본 바탕에 유익함)이 없지 않을 것이다.

▶ '도산십이곡'의 내용과 가치

돌이켜 생각건대, 나의 종적이 약간 이 세속과 맞지 않는 점이 있으므로 만일 이러한 한사(閑事, 쓸데없는 일)로 인하여 요단(시끄러운 일)을 일으킬는지도 알 수 없거니와, 또 이것이 능히 강조(腔調, 음악의 곡조)와 음절에 알맞을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일건(一件)을 써서 서협(글을 간직하는 상자) 속에 넣어 간직하였다가, 때때로 내어 완상(玩賞, 즐겨 구경함)하여 스스로 반성하고, 또 다른 날 이를 읽는 자의 거취(去取, 버림과 취함)의 여하(如何)를 기다리기로 한다.

가정(嘉靖, 중국 명나라의 연호) 44년(1565) 을축년 3월 16일 도산 노인은 쓴다.

▶ '도산십이곡'을 지은 감회와 쓴 날짜

● 감상 및 이해

퇴계 이황이 '도산십이곡'을 짓게 된 이유를 밝힌 글이지만, 우리나라의 시가를 도학자의 문학관에서 평하는 평론적 성격이 짙은 글이다.

이 글은 '도산십이곡'과 같은 우리말 노래를 짓게 된 연유를 밝히고, 우리 나라의 시가를 평하는 글로서, 이 글을 통해 이황의 유교적인 문학관을 엿볼 수 있다. 음탕하고 완세불공하는 시가는 가치가 없다고 평하면서, 문학과 시가는 내용상 교육적이어야 하고, 노래를 불러 감정을 유발하여 마음을 순화시킬 수 있어야 하므로, 노래를 부를 수 없는 한시보다는 우리말로 되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시조가 더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이 글에는 문학을 재도지기(載道之器 : 도덕적 가치를 담는 그릇이라는 뜻으로 '문학'이나 '시'를 말함)로 보는 효용론적 문학관이 담겨 있다. 또한, 이 글에는 문학의 가치에 대한 견해가 드러나 있으므로 평론적 성격이 강한 글로 평가할 수 있다.

● 정리하기

갈래 → 고전 수필, 비평문, 발문(跋文)

성격 → 비평적, 객관적

특성

1) 객관적인 입장으로 서술함.

2) 효용론적 관점의 문학관이 나타남.

주제'도산십이곡'을 지은 이유와 감회

출전 → <퇴계집>(선조, 1565년)

● 참고자료

◆ 중세후기의 비평문학

국문학에서 비평의 발생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시에 대해 비평적 관심이 비롯된 것은 고려 시대부터이다. 문헌상으로는 이인로의 <파한집>이 시에 대한 비평적 시각을 보여 준 첫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어서 이규보의 <백운소설>, 최자의 <보한집>, 이제현의 <역옹패설>을 거쳐 조선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들 비평 문학은 그 문학관의 측면에서  살필 때 '재도론(載道論)'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재도'란 '도를 싣는다'는 뜻으로서, 문학을 인간의 성정을 교화하는 계몽적 성격으로 파악하고 있다. 한편, 고려에서 출발한 비평 문학은 중세 후기까지는 그 연장선상에 놓인 모습을 보인다. 서거정의 <동문선>, <동인시화>, 성현의 <용재총화> 등이 그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을 통해 나타나는 문학관 역시 재도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 이별(李鼈)의 '육가(六歌)'

이별은 이제현의 후손이자 박팽년의 외손이다. '육가'는 본래 6수로 된 시조로,  4수만 한역되어 전한다. 그 내용은, 어려운 시대 상황에서 세상을 떠나 은거하는 선비의 입장에서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를 질타하고 풍자한 것이다.

◆ '도산십이곡 발'에 나타난 이황의 작가적 견해

이 글에는 우리 시가와 문학에 관한, 성리학자 이황의 작가적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한시를 최고로 여기던 조선의 유학자들이 왜 우리말로 시조를 지었고, 또 그 속에 어떤 내용을 담기를 원했으며, 문학의 기능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이황은 우선 우리 나라의 과거 시가 문학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한림별곡'과 같은 것은 음탕하고 교만에 차서 군자가 숭상할 바가 못 된다고 하였으며, 이별의 '육가'는 '한림별곡'에 비해 나으나 세상을 희롱하려는 뜻이 있고 온유돈후한 뜻이 부족하여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까닭에, 자신이 음률을 잘 모르지만 굳이 '도산십이곡'과 같은 작품을 지으려 했다고 말한다. 또한, 심성을 길러 주기엔 한시가 적절하겠으나 그것은 노래로 부를 수 없다는 점, 시는 노래로 부를 때 비로소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말로 시조를 지어야 하겠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견해는, 문학은 도학(道學)과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시조야말로 문학이 추구해야 할 온유돈후의 성격을 십분 발휘하기에 적절한 형식이라고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공자가 말한  '사무사(思無邪 : 마음이 올바르고 조금도 그릇됨이 없음)'의 경지에 이르는 데 시조가 효과적임을 밝힌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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