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중 록(恨中錄)                          - 혜경궁 홍씨 -

● 줄거리

‘한중록’은 모두 네 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혜경궁 홍씨의 어린 시절과 세자빈이 된 이후 50년 간 궁궐에서 지낸 이야기를 하는데, 사도 세자의 비극은 말하지 않고 넘어간다. 제2편과 제3편은 친정 쪽의 누명이 억울함을 말하는 내용이다. 제4편에서 비로소 사도 세자 참변의 진상이 기록되었다.

  혜경궁 홍씨의 탄생할 즈음 오랜 근심 끝에 영조는 세자를 얻는다. 영조는 동궁의 주인이 생긴 것을 기뻐하여 어린 나이의 세자를 난 지 백일 만에 동궁전으로 보낸다. 선왕조의 대인으로 위세가 등등했던 동궁 나인들이 영빈이씨(세자의 생모)를 업신여기자 영조와 선희궁은 동궁에 가고 싶어도 점점 피하게 되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 영조의 발걸음이 점점 멀어지던 중 영조가 병적으로 사랑했던 화평옹주가 아이를 낳다가 출산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죽고 만다. 사랑하는 딸을 잃은 영조와 선희궁은 비탄에 바져 세자에게 무관심하게 되고, 그 사이에 세자는 공부에 태만한 채 무술과 사랑놀음을 즐기게 된다.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조는 어린 나이의 세자를 다정히 불러 교훈하기보다는 많은 이들이 있는 곳에서 꾸중을 하고 세자를 미워한다.

  부자간의 성격차로 인해 부왕이 점점 부서워진 세자는 공포증에 걸려 불안함과 신경증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자간의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자 세자는 강박증에 걸려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부왕께 꾸지름을 듣고 나면 세자는 이 화를 다스리지 못해 궁중 나인들을 심하게 때리고 살인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한편 후궁들을 불러 퇴폐적이고 방탕한 주연을 베풀곤 한다.

  어느날 땅 속을 파서 밀집을 만든 후 그곳에서 기거하게 되는데, 이 사실을 나경언이 모두 영조께 고해 바쳐 영조의 화가 극에 달한다. 한편 화평옹주를 잃고 오로지 세자만을 바라보며 살던 선희궁은 세자의 발작증세를 여러 번 경험하고 영조를 종용한다. 세자를 폐위하고 죽이기로 결심한 영조는 세자를 마당으로 내쫓은 후 뒤주를 가져오라고 시켜 그 속에 가두게 한 후 죽게 만든다. 이 후 혜경궁 홍씨의 선친과 친정이 화를 입는다. 정조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선친과 모친에게 지극한 효성을 보인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한탄하면서 이야기를 마친다.

해         설

● 이해 및 감상

남편 사도 세자의 참살 사건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생애를 사소설체(私小說體)로 적은 것이다. 작가가 회갑 때 조카의 종용을 받아 1795년(정조 19)에 순 한글로 초(草)를 잡고 1805년(순조 5)에 보태어 쓴 것이다.

지은이의 집필 동기에 따르면 이 글은 단순히 자기 고백적인 회상록이 아니라, 그 사건의 내막을 폭로하고 규명하려는 해명서이며 증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남편의 억울한 죽음이라는 참변을 여인의 넋두리로 늘어놓지 않고 일일이 분석하고 해부한 탁월한 안식(眼識)이다. 흔히 이 글을 그 제목만으로 판단하여 억울하고 처절한 자신의 원통한 감정을 피력한 주정적인 글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로 매우 냉철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읽혀진 이유도 바로 이러한 특성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지은이인 혜경궁 홍씨는 매우 끔찍하고 통분할 일을 쓰는데 있어서도 자기 감정을 최대한으로 억제하며 우아하고 세련된 태도를 잃지 않고 있다. 기구한 자신의 인생을 절절히 묘사한 이 작품은 보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작품의 흐름이 되는 사도 세자와 작자 자신의 운명은 사실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 같고, 그 내용 또한 입체적이어서 소설에 비견할 만하다. 그래서 이 작품을 소설로 분류하는 사람도 있다.

이 작품은 박진감 있는 사건 전개 방식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궁중의 음모와 파란만장한 사건들은 읽는 이로 하여 흥미를 더하게 한다. 또한 인물묘사에 있어서 영조와 사도세자 즉 부자지간의 성격적 특징의 부각을 매우 적나라하고 섬세하게 표현하여 사건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이질적인 성격 갈등의 표출을 예리하게 서술하고 있으며, 4대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를 골간으로 하여 임오화변과 자신의 친정을 둘러싼 시파와의 당파싸움까지 그 내력을 소상히 기술함으로써 정계야화로서도 중시되고 있다.

 

● 요점 정리

■ 지은이 :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1735-1815) 영풍 부원군(永豊府院君) 홍봉한(洪鳳漢)의 딸. 10세에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빈으로 책봉되고, 영조 38년 사도세자가 죽은 뒤에 혜빈(惠嬪)의 칭호를 받았다. 후에 그의 아들 정조(正祖)가 즉위하면서 혜경궁(惠慶宮)으로 칭하고, 1799년 사도세자는 장조(莊祖)로, 혜경궁은 경의왕후(敬懿王后)로 추존되었다. 순조 15년에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갈래 : 한글 수필. 궁정 수필

■ 연대 : 조선 순조 5년(1805년) 작자 71세 때

성격 : 자전적 회고록

표현 : 우아하고 품위 있는 표현, 절실하고 간곡한 묘사, 전아하고 품위있는 궁중 용어의 사용

문체 : 내간체

주제 : 사도세자의 참변(임오화변)을 중심으로 한 파란만장한 인생 회고

의의 : 한글로 된 궁중문학의 백미

이본 : 한문본으로도 전해지는데 <읍혈록(泣血錄)>이라 함.

             원제가 <한듕록>으로 되어 있으며, 일명 <閑中漫錄>, <閑中錄>이라고도 표기한다.

 

● 참고

■ <한중록(恨中錄)>의 역사적 배경

영조(英祖)에게는 이미 정빈(靖嬪) 이씨(李氏)에게서 난 세자가 있었으나 10세에 죽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은 자기파의 종가(宗家) 중에서 세자를 추대하였으나 영조는 이를 물리치고 영빈(暎嬪) 이씨 소생의 왕자를 세자로 책봉했으니 이가 곧 사도세자(思悼世子)다. 노론은 새로 책봉된 세자를 중심으로 소론을 물리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온갖 음모를 꾸며 세자를 괴롭혔으며 마침내 영조 38년(1762)에 윤급이 나경언을 시켜서 왕에게 세자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참언하게 하였다. 영조는 분노하여 결국 세자를 폐위시켜 서인(庶人)으로 만들었다. 세자는 영조에게 변명하였으나 영조는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하였다. 1762년 5월 22일의 일이다.

혜경궁 홍씨는 그 역사적 배경을 객관적으로 기술하지는 않았다. 중도에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는 차마 말할 수 없다 하여 의식적으로 사건의 핵심을 회피한다. 그 대신 자신의 외로운 모습과 장례 후 시아버지인 영조와 다시 만나는 극적인 장면으로 비약한다.

 

■ <한중록>의 등장인물

⑴ 영조 : 숙종의 넷째 아들로 탕평책과 농업 장려, 신문고 제도 설치, 균역법의 확립 등 조선시대의 문화와 사업을 크게 부흥시킨 임금이나, <한중록>에 비친 그의 성격을 보면, 편벽(偏僻)한 성격에 애증(愛憎)이 현저해서 자녀간의 차별이 심했으며 자상하고 섬세하기보다는 성급하고 고집이 세며 변덕스러운 인물로 보임.

선희궁(영빈이씨) : 영조의 후비로 사도세자와 화평옹주의 생모이다. 성품이 온후하고 자애로워 혜경궁 홍씨를 끝까지 돌보아 주나 사도세자 사건이 나기 전에 영조를 종용한 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는다.

⑶ 홍봉한 :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다. 1743년 딸이 세자빈에 뽑힌 뒤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으며, 이후 영의정에까지 오른다. 세자가 서인으로 격하되고 정순왕후가 섭정함에 따라 직위를 박탈당하고 당파싸움에 밀려 일가가 망하게 된다.

⑷ 사도세자 : 영조의 둘째 아들이다. 이복형 효령세자가 요절함에 따라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파싸움에 말려 뒤주 속에서 8일 만에 굶어 죽는다. 선천적으로 한가지 일을 하려면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사색하는 내향적 성격으로 동기간의 대인관계로 볼 때 본성은 선량하고 정이 많으나 부왕과의 불화로 비극적으로 생을 마쳤다.

⑸ 혜경궁 홍씨 : 정조의 어머니로 영의정 홍봉한의 딸이다. 천성이 곱고 후덕하며 자애로워 모든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으나 남편의 참혹한 사건과 친정 가문의 몰락, 아들의 죽음 등으로 인해 한많은 인고의 세월을 살다 죽었다.

정조 : 어머니는 혜경궁 홍씨이다. 아버지가 원통하게 죽은 뒤 효장세자가 되었고, 1776년 영조가 죽자 즉위했다.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그 묘인 장헌묘를 수원으로 옮겨 수원성을 축성하고 자주 행재(行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