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술

1.

최초의 문자들은 그림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문자는 닮음을 잃어 버리고 추상적 기호가 되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기호들이 더 이상 세계를 닮지 않았는데, 그것들이 어떻게 세계를 전달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불안감에서 나온 것이 캘리그램(calligram)이다. 그것은 낱말로 한 번 대상을 가리키고 그림으로 지시를 또 한 번 반복한다. 도상과 문자라는 두 개의 끈으로 '대상과 기호' 사이를 단단히 동여매는 것이다. 이렇게 캘리그램에는 현실을 닮지 않은 문자 텍스트가 행여 현실과 유리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담겨 있다. 근대 철학자들은 문자 텍스트를 '자연의 거울'이자, '세계의 그림'이라고 믿었다. 캘리그램은 문자와 그림을 통해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한 의도를 담고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근대의 철학적 이상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2.

그런데 오늘날 이 순진한 이상은 무너지고 말았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문자와 도상이 공존하는 일종의 캘리그램이다. 하지만 전통적 캘리그램과는 다르다. 도상이 가리키는 것을 문자가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 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분명히 파이프이다. 그런데도 문자는 잘라 말한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전통적인 캘리그램에서는 문자와 도상이 협력하여 이중으로 대상을 지시하나, 마그리트의 캘리그램에서는 문자와 도상이 서로 충돌하고 만다. 그는 캘리그램으로 캘리그램을 파괴한다. 마그리트의 캘리그램은 현실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3.

현실을 재현하려는 기존 회화는 '유사(類似)의 원리'라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그림은 되도록 실물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마그리트는 이러한 유사의 의무를 포기하고 '상사(相似)의 원리'를 지향한다. 유사와 상사는 둘 다 비슷한 뜻을 갖는 낱말이나 사실은 명확히 구별되는 개념이다. 유사의 관계에는 원본과 복제 사이에 위계질서가 있다. 반면 상사의 관계에는 그런 위계질서가 없다. 유사의 원리는 원본과 복제의 '동일성'에 집착하나, 상사는 그 집착에서 벗어나 복제들 사이에 '차이'를 전개시킨다.

4.

마그리트에게 나뭇잎 그림은 나뭇잎이라는 실물을 가리키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나뭇잎 형상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다양한 시각적 놀이이다. 이 상사의 놀이 속에서 우리는 문득 하나의 이미지 안에 들어 있는 무한한 조형적 잠재성을 깨닫게 된다. 유사에 입각한 재현은 우리의 상투적 시각을 강화하여 나뭇잎 그림에서 나뭇잎을 보게 할 뿐이다. 유사의 원리는 이렇게 동어 반복이다. 반면에 상사의 원리는 우리의 눈을 이 상투성에서 해방시켜 일상 사물들 속에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비로소 보게 한다. 이게 바로 마그리트가 추구하는 상사의 진리이다. 이 점에서 마그리트는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한다는 현대 회화의 과제를 닮음을 통해 파괴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고 볼 수 있다.

◆ 2014년 3월 사설 모의고사(대성), 국어B 독서 영역 '예술' 지문

◆ 개요 : 진중권, 『숭고와 시뮬라크르 - 유사와 상사』