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생전(楮生傳)                           -이 첨-  

줄거리

서두(序頭), 선계(先系), 사적(事蹟), 후계(後系), 평결(評結)로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서두에서 저생(楮生)의 성은 저(楮-닥나무), 이름은 백(白-흼), 사는 곳은 종이의 생산지인 회계라는 것을 밝혔으며, 선계에서는 종이를 처음으로 만든 채륜의 후예라는 것을 서술하였다. 사적에서는 본래 그는 천성이 정결하여 무인보다 문인을 좋아하고 모학사(毛學士-붓)와 교분이 두터웠으며, 학문을 하여 천지음양(天地陰陽)의 이치와 성명의 근원에 통달하였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글까지 모두 기록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종이의 내력을 통시적으로 언급하여, 종이의 발명시기인 한대부터, 진, 수, 당과 작자 당시인 원, 명에 이르기까지 종이의 용도와 내력을 기술하였다. 후계는 종이의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나누었다. 평결에서는 종말을 설명하고, 후손들이 천하에 가득하다고 칭찬하였다.

이해 및 감상

이 작품에 의인화되어 있는 저생(楮生)의 생애는 작자 이첨(李詹)의 실제 생애와 아주 유사하다. 작가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9명의 임금(충목왕 → 충정왕 → 공민왕 → 우왕 → 창왕 → 공양왕 → 이태조 → 정종 → 태종)을 섬기는 동안 화려한 벼슬살이를 하기도 하였지만, 직언을 하다가 여러 번 귀양살이도 하였으니, 그야말로 영욕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작가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종이의 역사나 기능에 의탁하여 당시 부패한 선비의 도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려고 이 작품을 썼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작품의 끝부분 '왕자의 후손들은 그 조상이 대대로 ~ 융성해지고 쇠약해지는 것은 모두 운명과 교화의 탓이었다.'에서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가전은 보통 주인공이 먼저 소개되고 이어서 그의 가계에 대한 서술이 장황하게 작품의 서두를 장식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경우는 작품의 끝 평설부(評說部) 가운데에 주인공의 가계가 서술되어 있어서 일반적인 가전의 전개 방식을 파괴하고 있다.

이 작품은 다른 가전체 작품들에 비하여 전개 형식에 약간의 변이를 보이고 있다. 가전에서는 먼저 주인공이 소개되고, 이어서 그의 가계에 대한 서술이 장황하게 작품의 서두를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경우에는 ‘태사공은 말한다.’로 시작되는 평설부 가운데에 주인공의 가계가 서술되어 있어 일반적인 전개 형식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적 파격은 주인공의 행적에 작품의 초점을 맞추려는 의도에서 생겨난 변화하고 할 수 있겠는데, 이러한 전개 형식상의 파격은 다음에 “정시자전(丁侍者傳)”에 이르러 더 광범위하게 이루어짐으로써 가전의 형식적 변화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요점 정리

◆ 갈래 : 가전(假傳)

◆ 성격 : 계세적, 교훈적, 의인적

◆ 구성

* 도입 → 저생의 가계 소개

* 전개 → 종이의 다양한 용도와 내력

* 논평 → 저생의 종말과 후손 번영

◆ 특징

* 작가의 자전적 삶의 내용이 함축적으로 반영되어 있음.

* 일반적인 가전의 형식과 달리, 평결부에서 주이공에 대한 논평을 가하지 않고 주인공의 가계를 설명함.

◆ 의의 : 가전의 형식적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작품임.

◆ 주제 : 문신(文臣)으로서의 올바른 삶. 위정자들에게 올바른 정치를 권유함.

◆ 참고 : 가전과 소설의 차이점

가전(假傳)은 전기적 형식과 허구적 성격 면에서 조선조의 소설 발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대부분의 고전 소설이 '전'이라는 제목과 함께 주인공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가전체 소설과의 연계성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가전체 문학은 일반 고전 소설과는 구분된다.

<국순전>이나 <국선생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가전은 문장의 근거가 되는 문헌상의 출처를 관념적으로 나열하여 작품 내적인 독자성이 확보되지 못하였고, 서술적 형상화 역시 소설에 비해 미흡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전은 전(傳)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일정한 형식이 있고, 필연적 인과에 의한 구성이 희박하며, 대립과 갈등이 약하다는 점에서 소설과 구분된다.

작품 읽기

생(生)의 성은 저(楮)인데, 저란 닥나무로 종이의 원료이다. 그의 이름은 백(白)이며, 희다는 뜻이다. 자는 무점(無點)으로, 무점은 아무런 티가 없이 깨끗하다는 말이다. 그는 회계(會稽, 최초 종이의 생산지) 사람으로 한나라 채륜(후한 때 처음으로 종이를 만들었다는 사람)의 후손이다. (저생의 내력)

생은 태어날 때 난초탕에서 목욕을 하고, 흰 구슬을 희롱하고 흰 띠로 꾸렸기 때문에 그 모양이 깨끗하고 희었다(종이를 만드는 과정). 그의 아우는 모두 19명이나 된다(종이는 한 권이 20장으로 되어 있음). 이들은 저생과 같은 어머니(같은 재료)에게서 태어났다. 이들은 서로 화목하고 사이가 좋아서 잠시도 서로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한지 1권을 묶어서 판매하는 것을 두고 한 표현임).

* 저생의 가계 소개

이들은 원래 성질이 정결하고, 무인(武人)을 좋아하지 않아, 언제나 문사(文士)들만 사귀어 놓았다. 그 중에서도 중산(中山, 중국에 있는 지방의 하나로 예부터 품질 좋은 붓이 많이 나온다고 함.) 모학사(毛學士)가 가까운 친구인데, 모학사란 곧 붓을 가리킨다. 저생과 모 학사는 마냥 친하게 놀아서 혹시 모 학사가 저생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더럽혀도(종이 위에 글이나 그림을 그렸다는 뜻임) 씻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저생은 학문으로 말하면 천지음양의 이치를 널리 통하고 성현과 명수(命數, 운명 또는 수명)에 대한 학문의 근원까지도 모르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제자백가(중국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여러 학자와 학파의 총칭)의 글과 이단(異端) 불교에 이르기까지도 모조리 써서 보고 연구하였다.

한(漢)나라에서 선비를 뽑는데 책(策, 과거시험 과목의 한 가지로,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물어서 서술하게 하던 시험)을 지어 재주를 시험했다. 이 때 저생은 방정과(方正科, 한나라 과거제의 하나)에 응시하여 임금께 말하였다.

"옛날이나 지금의 글은 대개 댓조각을 엮어서 쓰기도 하고, 흰 비단에 쓰기도 합니다(종이를 만들기 전에 대나무, 비단에 글을 썼었음). 그러나 이것은 모두 다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신은 비록 두텁지는 못하오나 진심으로 댓조각이나 비단을 대신하려 하옵니다. 저를 써 보시다가 만일 효력이 없으시거든 신의 몸에 먹칠을 하시옵소서."

이 말을 듣고 화제(和帝, 후한의 4대 황제, 이때 채륜이 종이를 발명함)는 사람을 시켜서 시험해 보라 했다. 시험해 보니 그의 말대로 과연 편리하여 전혀 댓조각이나 비단을 쓸 필요가 없었다. 이에 저생을 포상하여 저국공(楮國公) 백주 자사(白州刺史, 종이이기 때문에 닥나무 저(楮) 자를 써서 저국공이라 한 것이고, 희기 때문에 백주라고 한 것임)의 벼슬에 임명하였다(종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됨을 뜻함). 그리고 만자군(수많은 글자를 뜻하는 것으로, 종이 위의 많은 글씨를 군대에 비유한 것임)을 통솔케 하고 봉읍(제후로 봉하여 내준 땅)으로 그의 씨(氏)를 삼았다.

이것을 보고 나무껍질, 삼(麻), 고기 그물, 칡뿌리 네 사람이 자기들도 써 주기를 청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말처럼 완전하지 못하여 파면되고 말았다.

저생은 마침내 오래 사는 술법(종이를 오래 보관하는 법)을 배워, 비나 바람이 그 몸에 침입하지 못하고 좀이 먹어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항상 7일이면 양기(陽氣)를 빨아들이고 먼지를 털며, 입을 옷을 볕에 쬐면서 조용히 거처하고 있었다.(오래 사는 술법에 해당함)

그 뒤에 진(晉)나라 좌태충(左太沖, 중국 진나라 때의 시인으로, 그가 10년을 구상하여 완성한 '성도부'는 그 당시의 부호들이 다투어 베끼느라 뤄양의 종이 값이 올랐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음)이 <성도부(城都賦)>를 지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저생이 그 글을 한 번 보더니 이내 외워 버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외우는 대로 다투어 베껴 썼으나, 그것은 풍류를 아는 선비나 알 수 있는 글이었다.

뒤에 와서는 왕우군(王右軍, 왕희지)의 필적을 본받아서 해자(楷字, 해서체)로 쓴 글씨가 천하에서 제일 묘했다. 그는 다시 양나라 태자 통(統)을 섬겨 함께 <고문선>을 편찬하여 세상에 전했다. 또 임금의 명령을 받고 위수(남북조 때 학자로, 황제의 명으로 역사 책인 <위서>를 편찬함)와 함께 국사를 편찬하기도 했다. 하지만 위수가 칭찬하고 깎아 내리는 것을 공정하게 하지 못한 까닭에 후세 사람들은 이 역사서를 예사(穢史, 더러운 역사책)라고 했다. 이에 저생은 자진하여 사직하고(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짐) 소작(蘇綽)과 함께 장부나 기록하겠다고 청했다. 임금이 이를 허락하자 지출은 붉은 글씨로 쓰고, 수입은 먹으로 써서 분명하게 장부를 꾸몄다(금전출납부를 씀-종이가 문서 작성 도구로 확대되어 쓰임). 이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그의 재능을 칭찬했다.

그런 뒤로 진(陳) 나라 후주(진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놀이와 향락에 빠져 나라일을 태만이 하다가 수나라에게 멸망당함)의 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후주는 그의 행신(幸臣,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인 학사의 무리들과 함께 항상 임춘각에서 시를 지었다. 이때 수나라 군사가 경구(京口, 서울 입구)를 지나자, 진나라 장수가 이를 비밀리에 임금에게 급히 알리었다. 그러나 저생은 이것을 숨기고 봉한 것을 열어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진나라는 수나라에 패하고 말았다.

대업(大業, 수나라 양제의 연호) 연간(어느 왕이 재위한 기간)의 일이다. 저생은 왕주, 설도형(수나라 때의 문인들)과 함께 양제를 섬겨, 그들과 같이 정초(庭草), 연니(燕泥)의 글귀를 읊었다. 그러나 양제는 딴 사람이 자기보다 나은 것을 싫어해서 저생을 돌보지 않았다. 저생은 마침내 소박을 당해 대궐을 나오고 말았다.

당나라 때였다. 홍문관(관리를 교육시키고 조정의 제도, 의례에 관해 논의하는 기구)이란 기구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에 저생은 저수량, 구양순(중국 당나라 때의 유명한 서예가) 등과 함께 역사를 강론하고 모든 나라일을 상고(서로 견주어서 토론하는 것)하여 처리하였다. 이리하여 세상에서 말하는 '정관(貞觀)의 좋은 정치'(당나라 태종이 나라를 잘 다스렸음을 기리는 말. 정관은 태종 때의 연호)를 이룩했다. 또, 송나라가 일어나자 정주학(중국 송나라 때 일어난 유학의 새로운 학파)의 모든 선비들과 함께 문명의 좋은 정치를 이룩하기도 하였다.

사마온공(사마광, 북송 때의 관료 정치가)은 <자치통감>(중국 전국시대부터 오대까지를 다룬 역사서)을 편찬할 때 저생이 박식하고 아담하다 해서 늘 옆에 두고 물어서 썼다. 그때 마침 왕안석(중국 북송 중기의 정치가, 부국강병을 위해 파격적인 개혁을 단행한 정치가)은 권세를 부려 <춘추>의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왕안석은 <춘추>를 가리켜 다 찢어진 소식지라고 평하였다. 저생은 (왕안석이 '춘추'를 가리켜 다 찢어진 산문이라고 평한 것)를 옳지 못한 평론이라고 했다(직간하는 선비의 자세). 이리하여 마침내 배척당하고 쓰이지 못하였다.

원나라 초년이 되었다. 저생은 본업에 힘쓰지 않고 오직 장사만을 좋아 하였다. 몸에 돈 꾸러미를 두르고(남송 말년부터 종이돈이 사용됨) 찻집이나 술집을 드나들면서 한 푼 한 리의 이익만을 도모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간혹 이를 비루하게(추하게) 여겼다.

원나라가 망하자 저생은 다시 명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비로소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이로부터 자손이 번성하여 대대로 역사를 맡아 쓰는 사씨(史氏,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가 되기도 하고, 시가(詩家, 시를 짓는 사람)의 일가를 이루기도 하였다. 발탁되어 관직에 있는 자는 돈과 곡식의 수효를 알게 되었고, 군사에 관한 사무에 종사하는 자는 군대의 공로를 기록하였다.(종이가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구절임. 종이에 역사를 기록하기도 하고 시를 적기도 하고 장부로써 돈과 곡식의 수효를 기록하기도 하고 군대의 공로를 기록하기도 하는 등 종이의 여러 가지 쓰임을 드러낸 구절임) 그들이 맡은 직업에는 비록 귀천이 있기는 했지만 모두 직무에 태만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았다. 대부(벼슬 품계에 붙이던 칭호)가 된 뒤부터 그들은 거의 다 흰 띠를 두르기 시작하였다.

* 종이의 다양한 용도와 내력 - 자손의 번성과 벼슬

태사공(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인 사마천)은 말한다.

무왕(재위 기간 B.C 1122-1116)이 은을 이기자, 아우 숙도(채숙이라고도 함)를 채(蔡) 땅에 봉하여 주(紂)의 아들 무정을 도와서 은나라의 유민들을 다스리게 했다.

무왕이 죽자 성왕(재위 기간 B.C 1115-1079)이 주나라를 다스리게 됐는데 나이가 어려서 주공이 이를 도왔다. 이 때 채숙이 나라 안에 근거 없는 풍설(風說)을 퍼뜨리자 주공은 그를 귀양 보냈다. 그 아들 호(胡)는 과거의 행동을 고쳐서 덕을 닦았다. 이에 주공은 그를 천거하여 높은 벼슬에 썼다. 성왕은 다시 호를 신채(新蔡)로 봉했으니 그가 곧 채중(蔡仲)이었다.

그 뒤에 초나라 공왕(재위 기간 B.C 591-560)이 애후(哀候)를 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가 식부인(息夫人)을 공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채 땅 사람들은 그 아들 힐을 세웠다. 그가 바로 무후(繆侯)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齊)의 환공(재위기간 B.C 685-643)이 그가 채 땅의 여인과 헤어지지 않은 채 다시 딴 곳에 장가 갔다 해서 무후로 사로잡아 돌아왔다.

무후가 죽자 그 아들 갑오가 섰다. 그러나 초의 영왕(재위 기간 B.C 541-529)이 영후 아비의 원수를 갚으려고 군사를 매복하고 갑오에게 술을 먹여 죽였다. 그리고 채 땅을 포위하고 멸한 다음에 경후의 아들 여(廬)를 구하여 세웠다. 그가 바로 평후다. 이들은 그로부터 채나라 아래쪽으로 옮겨 살았다. 그 뒤에 초의 혜왕(재위 기간 B.C 489-432)이 다시 채 땅의 제후들을 멸해서 그 뒤로는 마침내 쇠약해졌다.

아아! 왕자(王者)의 후손들이 그 조상이 대대로 쌓은 두터운 덕으로 해서 국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융성해지고 쇠약해지는 것은 모두 운명과 교화의 탓이었다. 채(蔡)는 본래 주(周)와 같은 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나라는 양쪽 강국 사이에 끼여 있어서 공연한 공격을 받아 왔다. 그러면서도 길이 그 자손이 없어지지 않고 있다가 한(漢)의 말년에 이르러 드디어 봉읍을 받고 그 성을 바꾸게 되었다. 그러니 나라가 변해서 사사로운 집이 되고, 집이 커져서 그 자손이 천하에 가득해지는 것을 채씨의 후손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다.

* 평결 - 저생의 종말과 후손의 번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